엑스트라 파업 선언 66.
내 옆에선 연승연이 한 잔 마시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색색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을 구경하다 찰랑이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리자 성산하가 빈 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물결치며 차오르는 푸른빛깔은 그저 술인데도 묘하게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찰랑이는 윤슬을 멍하니 응시하던 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킬을 인지한 시기에 비해 포션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던데. 따로 공부해 익힌 건가?”
“궁금한 게 뭐가 그렇게 많은데? 또 의심스럽다느니 그런 소리 하려고.”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경력에 비해 포션이 꽤나 괜찮아서, 아니 솔직히 훌륭했지. 조금 놀랄 정도로.”
뜻밖의 호평에 멈칫했다. 당연하게 듣던 치사였지만 성산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의외였던 탓이다. 호선을 그린 입술을 바라보다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셔 본 것처럼 말한다? 너 포션 안 마신다며.”
“이초에게 들었나 보지? 맞아. 원래 다른 포션은 잘 마시지 않지만 그래도 마셔 봐야지. 누가 만든 건데.”
“……어땠는데.”
“말했듯이, 훌륭해.”
생긋 웃으며 답하는 성산하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그래, 누가 만든 건데! 씰룩씰룩 춤을 추는 입꼬리를 겨우 잡아 내리며 답했다.
“내 생각엔, 타고난 것 같아.”
“큽, ……응. 내가 보기에도 그래. 넌 타고났어. 따라 한다고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성산하는 눈 아래에 웃음기를 담고 다 안다는 듯이 느물거리던 평소의 느낌과 달리 조금 진중한 분위기였다. 그가 잔을 입에 대며 중얼거렸다.
“진심인 것 같아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어.”
“그야…….”
‘나에겐 포션이 전부니까.’
나 역시 술기운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착하게 구는 성산하라 조금 마음이 동해서인진 몰라도 덜컥 뱉어 버릴 뻔한 진심을 주워 삼키고는 담담한 척 말했다.
“응?”
“아니야, 그냥 재밌잖아.”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와 주니까. 짜증 나는 놈 한 방 먹일 수도 있고 아픈 사람 살릴 수도 있고.”
말하던 중 성산하의 시선이 진득하니 묘해지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정말 닮았다 싶어서. 아, ……기분 나쁘다고 했던가.”
미안.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몰아쳤다. 대체 넌 누구길래 강의진을 찾냐는 물음, 죽은 사람을 잡고 있는 성산하를 향한 답답함과 한심함, 의도치 않게라도 그를 속이고 있다는 미안함까지.
“이만 포기하라니까.”
참지 못해 뱉은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며 힐긋 앞의 눈치를 봤다. 성산하는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답했다.
“그래.”
“뭐?”
“……이만 놔줘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어.”
성산하는 살짝 잔을 흔들어 요동치는 파문을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태제헌이 살아 있다는 첩보를 받았어. 하지만 다른 인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분명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 미친놈. 죽었을 리가 없지. 목줄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성산하가 태제헌의 정확한 위치는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목을 매만지자 느릿한 시선이 닿아 왔다. 눈가가 붉은 게 취한 게 확실했다.
‘아까부터 혼자서 홀짝대더니 이럴 줄 알았지…….’
애초에 담금주라 도수가 높은 편이었다. 나 역시 포션 메이커들이 기본으로 가진 해독 스킬이 있는데도 미미하게 취기가 오르는 상태였으니까.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몰래 앞의 잔을 치우려 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성산하가 삐죽 눈썹을 올리더니 내 손까지 한 번에 크게 쥐었다. 꽉 잡힌 손을 달싹이자 흘러넘친 술이 우리 둘의 손을 한 번에 적셨다. 성산하는 전보다 더 달아오른 얼굴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왜. 걱정돼?”
“그래. 내 공방이 걱정된다. 새끼야.”
“멍멍아-.”
“아 씨발, 알겠다고! 마셔, 처먹으세요. 주인 놈아.”
손아귀 힘이 풀린 틈을 타 황급히 잔을 놓고 앞으로 밀어 버렸다. 성산하는 기껍게 받아 마시며 웃음을 흘렸다.
“조금 아쉽네. 태제헌을 찾으면 우리 사이 계약도 풀린다고 생각하니.”
“아쉽긴.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거든.”
“우리 재계약할까? 천랑으로 들어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는 성산하를 보며 나도 앞에 놓인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성산하는 잔이 빌 새 없이 자연스럽게 술을 채우며 물었다.
“다른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둘 다 센터 출신이니 따로 연고가 있는 길드도 없고?”
“아까부터……. 무슨 길드 타령이야. 그딴 거 없다니까.”
“좋아. 나만 노력하면 된다는 소리군.”
“뭐?”
무슨 의도인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지만 성산하는 그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도리어 찰랑이는 잔을 내게 내밀며 마시라 종용하기까지 했다. 하도 졸라 대 몇 잔을 연거푸 마시자 패시브 스킬도 효과가 없는지 취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깐 조느라 고개를 떨군 사이 어디선가 어렴풋이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몽롱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뭐야, 어디 갔어. 성산하…….’
자리에서 일어나다 의자 다리에 발이 꼬여 몸이 휘청였다. 넘어질 뻔한 몸을 뒤에서 뻗어 온 단단한 팔이 잡아 일으켰다. 순순히 손길을 따라 소파에 길게 몸을 누이자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몸 위로 담요가 내려앉았다.
‘승연이 덮어 줬던 건데……. 지금 이게 나한테 있으면 승연이는…….’
가벼운 세기로 머리를 헤집으며 쓰다듬는 손길에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잘 자.”
발갛게 달아올라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던 성산하의 눈빛이나 뺨 등이 어느새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돌아가 있다는 것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
그날 이후 성산하는 하루걸러 하루 공방을 찾아왔다. 어쩔 땐 재수 없고 가끔은 싸가지 없었지만 대체로 견딜 만하게 굴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꽤나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성산하 뒤에 따라오는 이초가 항상 양손 가득 짊어지고 오는 선물들이 큰 몫을 했다는 것까지는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도 이초가 가져온 과자를 씹으며 로비를 채우고 있는 불청객들을 비뚤게 쳐다봤다. 저놈들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데 어떻게 손님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광고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우후죽순 떠오르는 좋지 않은 기억들에 그저 나중 일로 미루기를 몇 번째다.
포션 재료들을 운반하던 진명이가 목장갑을 털며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사장님.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끝났냐? 수고했어. 이거 가져가서 사장님들 드려.”
이초가 가져온 과자 중 하나를 건네자 진명이가 우물쭈물하며 나를 바라봤다.
큰 덩치에 비해 작은 박스를 소중히 안은 진명은 우물쭈물하더니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이렇게 챙겨 주시는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용병 뽑는다는 거 봤습니다. 그, 친구가 보여 줬는데 공방이 사장님 공방이길래……. 제가 어떻게든 재료 중 하나라도 구해 드렸어야 했는데 싶어서요.”
“죄송은……. 신경 쓰지 말고 모레 보자.”
진명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공방을 나갔다. 작은 트럭이 덜덜거리며 뒷문에서 멀어지고서야 연승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용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호현 님?”
“응?”
휘둥그레진 다람쥐의 눈을 보고서야 알아챘다. 내가 직접 용병 구인 공고를 올린 걸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달력을 보니 어느새 바로 내일이 면접일이었다.
“맞다. 승연아. 내가 용병 공고 올렸어.”
“호현 님이 직접요? 죄송합니다!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괜찮아. 쉽던데?”
풉! 어디선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관자놀이에 힘줄이 서는 것을 참으며 당당하게 카운터 컴퓨터로 향했다.
헌트로폴리스에 접속해 로그인을 했다.
‘아이디, 씨…발 구구구. 비밀번호는…….’
구인 게시판에 들어갔다. 내 공고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갔지.”
조금 헤매다 ‘내가 작성한 게시글’ 탭을 찾아 누르자 그제야 글이 떴다. 능숙하게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아무 댓글도 달리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전 게시판에서 본 글들엔 한두 개씩이라도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이상하게 내 게시글에만 댓글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댓글 창까지 막혀 있었다.
‘강한 놈이 없었나?’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게 보여 일단 화면을 보여 줬다.
“여기, 이거야.”
“호, 호현 님. 설마 이거… 이게 저희 공고인가요?”
“응. 그런데 댓글이 하나도 안 달렸어. 내일 아무도 안 오는 거 아니야? 그래도 조금은 오겠지?”
“아, 안 돼…….”
연승연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성산하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고갤 돌려 물었다.
“대체 왜 웃는데?”
“큽, 아니야. 하던 일 마저 해.”
살랑살랑 흔들리는 장갑을 보는 중에 옆에서 게시글을 찬찬히 읽던 연승연이 결국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아무도 안 올까 봐 그래? 내가 시간을 잘못 정한 건가……. 괜찮아. 이거 그대로 다시 올려 보자. 다른 애들도 그렇게 하더라.”
“아! 아니!! 아니에요. 호현 님 괜찮습니다! 이후는 제가 할게요! 제발요!!”
연승연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짜식, 역시 조수로 쓸 만하다니까.
대견하게 바라보다 배려와 공방 소개, 정확한 조건 제시 삼박자를 다 갖춘 완벽한 공고를 다시금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근데 내일 지원자 없을 수도 있으니까 빨리 하는 게 좋지 않아?”
지원자가 없다는 소리에 연승연의 얼굴에 위안이 스쳤다 사라졌다.
“사람을 뽑는 중요한 일이니, 조금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해 봐요. 호현 님.”
재밌는 것이라도 보듯 턱을 괴고 지켜보던 성산하도 실실대며 말했다.
“맞아, 힘내도록.”
“꺼져!”
“예쁜 말.”
“씨발!!”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