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68.
「주인님이 ‘이리 온’을 하셨습니다. 서둘러 주인님께 달려갑니다.」
상태창에 아차 하기도 전에 몸이 성산하의 품에 안기듯 던져졌다. 반동을 이기지 못해 휘청이는 나를 한 팔로 수월히 받아 안은 성산하가 웃는 진동이 내게도 느껴졌다.
씨발, 씨발!!
온몸에 맞닿은 상황에 진저리 쳤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감싼 성산하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 겨우 들어왔네. 바보들. 뒷문으로 오면 편한데 저길 기다리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겨우 한둘 정도 예상했는데.”
‘누구지? 겨우 들어왔다는 건, 나무가 막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그나저나 면접장은 어디야? 안내하는 사람 하나 없네. 하여간 중소는 어쩔 수 없다니까. 아, 계단이다. 지하는……. 아니겠지. 일단 올라가 보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겨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멈춰 선 목소리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위로 멀어졌다.
성산하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하군. 내가 들어오며 결계에 혼동이 있었나 본데.”
귓가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그러다 이제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힘을 줘 성산하를 밀어 냈다. 겨우 한 발 거리를 벌린 게 다지만 방금 전보단 훨씬 나았다.
“뭐 하는 짓이야.”
성산하가 손을 뻗어 내 후드를 툭 치며 말했다.
“이런 것 말고 아이템 하나 구하는 게 낫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이미 성산하는 제 인벤토리를 뒤지고 있었다.
‘대체 인벤토리가 몇 칸인 거야?’
각성자에게 기본으로 주어지는 세 칸의 인벤토리 외에는 모두 특수 스킬이나 돈을 발라 아이템으로 늘리는 방법뿐이었다. 다들 포션이나 가장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 다니는데 성산하는 저번의 엘프목도 그렇고, 별 쓸데없는 것까지 들고 다니는 걸 보면 길드장은 길드장인 건가.
뭘 발견했는지 작게 감탄을 흘린 성산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렇게 가볍고 조심성이 없어서야. 당장 센터에 잡혀가더라도 할 말 없지. 안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성산하는 대답 대신 작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복잡한 문양이 음각된 은색 반지였다.
“내가 자주 사용했던 건데 이제는 네게 더 유용할 것 같군. 받아.”
“필요 없어. 또 이상한 기능이나 붙어 있겠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신뢰를 쌓긴 일렀나? 아니면 한쪽 무릎이라도 꿇고 주기라도 했어야 해?”
“헛소리 마.”
성산하는 확인해 보라는 듯 코앞으로 반지를 드밀었다. 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반지를 비뚤게 쳐다보다 낚아채 감정했다.
<얼굴 없는 신의 반지>
누구나 본 적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의 반지.
신의 힘을 빌려 가면을 쓸 수 있다.
“S급이야.”
“뭐……? S급?”
성산하가 준다고 하니 꽤 괜찮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무려 S급이라니.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할 아이템이었다.
‘대체 무슨 능력이지?’
모호한 설명에 위장이라는 건지 인지 부조화라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반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만 하자 성산하가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벗은 손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반지를 건넸다. 손바닥 위에 떨어뜨려 놓으려는데 성산하는 얄밉게도 피하더니 넷째 손가락을 쏙 껴 넣었다.
“이런 거야.”
반지를 끼면 뭔가 크게 달라질 줄 알았건만 내 앞의 성산하는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였다. 아직 시동어를 읊지 않은 건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성산하가 씩 웃더니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뭐 하냐.”
“내 얼굴 기억나?”
뜬금없는 소리에 표정을 구겼다. 방금 전까지 마주 보고 있던 주제에 자기 잘생겼다고 자랑하는 건가.
“떠올리고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봐.”
“무슨 헛소리야. 그야 당연히……! 어?”
코웃음 치며 눈을 가린 손을 뿌리치려는데 누군가 지우개질이라도 한 것처럼 성산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팔을 잡은 채 그대로 멈췄다.
‘방금 봤잖아, 왜 기억이 안 나지?’
차근차근 되짚어도 마찬가지였다. 쥐어짜 내면 흐릿한 단어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머리는 라이커, 라이커 갈기. 얼굴은 존나 잘생…….”
내치려던 팔을 꾹 붙잡은 채 중얼거리는 내 머리 위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떨어졌다.
“존나 잘생겼어?”
“……손 치워 봐. 뭔데 이거.”
얼굴을 가린 손이 떨어졌다. 여유로운 성산하의 얼굴이 보이고 나서야 머리를 옥죄던 혼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게 아이템의 효과란 사실을 깨닫고는 놀란 눈으로 반지를 바라봤다. 성산하는 제 약지에서 반지를 빼내며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인지 왜곡 능력을 가진 아이템이야. 반지를 낀 상태에서 마주친 사람은 내 정확한 모습을 기억할 수 없지.”
“하지만 난 널 아는데도?”
“당장 반지를 낀 내 앞에서 떠올리려니까 모순이 생겨 그런 거다. 영향 범위 바깥이라면 문제없어. 다만 그렇기에 널 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 역시 네가 ‘주호현’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해.”
뭐 이렇게 복잡한지. 결국 주호현이나 강의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단 거잖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지를 보다 물었다.
“다른 건 없어? 그건 너무 복잡한데. 이왕 선물할 거 너도 내가 편해야 좋잖아.”
“대단한 발상 전환인데.”
“참고로 못생겨지는 건 싫어.”
“어련하시겠어.”
실실 웃으며 인벤토리를 뒤적이던 성산하가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더니 가늠하듯 몸을 훑어 내렸다.
“이게 괜찮을진 모르겠군.”
성산하는 인벤토리에서 팔찌를 꺼내 내게 건넸다. 감정하자 이번엔 확실히 모습을 바꿔 주는 아이템이었다. 착용자의 과거나 미래로.
“이것도 S급이야?”
“A급.”
“아아.”
S급이 좋은데. 뒷말을 삼키며 착용하자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과거나 미래를 선택하란 소리에 대수롭지 않게 과거를 선택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시간의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효과 지속 시간
[00:30:00]
“씨발, 이게 뭐야!”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성산하의 허리께에 놀라 뒷걸음질 치려다 바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훌쩍 가까워진 바닥과 작아진 양 손바닥. 옷은 미처 줄어들지 못했는지 어깨 위로 축 늘어진 로브가 무거웠다. 과거라는 게 이런 거였어? 내가 애새끼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성산하의 조롱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조용한 게 이상해 위를 올려다봤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한참 올려다보고 나서야 놀란 성산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알아. 나도. 어릴 때부터 잘생겼지.”
성산하를 두고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거치적거려. 옷을 벗어 버릴 수도 없고…….’
어쩌면 반지보다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브가 답답했는데 아예 어려진 모습이라면 알아볼 사람도 적을 테고. 짧아진 팔과 다리를 신기하게 둘러보는 내 앞에 성산하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속눈썹의 결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얼굴을 뚱하게 쳐다보자 성산하가 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보석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한 손길이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너, 정말…….”
뭔가에 홀려 황홀한 표정과 부담스러울 만큼 빛나는 눈빛은 분명 날 향해 있건만 너머의 어딘가를 보는 듯해 발로 성산하의 무릎을 툭 찼다.
“야. 어디 봐.”
“……뭐라고?”
“초점 잡아. 뭘 보는 거야. 나 여깄잖아.”
내 말에 성산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찬물에라도 맞은 듯 얼굴에 드리웠던 이질적인 감정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평소답지 않은 표정 변화를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성산하가 내 팔을 붙잡아 팔찌를 빼냈다.
“으엇!”
변할 때처럼 순식간에 자라난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다시 넘어졌다.
“너 이 새끼 일부러……!”
“이건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너랑 어울리지 않아.”
“싫어, 팔찌 쓸래!”
“안 돼.”
저 미친놈. 조금 착한가 싶더니만 또 오락가락할 때가 됐나 보다.
‘치사한 새끼. 그렇다고 줬다 뺐어?’
성산하는 내게 팔찌 대신 반지를 휙 던졌다. 시선을 고정한 채 낚아채자 가볍게 턱짓하며 말했다.
“명심해. 이미 네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다는걸.”
“그냥 팔찌 달라니까.”
“오늘은 먼저 가 보지. 그럼.”
성산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를 황당히 바라보던 나는 아직도 주저앉아 있던 바닥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미친놈……. 그래도 S급이 어디냐.”
생각해 보니 너무 어린 모습이면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냅다 반지를 꼈다. 팔찌를 꼈을 때와 달리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S급만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얼굴 없는 신? 그게 누구야.’
반지의 문양을 신기하게 둘러보는데 저 위에서 도도도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현 님!”
“승연아. 여기야.”
“네, 면접 준비가 다 되어…… 옷이 다 구겨졌어요!”
연승연이 까치발을 들어 내 뒷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넘어져서 그런지 이상하게 접힌 로브를 툭툭 터는데 연승연이 멈칫했다. 시선이 내 손에 닿아 있었다.
“호현 님, 웬 반지인가요? 아까까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성산하가 줬어. 이거면 처음 보는 놈들은 얼굴 기억 못 한다고 하더라고. 이제 밖에 좀 편히 다닐 수 있겠다.”
“천랑 길드장님께서 다녀가셨나요?”
“응. 방금 갔어.”
“자주……. 오시네요.”
“그러게. 귀찮아 죽겠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위를 올려다봤다.
“면접 준비 끝났다고?”
“네. 조건을 만족한 지원자가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좋아. 가 보자.”
우리 공방 직원이 될 얼굴들 좀 보러 가 볼까. 계단으로 신나게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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