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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73화 (73/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73.

성산하가 떠난 후 나는 곧바로 던전에 대해 조사했다. 대청호는 ‘층’이라고 불리는 공간들이 단계별로 이어지는 스테이지 형태의 던전이었다. 전 세계에 몇 없다는 지하층까지 이어진 던전이라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원하는 층으로 가기 위해선 이전의 공간들을 모두 지나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제 도움이 필요하단 것처럼 굴던 성산하의 태도가 짜증 나게도 이해가 갔다.

다음 날, 임청과 제로가 공방에 복귀하자마자 내 방으로 불러들였다. 무뚝뚝한 표정의 임청과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로. 나와 마주 앉은 둘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나랑 던전 갈 사람?”

“…….”

방에 입만 셋인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자 제로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워서 그만. 그런데 호현 님께서 던전은 무슨 이유로?”

“설풍의 결정을 대신할 만한 아이템이 있거든. 귀속 아이템이라 내가 직접 가야 해.”

“흠, 어떤 아이템인가요?”

“대청호의 심연 수정을 구하러 갈 거야.”

“이런…….”

내 말을 듣자마자 임청과 제로에게서 동시에 반응이 왔다. 혀를 차는 제로 대신 어두운 표정의 임청이 물었다.

“호현 님. 별다른 공격이나 방어 스킬이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쓸 만한 건 없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하 20층 이상을 가야 하는데 호현 님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듭니다. 또…….”

한층 더 표정이 굳은 임청의 시선이 자연히 옆에 앉은 제로에게로 향했다. 그를 받아 낸 제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함께 가더라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럼 원래 재료 수급 일정에 차질이 생깁니다.”

“놈과 함께 움직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임청의 완고한 거부에 제로가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가슴께를 손으로 꽉 쥐었다.

“큭, 좋은 동료라고 생각했는데요.”

“…헛소리.”

“둘이 같이 가도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예상보다도 더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둘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조금 주어진 여유도 임청과 제로, 둘의 실력이 뛰어나 아이템들을 빠르게 구했기 때문이지 애초에 시간이 빠듯했던지라 던전행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용병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선택지를 깔끔하게 지우고 둘을 바라봤다.

“됐어. 이건 내가 해결해 볼 테니 둘은 신경 쓰지 마. 남은 재료들만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호현 님.”

“흐음.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둘이 나가고 혼자 남은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 여유가 있었더라면 다른 방향으로 연구해 레시피를 찾아봤을 텐데 이제 와 그러기엔 시간과 스킬이 부족했다.

이제 겨우 이십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손에 쥔 휴대폰을 노려봤다.

“결국 성산하에게 부, 부…탁을……. 으아악!”

몸에 개미가 기어가는 느낌에 몸부림치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녹스에서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기서야 날 가두고 부려 먹으니 재료도 못 구해 오냐며 구박하는 게 당연했지만 성산하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힘이 들었다. 심지어 이미 많은 도움을 받은 상태였다!

백번 양보해 의도치 않게 받아 버린 도움은 차치해도 또다시 다른 부탁을 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아니야. 강의진. 다른 수가 없잖아. 이번까지만 힘 좀 빌리는 거야. 별거 아니야. 갚으면 되지. 반지도 지원금도 이번 일도 다 갚으면 되는……. 아, 또 탈출할 때 구해 줬던 것도 있구나, 씨발. 존나 많네.”

별일 아니라고 나부터 세뇌하려 했으나 새삼 갚아야 할 게 매우 많다는 사실이나 다시금 상기될 뿐이었다.

몸부림치다 휴대폰을 들고는 다시 머뭇대다 또 몸부림치는 일을 반복하던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 뒤에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내일 몇 시에 볼래?”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입술이 바짝 말랐다. 반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능청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내일은 왜?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모르는 척 묻지, 말고…. 알잖아. 내일 던전 가자.”

[던전? 아, 그거…….]

불안하게 침묵이 길어진다 싶더니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시간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같이 가 준다며.”

[이래 봬도 한 길드의 장을 맡고 있어서. 누구처럼 한가하지가 않거든.]

“뭐? 그게 누군데!”

[누구겠어. 그나저나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지? 용병들이랑 함께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악의 없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입술을 깨문 채 머뭇대는 사이 성산하 쪽에서 알아듣지 못할 음성이 들렸다. 누군가의 물음에 성산하가 답하는 걸 보니 혼자인 게 아닌 듯했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 ……여보세요.]

“응.”

[한번 알아보긴 할 테지만 확답은 주기 힘들 것 같군. 다른 일정을 잡아 놔서.]

삐죽 튀어나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 들어줄 준비 되어 있다고 당당히 말하던 게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말을 바꾸다니. 치사한 새끼. 물론 내가 꺼지라고 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냅다 다른 일정을 잡아? 허구한 날 내 공방에 와서 차나 축내더니 갑자기 이럴 때 바빠질 건 뭐냐고.

당장 성산하 외에 등급 높은 헌터를 구할 수 없으니 다시 한번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뱉은 말이 있어서 그런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굴면 거절 못하겠잖아.]

“……했잖아. 시간 안 된다며.”

[산하 형 던전 같이 가 주세요-. 해 봐.]

“뭐?”

[동생 부탁이라면 애써서 시간 내 볼게.]

황당하게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이 미친놈이 장난하나……. 상상만 해도 속에서 무언가 울컥해 욕지기가 치밀었고 먹기 싫은 음식을 코앞에 가져다 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응? 멍멍아.]

“……치사한 새끼야.”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산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뒤에서 다른 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더 미루기 힘들었는지 이번엔 성산하가 먼저 말했다.

[나중에 전화하자. 일단 가 봐야겠…….]

“아 씨발, 산하 형!”

[…….]

“던전 좀 같이 가자고! 가 준댔잖아. 맨날 놀다 왜 갑자기 지금 바쁘냐고. 내가 부…. 부특……. 할 테니까. 나중에 갚을게. 그 좆같은, 아니 좋은 선의 좀 보여 보라고. 나한테!”

조급한 마음에 토해 내듯 소리쳤다. 한 번 입이 열리니 그다음은 쉬웠다. 속에 담아 두고만 있던 말들을 두서없이 뱉어 내자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린 성산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야 웃음을 겨우 억누른 성산하가 말했다.

[……큽, 그래 호현아. 같이 가자.]

***

“호현 님. 이건 간단하게 드실 수 있는 던전용 밀키트고 이건 주전부리하실 간식입니다. 여기 이것들은 혹시 몰라 준비했는데 차례로 전투 식량, 비상식량, 건량이에요.”

연승연이 줄지어 꺼내 드는 짐들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음식만으로 탑을 쌓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인벤토리 공간도 없는데 뭘 이렇게 많이 챙겼어. 몇 개면 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호현 님께서 위험한 곳에 가시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

“걱정할 필요 없어. 금방 다녀올 거니까.”

위로해 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울적한 낯에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정말 괜찮을까요?”

“못 미더운 거 이해는 하지만 그놈 천랑 길드장이야. 실력은…….”

성산하가 힘을 쓰는 장면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동굴에 갇힌 날 찾으러 왔을 때. 뭐였는지는 몰라도 한순간에 부서지던 동굴을 생각하면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제로, 임청이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던 던전을 당당하게 사흘 안에 끝내겠다 말하기까지 했으니.

“실력은 있겠지.”

바깥에서 빵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걸쳐져 있던 재킷을 챙겨 들며 말했다.

“그럼 나 간다.”

“네. 조심히 다녀오… 호현 님! 식량 챙겨 가셔야죠!!”

대청호까지는 족히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보기 좋아 지루하지는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 위로 탁 트인 하늘이 눈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런 데서 지내도 좋을 것 같은데.’

한창 구경하다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성산하가 뭔가를 건넸다.

“받아. 던전 들어갈 때 필요하니 갖고 있어.”

“이게 뭐…….”

헌터 등록증이었다. 각성한 이후로도 따로 헌터로 등록한 적은 없어서 헌터증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헌터증을 펼쳐 보자 사진과 함께 정호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성의 없게 정호현이 뭐냐, 정호현이.”

“기억 못 하고 실수하는 것보단 낫지.”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 이왕 하는 거 멋있는 이름으로 하지. 마두석 이런……. 잠깐만, 이 사진 뭐야.”

대충 보고 나인 줄 알고 지나갔던 사진은 이제 보니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뒤돌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생김새. 길거리에서 찾으라면 쉽사리 찾지 못할 그런 평범한 얼굴. 게다가 묘하게 나와 얼굴이 닮아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내 얼굴로 다닐 순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 반지 끼면 나 이렇게 보이냐?”

“아니. 하지만 기억 속에는 그렇게 남겠지.”

“……발.”

“익숙해져. 눈에 띄어서 득 될 게 없으니.”

보기 싫다는 듯 덮어 버리고 안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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