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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75화 (75/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75.

“혹시 지하층으로 가시면 저희랑 동행하실래요?”

“그건 안 돼.”

곧바로 뱉어진 거절에 여자의 얼굴에 드리웠던 웃음이 흐려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렇고 성산하까지 정체를 숨긴 상태에서 동행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그보다도 왜 우리에게 다가와 동행을 제안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내가 포션 마스터인 것을 알아봤나? 아니면 설마 성산하가 천랑 길드장인 게 티 났나?’

나도 모르게 성산하를 돌아봤다. 훌쩍 커다란 키를 제외하면 별달리 특별한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나 때문이다. 이번에도 또 내 위엄이 줄줄 새어 나간 게 분명했다.

내가 선뜻 답이 없자 동행을 제안했던 여자 대신 함께 있던 쾌활하게 생긴 헌터가 나섰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옆자리다 보니 대화하시는 걸 조금 들어 버렸어요. 저기 키 큰 일행분은 힐러라고 하시던데…. 헌터님도 전투계는 아니시죠?”

전투계는 흉내 낸다고 될 일도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투계 두 명이라면 클리어보다는 목적이 있어 방문하신 거 아닌가요?”

“응.”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저희 팀 대부분이 등급 높은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위층들은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거든요. 헌터님께서 원하는 곳에 데려다드릴 수 있어요.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사이덴 길드의 효영이에요.”

“저는 무소속…. B급 헌터 이재아라고 해요.”

사이덴 길드?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 길드를 밝히며 당당히 웃는 눈빛이 내가 거절할 리 없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유명한 길드인가? 곧바로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녹스와 연관된 곳은 아니고…….

효영의 말대로 저 뒤에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리다 무리 중간에 서 있는 남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놈들이 험상궂게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젓거나 손날을 세워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야? 저거 나한테 하는 건가?’

눈썹을 치켜올리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황당하게 입을 열려는 순간 이재아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저, 헌터님?”

시선을 내리자 얼굴이 붉어진 이재아가 두 손을 꼭 맞잡고 말했다.

“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친해지고 싶어요. 아까부터 너무 눈에 들어와서 동행 제안드린 거고요.”

“그럴 줄 알았어.”

“네? 아, 알고 계셨나요?”

“응. 자주 있는 일이라서.”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주호현의 몸에 들어왔지만 포션 마스터였던 내 기상이 밖으로 흘러넘친다는 것을. 민감한 사람들은 그걸 알아채고 내게 이끌리는 거였다.

잠시 당황한 듯 보이던 이재아는 뭔가 결심한 것처럼 좀 더 자신감에 차 말했다.

“저희랑 동행해요. 너무 갑작스러우시면 조금 알아보며 결정하셔도 되고, 비전투계 둘이 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하니 나쁠 거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약해 보여서 도와주고 싶다니, 성산하의 실체를 알면 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만 선의를 가진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긴 어려웠다.

“필요 없어. 그리고 함께 움직일 만한 상황도 아니라.”

“그렇지만 비전투계…….”

“이쯤 하실까요?”

한발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성산하가 나섰다. 비켜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다가오니 느껴지는 무시할 수 없는 위세에 움찔한 이재아와 효영이 성산하를 돌아봤다.

“당신은 힐러…….”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던전에 들어가는 보통의 비전투계처럼, 비밀스럽고 민감한 이유라서 동행은 어려울 것 같은데…. 이해해 줄 수 있죠?”

“네, 네. 그럼요. 어쩔 수 없죠…….”

“갈 길이 멀어서. 이만.”

멍한 얼굴을 한 이재아와 효영은 저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성산하는 내 어깨를 감싸 가게 밖으로 끌고 나왔다. 불쾌한 접촉에 몸을 비틀자 오히려 더 세게 잡아당기며 으르듯 속삭였다.

“질질 흘리고 다니니 나비가 꼬이지.”

우리 둘만 나오는 걸 본 일행 놈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며 투덜댔다.

“내가 흘린 게 아니라 저절로 흘러넘친 거야.”

***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엔 헌터들이 많아 눈에 띄는 행동은 해선 안 됐다. 급하게 구한 방어 기능이 달린 청자켓을 꺼내 입고 평범한 헌터인 척 어두운 숲을 달렸다.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워프 지점을 향해 가는데 성산하가 말했다.

“목표는 지하 21층이다.”

“21층? ……와, 멀긴 머네.”

던전 안내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한 층 한 층이 웬만한 던전만큼 넓어 워프 지점까지 가는 데만도 시간이 꽤나 소요된다. 그나마 헌터들이 많은 초반 층에선 몬스터를 처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동에만 집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끔 달려드는 눈먼 몬스터들은 성산하가 손을 뻗으면 은은한 빛과 함께 시체로 변했다. 대체 무슨 스킬인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생명을 잃는 몬스터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괴물 같은 놈…….’

그렇게 워프 지점만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 우리는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분기점인 지하 10층에 다다를 수 있었다. 층 수가 높아질수록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과 달리 지하 10층만큼은 지하 1층만큼 위험도가 낮았다. 때문에 많은 헌터들이 베이스캠프를 두고 잠을 자거나 휴식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우리도 10층에서 밤을 보낼 줄 알았는데 성산하는 다음 워프 지점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위험하긴 해도 제 실력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하니 이끄는 거겠거니 싶어 별말 없이 뒤따랐다. 몸을 감싸는 게이트의 파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눈을 뜨자 내 앞에는 어두운 동굴이 펼쳐졌다. 지하라 해도 해가 들지 않고 음산할 뿐이었던 그 전과는 달리 정말 어딘가의 지하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게 지하층…….”

천장에서부터 아래를 향해 빼곡히 솟아난 날카로운 종유석. 위에서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청량한 물소리 사이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등이 배길 게 분명한 돌덩이들에 발밑은 흐르는 지하수에 질척했다. 하룻밤을 보낼 야영지로는 마땅치 않았다.

“우리 그냥 10층에서…….”

휘잉-.

뭔가 휘둘리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바라봤다. 성산하의 손에 어느새 제 키보다도 길쭉한 로드가 들려 있었다.

“이제야 좀 편히 움직일 수 있겠군. 빠르게 가자. 잘 따라와.”

“뭐? 뭘, 어딜 가. 쉬는 거 아니었어?”

성산하가 답 없이 풀쩍 뛰어올랐다. 당황해 쳐다보는 내 시야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주인님이 ‘이리 온’을 하셨습니다. 서둘러 주인님께 달려갑니다.」

“씨발, 야……!”

채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명령을 받은 내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지금까지 이동했던 것은 장난이라는 듯 펄쩍펄쩍 날아다니는 성산하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아마도 목줄의 효과일 이속 능력 덕에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성산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 빛이 나더니 눈앞의 몬스터가 모두 터져 나갔다. 물론 그 잔해를 피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였다.

‘씨발, 씨발!!’

날아오는 정체 모를 몬스터의 다리를 쳐 내며 저 멀리 앞서 나가는 성산하의 등을 노려봤다. 임청과 제로 둘이 합쳐도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하겠단 말을 들었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이런 의미였냐!

“미친놈아! 같이 좀 가자고!!”

***

지하 11층의 워프 지점에 번쩍 하고 빛이 나더니 다수의 헌터들이 나타났다.

“봐 봐, 내 말이 맞지? 남들 쉴 때 이동해야 이득이라니까.”

“미리 자 두고 오길 잘했네. 적어도 15층은 가야 쉴 만한 곳이 나오잖아.”

“빨리 깊이 들어가서 마정석이랑 아이템은 우리가 다 독점하자고.”

으스대는 남자의 모습에 옆에서 무기를 살피던 효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돼. 11층부터는 난이도가 전혀 다르니까…….”

“아, 알지. 알지. 그래도 이 정도 헌터들이 이렇게 모였는데 10층 초반이야 금방이잖아.”

허세 가득한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효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아에게로 다가갔다. 전투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집중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 허탈하게 웃으며 옆에 앉았다.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비전투계는 10층까지 오기도 힘들어.”

“그건 그렇지만……. 우리보다 먼저 들어갔을 텐데 지금까지 어느 층에서도 보지 못했는걸.”

“아마 3층 같은 데 틀어박혀서 채집이나 하고 있겠지. 지나간 인연은 보내 주고, 이제 할 일 해야지. 여기 던전인 거 잊지 마. 다른 데 한눈 팔면서 싸울 정도로 만만한 곳 아니야.”

효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재아는 눈에 보이게 제 근처를 서성이며 말 걸 틈을 노리는 남자 셋을 보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발.”

“이번만 참자. 내가 실수했다.”

“그거 알아? 쟤네, 처음엔 그냥 짜증 났는데 그 사람 만난 후에 보니까 이제는 조금 화나.”

“뭔지 알지. 잘생기긴 했더라. 특히 그 눈매가……. 음?”

아까 만났던 헌터에 대해 뭔가 말하려던 효영은 도통 떠오르지 않는 외모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쉽게 잊혀질 스타일이 아닌데…….’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먼저 근방 수색을 나갔던 헌터들이 호들갑 떨며 돌아와 소리쳤기 때문이다.

“대박! 앞에 길이 뻥뻥 뚫려 있어! 몬스터 시체만 널려 있고!!”

“뭐? 헌터라도 왔다 갔다는 거야? 몬스터가 재생되지 않았을 정도면 바로 전이라는 거잖아.”

대체 어떤 헌터가……? 효영이 급히 일어나 앞으로 가는데 리더가 소리쳤다.

“다들 출발 준비해! 오히려 기회다. 어차피 우리 목표도 17층 이상이니 쓸데없는 데 힘 뺄 필요 없이 재생되기 전에 통과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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