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76.
성산하 이 또라이는 지하 15층에 다다라서야 미친 황소처럼 날뛰던 것을 그만뒀다. 하필이면 석순과 바위들로 교묘하게 가려진 암벽 중앙의 돌출부에 멈추는 바람에 나는 쉬지도 못하고 팔자에도 없던 암벽을 등반해야 했다.
위까지 다다랐을 때 눈앞에 뻗어지는 하얀 장갑을 보고 욕을 짓씹으며 그것을 마주 잡았다.
“착하게 잘 따라왔네.”
맞잡은 손을 통해 힐 특유의 느낌이 전해졌다. 피로는 순식간에 풀렸지만 더러운 기분에 냅다 손을 뿌리치고 땅에 드러누웠다.
“헉, 허억…. 이 미…친놈.”
“고생했어. 그래도 목줄 덕에 힘들진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괜찮지 않아? 어때, 조금 더 차 볼래?”
욕할 힘도 없어 눈을 감은 채 성산하가 있는 쪽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와 성산하만 있다는 걸 느꼈는지 구름이가 튀어나와 내게 머리를 비볐다. 복슬복슬하면서도 단단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타박했다.
“구름이. 너 요즘 성산하랑 있을 땐 눈치도 안 보고 나온다? 쟤 믿으면 안 돼. 나쁜 놈이야.”
“메에에-!”
“알았어. 내려가지 말고 여기 위에서만 놀아.”
머리를 톡톡 치며 말하자 그때부터 구름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위 따위의 냄새를 맡거나 핥아 댔다. 머리 위로 성산하의 어이없단 목소리가 떨어졌다.
“하말을 개 다루듯 하다니.”
“개 다루듯 한 건 오늘 나 매달고 전력 질주한 네놈이겠지. 이런 식이면 사흘은 무슨, 당장 내일도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좋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 속도 내기 어려울 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성산하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금도 힘겨워하지 않았다. 가진 능력의 반도 쓰지 않았다는 것에 내 포션 레시피를 걸 수도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묻자 성산하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 던전, 지하층에 미세한 파동 변화가 감지된 던전이거든.”
“아아, 파동 변…… 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파동 변화라니! 파동이 불안정한 던전의 몬스터들이 얼마나 미친놈들처럼 날뛰는지 이미 한 번 겪어 알고 있기에 침착할 수가 없었다.
“야, 구름이! 이상한 거 먹지 말고 이리 와.”
서둘러 구름이를 부르며 우왕좌왕했다.
“무슨 일 생기기 전에 빨리 나가야……. 아니, 그보다도 위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
“가장 깊은 곳부터 천천히 임시 봉쇄 중이야. 아직 발견만 한 상태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이 이후로 들어가는 헌터도 없을 테고.”
“그렇지만…….”
혼란에 가득 차 바라보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성산하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였다.
“나와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이지? 봉쇄 전에 잠깐 들어가서 심연 수정만 가지고 돌아오면 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할 필요 없어. 알겠지.”
못 미더운 불안감은 내가 헌터가 아니어서일까. 꾹 누르는 성산하의 손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승연이 챙겨 준 던전용 밀키트로 끼니를 때우고 몸을 덥혀 주던 모닥불까지 껐다.
피곤해서 금방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돌바닥에 천 쪼가리 하나 깔고 자려니 불편해 잠이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 뜬 눈에는 새카만 암흑만이 비췄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다 입을 열었다.
“……성산하. 자냐?”
“…….”
“자? ……자나 보네.”
“…….”
“그래. 처자라.”
“왜.”
깨 있을 줄 몰랐던 나는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깜짝이야, 깨 있었으면 빨리 대답하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 볼이 따가운 게 성산하의 시선이 느껴져 볼을 세게 비비며 중얼거렸다.
“보지 마. 닳는다.”
“잠이 오지 않아도 자 둬. 내일부턴 정신 차리고 움직여야 해. 여기처럼 쉴 만한 곳도 없고.”
“언젠 정신 안 차린 것처럼 말한다? 오늘도 스테이지형 처음 와 본 것치곤 잘했거든.”
가벼운 투덜거림 뒤에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빠르게 밀려드는 수마에 오히려 정적이 반가웠다. 반쯤 잠에 들었을 때 나지막한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이라니. 와 본 적 있을 텐데.”
“무슨… 소리야. 처음 와 봤거든.”
“일부러 거짓말하는 건가.”
졸음에 대충 대답하던 나는 황당한 소리에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야. 네가 뭘 안다고.”
“네 친구 류수윤이 죽은 곳이 스테이지형 던전이잖아.”
“…….”
씨발.
성산하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몸을 지배하고 있던 졸음이 싹 달아났다. 번쩍 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내 귓가에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호현.”
“……자는데 말 걸지 마.”
“방금 한 말은 무슨 의미였지?”
질긴 놈. 몸을 돌려 성산하에게 등을 보이며 웅얼거렸다.
“내가 착각했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잠이 들 때까지 성산하에게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
지하 15층에서 워프를 타고 다음 층으로 내려갔을 때, 우리 머리 위로 다시 하늘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검붉은 하늘에는 핏빛 폭우를 내리는 보랏빛 먹구름들이 떠다녔다. 꺼림칙한 광경이긴 했지만 답답했던 동굴에서 벗어나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성산하 역시 동굴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빠르게 몬스터들을 해치웠다.
하루가 지나고 또 반나절이 흘러 성산하가 약속한 사흘의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20층의 워프 지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성산하와 나는 나란히 서서 바위에 새겨진 마법진과 그 위로 일렁이는 파동을 내려다봤다.
“……존나 불길한데 이거.”
“이상 현상이 시작됐군.”
“심연부터 시작이라며. 여긴 겨우 20층인데…….”
“예상보다 배는 빨라. 돌아가면 가장 먼저 통제 요청을 해야겠어.”
푸르른 파동 사이에 검붉은 실선들이 언뜻언뜻 비쳐 보였다. 그를 심각하게 내려다보는데 성산하가 내게 물었다.
“여기까지 더러운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연히 들어가야지. 이제 와서 물러날 순 없어.”
파동 변화여도 당장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이것 또한 겪어 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말에 성산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워프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우리 외에 여기까지 올 헌터는 없을 테니. 빨리 해치우고 복귀하지.”
귀환 스크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온 길 그대로 돌아가야 했다면 충격에 잠깐 기절할지도 몰랐다. 며칠간 지나온 던전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데 성산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뭔데.”
“다음 층은 나와 조금도 떨어져선 안 되니까.”
“……위험하기만 해 봐라.”
하얀 장갑 위로 손을 올렸다. 꾹 맞잡은 손이 장난치듯 내 손가락 위의 반지를 굴렸다. 성산하를 따라 마지막 워프 위에 발을 올렸다.
***
파동 변화가 진행 중인 던전이라 그런지 원래도 기분 나쁘던 하늘이 지금은 실제로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꿈틀댔다. 하늘이 아니라 무언가의 몸속으로 들어와 장기를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전 층들에서 멋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것과 달리 성산하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나와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앞장서서 전진하는 성산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도 재게 발을 놀렸다.
확실히 몬스터들의 세기는 전보다 강했으나 성산하에게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성산하는 떼로 몰려드는 몬스터까지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해치웠다. 마치 뭔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쿠구궁!
아까부터 일렁이던 하늘이 이상하다 싶더니 어느새 머리 위로 드리운 보랏빛 먹구름이 온 대지를 덮고 있었다. 구름에서 뭐가 떨어지는지 아는 우리는 곧바로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맸다.
“성산하, 저기 동굴이다!”
“잘했어.”
동굴이라 부르기도 뭐한, 그저 낮은 언덕 절벽의 움푹 파인 공간에 몸을 들이자마자 시원한 소리와 함께 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내는 빗줄기에 온 세상이 붉게 변했다.
비가 그칠 때까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바짝 붙어 앉은 우리는 멍하니 이질적인 빗줄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심연 수정이 골렘의 심장이라고 했던가?”
“응.”
“골렘이면 돌맹이들이잖아. 저 많은 것들 중에 어떤 게 골렘인지 어떻게 알아?”
비에 젖어 붉게 변한 바위들을 쳐다보며 묻자 작게 웃은 성산하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냥 돌이야. 골렘은 지면 아래에 있어.”
“그럼 어떻게 찾아?”
“자연적으로 파인 구덩이나, 골렘들이 출입하는 굴 같은 걸 찾아 들어가야지. 그리고 하나를 잡은 후에, 바로 스크롤을 찢어 귀환하는 거야.”
성산하의 설명을 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깨 위로 간질거리는 머리칼과 함께 무게감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눈을 감은 성산하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성산하가 선수 쳐 말했다.
“피곤해.”
“너…….”
“비 그치면 깨워 줘.”
어깨를 퉁겨 버리고 싶었지만 성산하의 노고를 알아 이번만 내 너른 어깨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러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잠시 졸아 버렸다. 옅은 잠에서 나를 깨운 건 여기서 들려선 안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여기! 여기서 비 피하자! 다들 이리 와!”
“와씨, 이게 뭐야. 다 젖었어.”
“흐엉, 이거, 붉기만 한 게 아니라 피 냄새도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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