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77.
대체 누가 여기까지 온 거야?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바위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자는 성산하를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성산…….”
“쉿.”
자는 줄 알았던 성산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와 목을 움츠렸다.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당기는 손길에 몸을 더 깊이 숨겼다. 그렇잖아도 장신의 남자 둘이 있기에는 좁아터진 곳에 몸을 구기고 찰싹 붙어 있자니 불편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머지않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개중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가게에서 만나 동행을 제안했던 헌터였다.
‘며칠 전에 만났던 헌터잖아?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나 역시 며칠 만에 던전을 주파했지만 그건 내 버스가 S급 버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우리랑 비슷한 속도라니. 저쪽에도 그 정도 실력자가 있다는 건가.
‘강하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네.’
성산하 역시 그들이 기억났는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지? 너도 정체 들켜선 안 되잖아. 스킬 못 쓰는 거 아니야?”
“상황 봐서 다른 층으로 넘어가든가 하자. 몰려다닐 것 같으니 일단 조용히 보내고.”
성산하의 말대로 놈들은 비가 그치자마자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갔다. 나와 성산하 역시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지체 않고 일어나 다음 층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프 장소에 도착해 파동을 마주한 우리는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워프가 완전히 오염되어 있었다.
“이런…….”
성산하가 침음을 흘렸다. 우리를 위협하듯 불꽃을 튀기는 워프의 검붉은 파동. 센터에서 도망치던 날 같은 광경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여긴 들어가면 안 돼. 저번에 봤던 게이트는 사라졌어.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
“진행이 너무 빠른데.”
작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본 성산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참 혈우를 쏟아 내고도 부족한지 하늘은 위험하게 꿀렁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여기서 최대한 빨리 심연 수정을 찾아 복귀하자.”
“저놈들은 어떻게 해?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위층의 헌터들은?”
다른 쪽으로 향하던 헌터들이 생각나 묻자 뒤를 돌아본 성산하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손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빛이 반짝이더니 허공에서 하얀 새의 형상이 나타났다. 새는 성산하가 손을 퉁기자마자 어딘가를 향해 포르르 날아갔다.
“저게 뭐야?”
“그들에게 가서 위험한 걸 알릴 거야.”
“위층까지 날아가?”
단순한 궁금증에 물은 건데 성산하가 재수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까진 내 알 바 아니고. 지금 남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호현아.”
“……누가 뭐래?”
“빨리 찾고 복귀하자.”
다른 층으로 넘어간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다행히 중앙의 돌산이 헌터들과 우리의 사이를 갈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움직인다면 심연 수정을 구한 후 조용히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장선 성산하와 함께 걷는 일이 며칠 새 익숙해졌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성산하의 보호 범위 안으로 들어가고 몬스터를 처리하면 다시 옆으로 붙는다. 이번에도 손쉽게 죽는 몬스터를 보고는 성산하의 곁으로 졸졸 쫓아갔다. 성산하는 멈춰 서서 로드 끝으로 땅에 난 구멍들을 푹푹 찔러 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발밑에서 깡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찾았다.”
그대로 로드를 들어 올려 땅을 향해 세게 내려치자 흙이 우수수 떨어지며 얕은 지대에 숨겨져 있던 입구가 드러났다.
“골렘의 굴이야?”
“맞아. 다행히 얕게 있어서 끌어내기 쉽겠어.”
위치를 가늠하듯 주위를 둘러본 성산하가 조금 떨어진 커다란 바위를 턱짓하며 말했다.
“제압하는 동안 저쪽 가서 기다려.”
“응.”
바위에 등을 기대고 선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손끝에서 굴렸다. 급하게 구한 장비라 그런지 영 어색해 손에 익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검을 쥐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가? 어쨌거나 몬스터에게서 드롭되는 귀속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했다. 손끝에 잡힌 단검의 무게가 답지 않게 무겁게 느껴졌다.
“아직인가…….”
성산하가 굴에 들어간 이후 땅에서는 미약한 진동과 함께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골렘을 기다리며 앞의 돌산을 바라봤다. 야트막한 능선 너머로는 화려한 스킬 이펙트들이 언뜻 엿보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성산하와는 달리 시끄럽게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모습이었다. 미리 파동 변화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사냥을 강행하다니. 헌터들의 욕심이나 호승심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저들끼리 시끄럽게 구니 걸릴 일은 없겠다 하는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휘청일 정도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 펄쩍 뛰어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나자 방금 전까지 등을 기대고 있던 바위가 쓰러져 그 자리를 덮쳤다.
“뭐, 뭐야. 이거.”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멎지 않는 흔들림에 결국 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 금을 기점으로 엇갈려 다른 진동으로 흔들리던 땅덩어리에 깊은 균열이 생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깊게 파인 균열을 보자 골렘을 잡으러 들어간 성산하가 걱정돼 황급히 달려 나갔다.
“성산하, 성산하!!”
쩌적 하고 하늘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돌산이 반으로 뚝 갈라졌다. 갑자기 생겨난 협곡에서 하늘과 땅으로 퍼져 나가는 몬스터 떼들을 아연하게 쳐다봤다.
한 층 전체가 갈라지다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마도 파동 변화가…….
균열 안쪽에서 하얀 인영이 솟구쳤다. 성산하였다. 그 뒤를 따라 커다란 골렘이 지면을 부수고 기어 올라왔다. 성산하가 멀쩡하다는 것에 마음을 놓기도 잠시, 골렘 위로 올라탄 성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나는 파동 걱정을 지운 채 다시금 단검을 고쳐 쥐었다.
산만큼 커다란 덩치와 마법이 깃든 몸체 탓에 성산하도 골렘을 쉽게 제압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나 역시 간격을 벌리고 틈을 노렸다. 잠시 후 떠오른 황금빛 룬 문자들이 성산하와 골렘의 주위를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좁혀 들며 골렘을 구속했다.
“지금이야!”
성산하의 신호에 서둘러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리저리 비틀린 골렘의 중앙에 훤히 드러난 핵이 보였다. 그걸 보고서야 성산하가 골렘을 상대로 고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이기 쉽게 조립해 준 거란 걸 깨달았다.
곧바로 도약해 핵을 향해 단검을 내리꽂았다. 오랜만에 잡은 검이라 살짝 빗맞아 미끄러졌지만 힘으로 버티자 핵 깊숙이까지 박아 넣을 수 있었다. 골렘의 낮고 웅혼한 비명 소리가 공기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골렘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이 빛을 잃고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널리 퍼지는 잡다한 재료들을 뒤로하고 내 손에는 단 하나의 아이템이 쥐어져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탁한 우윳빛의 광물을 매만졌다.
“드디어 구했다.”
마냥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서둘러 돌아가기 위해 스크롤을 꺼내든 나는 성산하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쌍스크롤이라 성산하가 가지고 있는 반쪽과 합쳐 시동어를 걸어야 했다.
“고마워, 이제 가…….”
채 말하기도 전에 반파된 산 너머에서 전과 비할 수 없이 커다란 굉음들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성산하 역시 그를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산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자극하다니. 멍청한 놈들.”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라. 이것도 파동 변화 때문이야?”
“그래. 파동 이상이 발생한 던전은 변이 몬스터들 역시 잦게 나오니 조용히 지나는 것이 답이건만.”
변이 몬스터라니. 어쩌지? 이대로 갔다간 죽은 놈들이 꿈에 나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연민을 빌어 성산하에게 선의를 요구할 수는…….
경멸하는 듯한 성산하의 표정을 보자 초조해져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꾹 쥔 주먹 안에 잡힌 스크롤이 구겨졌다. 아까도 위층의 헌터들은 제 알 바 아니라고 했던 놈이다. 성산하가 그냥 가겠다고 하면 나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복잡한 고민 끝에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적시고 막 운을 뗀 순간이었다.
“야……. 있잖아.”
“미안한데.”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성산하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스크롤에 닿았다. 가까이 다가온 성산하가 스크롤을 쥔 손을 한 번에 잡아 올리며 말했다.
“가 봐야 해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산하는 내 팔을 잡고는 반쪽이 난 산을 향해 달렸다.
“어딜 가는 거야!”
얼떨결에 따라가며 황당히 소리쳤다. 하지만 성산하는 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소리를 듣고 몬스터들이나 따라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성산하는 반으로 갈라진 돌산 위까지 다다라서야 잡은 손을 놓았다.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반대편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채만 한 몬스터들이 헌터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기괴하게 생긴 모습이 변이 몬스터가 분명했다.
이미 죽은 사람도 여럿인 데다 남은 이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겨우 막고 있었지만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욕을 짓씹은 성산하는 근처 엄폐물이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가더니 땅에 로드를 박아 넣었다. 중앙에 우뚝 선 로드를 기점으로 룬들이 빛나며 머리 위로 흐릿한 반구 형태가 생겨났다. 성산하는 제 인벤토리에서 스크롤들을 쏟아 냈다. 땅으로 와르르 떨어지는 값비싼 스크롤들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이건 왜?”
“단거리 스크롤이라 길어 봤자 지하 10층 정도가 한계일 거야. 이쪽으로 오는 놈들 있으면 바로 이송시켜.”
“이쪽으로 오는 놈들이라니? 설마 너…….”
“금방 올 테니까 조용히 기다려.”
“같이 가!”
뒤따라 달렸다. 그러나 성산하는 쉽게 통과한 돔을 나는 통과할 수 없었다. 졸지에 갇힌 신세가 된 나는 짜증스럽게 앞을 가로막은 것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젠장, 혼자 가는 게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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