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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82화 (82/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82.

“망하다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연승연이 급히 마이크를 막았다.

“호현 님……!”

“미안, 미안.”

조용히 하겠다는 의미로 입을 막았다. 반대편에선 센터 연구원의 목소리가 줄줄 새어 나왔다.

[기억하지? 자네 퇴사하던 날 독약 사건. 그 이후 아주 살벌했어. 중앙에서 수사국 사람들이 팀 단위로 내려와 말뚝 박고, 관련 담당자들은 줄줄이 퇴사한 데다 레이븐팀은 말할 필요도 없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팀은 처음 본다네. 팀장은 어딘지도 모르는 섬으로 좌천되고 팀원들은 온갖 지방에 다 찢어져서는……. 예전에 나간 팀원까지 다시 소환해 처벌했다던데. 용의자였던 메인 가이드는 아직도 재판 중이야. 위에서 놔주질 않는다나. 내가 보기에도 따로 압력이 들어간 게 분명해. 여하튼 한동안 본부동 지나다니기 무서워서 아주 혼났어.]

마지막으로 봤던 한서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외부 팀과 함께 있나 했는데, 팀이 사라져서 그랬던 건가. 팀장이야 그렇다 쳐도 별 상관도 없던 가인 누나나 우하윤은……. 오랜만에 떠올리는 얼굴들이었다. 예성우가 처벌받을 줄은 알고 벌인 일이지만 다른 팀원들까지 그 여파가 크게 퍼진 것을 보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저어 잡념을 날렸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사실 한서진은 별일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연구원과 전화를 끊은 다음은 센터였다.

「긴급 신고 000-9876」

협조 요청 공문에 적혀 있던 번호는 던전이나 각성자에 관련한 민원이나 사건을 24시간 신고받는 긴급 회선이었다. 익명으로 전화를 걸어 ‘가이딩 포션’ 관련 문의를 하자 이미 많은 문의가 폭주했었는지 건조한 음성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 가이딩 포션 관련 문의요. 대면으로 진행하실 건가요.]

“아닙니다. 익명이어야 해서요.”

[네, 그럼 화상 회의로 담당자와 면담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먼저 샘플을 보내 주셔야 합니다. 상자에 접수 번호를 적은 후 깨지지 않게 주의해서 보내 주세요. 주소는 에스퍼·가이드센터 서울 지부로 보내 주시면 되고…….]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샘플이야 보내면 되고, 화상 면접이 문제인데…….

익명을 요청할 시 결코 역추적은 없으며 신상을 보호해 주니 안심하라 했지만 가이딩 포션에 절박한 센터의 말을 순진하게 믿을 순 없었다. 태제헌까지 복귀한 상황이니 경계해서 나쁠 것도 없지.

신상 보호를 위한 보안 업체를 알아보는데 센터를 상대로 하기엔 부실한 회사들이 많았다. 그러다 의외의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요새 가드닝을 하느라 반쯤 정원에서 살다시피 하던 수철이가 비료 포대를 안고 지나가다 이곳저곳 전화하며 업체를 알아보던 우리를 보고 멈춰 섰다.

“혹시 마정석 이용한 보안 서비스 알아보시는 건가요? 그럼 제가 도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희 부모님이 그쪽 일 하셔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양수철의 얼굴이 워낙에 못 미더워 별 기대가 없었으나 알고 보니 수철이네 부모님이 연구원으로 계시는 회사는 마정석 테크 쪽에선 꽤나 유명한 회사였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아 사무실 구석에 보안을 위한 특수 부스를 들인 후 부스 번호가 적힌 쪽지와 함께 가이딩 포션 샘플을 몇 개 포장해 서울 센터로 보냈다.

곧바로 연락 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하루 이틀 지나도록 부스는 잠잠하기만 했다. 긴장이 풀린 어느 날 공방에 놀러 온 백다인, 김진명과 함께 점심을 먹고 떠들고 있던 때였다. 위층 방에서 낮잠을 자던 백다혜가 짜증 내며 아래로 내려왔다.

“사장 아저씨! 전화 온다고!!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전화 안 오는데?”

잠잠한 휴대폰을 흔들며 답하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급히 연승연을 돌아봤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뜬 연승연과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다! 누나, 진명아 우리 올라간다!”

“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 처, 천천히 드시다 가세요.”

위층에 도착하자 백다혜의 말대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래층이라 벨소리를 듣지 못한 거였다. 부스 화면에 보이는 부재중 전화만 무려 30통이었다. 연승연이 곧바로 들어가려는 나를 말렸다.

“호현 님, 잠시만요. 혹시 모르니 확인을…….”

연승연은 차분히 목소리 변조와 화면 가림 설정까지 마친 후 문을 열었다. 작고 어두운 부스에 앉아 화면에 뜬 수신 표시를 누르자 곧바로 화면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작고 폐쇄적인 회의실로 보이는 곳에 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받으신 거 맞죠? 안녕하세요. 이번 TF 최고 책임자 한서현이라고 합니다.]

나 대신 응대하기로 한 연승연이 마이크를 잡고 말하자 변조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늦게 받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M으로 가이딩 포션 샘플을 보내신 제작자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덜덜 떨리는 연승연의 손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바짝 긴장한 연승연이 슬쩍 곁눈질하며 답하자 한서현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흥분해 물었다.

[실례지만, 혹시 며칠 전에 제작 성공하신 것도……?]

“네. 그것도 저 맞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 또 다른 영광이!!]

[박사님.]

한서현의 눈총에 남자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한서현이 박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박사님이 설명해 주시죠.]

[네, 사실 시스템 퀘스트가 뜬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요, 혹시 몰라 보내 주신 샘플들로 시험을 통해 가이딩 효과의 정도와 독성이 없다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이제 진짜 에스퍼를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만 진행하면 되는데요.]

임상 시험! 나 역시 좋아하는 과정이었다. 새로운 포션일수록 상태창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능력이나 부작용 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 역시 필수였다. 물론, 내 포션엔 부작용 따위 없었으며 그동안의 임상 시험은 그저 재수 없는 녹스 따까리들이 겁먹는 걸 구경하는 유흥거리일 뿐이었지만.

하지만 연승연에겐 다르게 다가왔는지 되레 심각해져 물었다.

“확실히 검증된 대상자여야 할 겁니다.”

연승연의 말에 박사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한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감 주는 눈으로 말했다.

[폭주 위험 없는 안전하고 확실한 에스퍼니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저희와 계약하실 의사가 있는 게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받고 싶습니다. 저희에게 아주 간절한 사안이라서요.]

한서현의 말에 잠시 마이크를 끈 연승연이 나를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정말 아까 하신 말씀 그대로 진행하실 건가요? 제조 납품이 아니라 레시피로…….”

“응. 아쉬워?”

내 물음에 연승연이 입을 꾹 다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단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포션을 제작하셨는데도 이름도 알리지 않으시고 레시피까지 넘기면 호현 님께서 얻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명성도 돈도.”

“돈은 받을 건데.”

“직접 제작해 파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괜찮다니까. 어서 대답 해 줘. 기다린다.”

화면 안의 두 명이 갑자기 끊긴 목소리에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며 턱짓하자 연승연도 미련을 버렸는지 마이크를 켜고 답했다.

“납품이 아니라 레시피를 판매할 겁니다.”

[아 그렇구……. 네? 레, 레시피를요? 그 말 정말이십니까?]

“선계약은 당연히 한국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고요. 하지만 말했듯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레시피라 센터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얼마든지, 얼마가 되었든 모두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조건도 다 맞춰 드릴 테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지원과 익명성 보장, 그 둘이면 됩니다. 오늘은 일단 임상 시험부터 진행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밖으로 나간 한서현이 잠시 후 누군가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폭주에 안전한 유일한 에스퍼라 임무 중인 것, 힘겹게 부탁해 데려왔어요. S급 한서진 에스퍼입니다.]

“한서진?”

서늘한 눈으로 흘깃 카메라를 보는 얼굴은 이렇게 보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한서진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온 탄성에 급하게 마이크를 끈 연승연이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호, 호현 님. 안 돼요, 호현 님이라는 것 들켜선 안 됩니다.”

“미안.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 꼭 닥칠 테니까 계속해.”

연승연은 몇 번이나 불안한 눈으로 나를 곁눈질하더니 다시 마이크를 켜 말했다.

“그럼 포션 복약 부탁드립니다.”

한서현이 한서진에게 포션병을 건네는 모습을 웃는 낯으로 바라봤다.

‘널 위해 만든 거야. 한서진.’

딱딱하다 못해 싸늘한 표정을 보고도 내 마음은 그저 설레기만 했다. 한서진이 기뻐할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빨랐지만 이렇게 화면으로나마 한서진이 포션을 먹는 모습을 보니 던전에서 개같이 굴렀던 기억도 추억으로 남을 듯했다.

포션병이 열리자 향만 맡고도 다름이 느껴지는지 한서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묘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것을 돌려 보던 한서진이 단번에 포션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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