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83.
뿌듯하게 보던 내 눈에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마시자마자 포션병을 내던진 한서진이 크게 휘청거렸다.
[서진아!!]
“뭐, 뭐야. 쟤 왜 저래? 승연아. 저거 확대 좀 해 봐.”
내 손짓에 연승연이 화면을 확대했다. 쓰러질 듯하다 겨우 책상을 짚고 버텨 선 한서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한서진의 하얀 볼에 선명하게 흐른 한 줄기 눈물 자국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왜…….”
[무슨 일이야. 너 괜찮아?]
[포션 때문입니까? 무슨 이상이라도…….]
한서진이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마치 화면 너머를 보기라도 하듯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에 흠칫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럴 리 없는데도 한서진과 눈이 마주친 느낌을 받았다. 바로 곁에서 팔을 흔드는 연승연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멍하니 바라보다 반대쪽 사람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저러는지 물어봐. 그렇게 큰 부작용이 있을 리 없어.”
“네. 호현 님. 그럼…….”
[부작용이야? 괜찮아?]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해서.]
[포션은, 포션은 어떻습니까?]
[쓰레기야.]
귀에 선명히 들려오는 한서진의 목소리에 입을 떡 벌렸다. 뭐? 쓰레기?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헉……!”
“야, 나와 봐. 내 포션 처먹고 뭐? 쓰레기? 쓰으레기?”
연승연 역시 영혼이 빠져나가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얼굴이 붉어진 나는 연승연을 밀치고 다가갔다.
“안 돼요! 안 돼요! 호현 님!!”
연승연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앞으로 가 마이크를 잡으려는 나를 온 힘을 다해 막아섰다.
“호현 님! 백 퍼센트 센터에 잡혀갑니다. 절대 안 돼요!!”
“비켜. 나인 거 안 들킬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호현 님 제발…….”
온 힘을 다해 말리는 연승연에 결국 씩씩대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내게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경고를 하고서야 자리에 앉은 연승연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눈앞에서 도토리나무를 빼앗긴 다람쥐처럼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마이크를 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죄송해요. 포션 메이커님. 저희 에스퍼가 너무 놀라서 실언을 한 것…….]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말하던 한서현의 뒤에서 한서진이 싸가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사용될 수 없는 포션입니다. 웬만한 에스퍼가 복용해선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정도인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독으로 작용한다니 무슨 말씀이죠.”
한서현과 박사 역시 한서진을 바라봤다. 한서진은 제가 내팽개쳐 바닥에 굴러다니는 포션병을 보며 말했다.
[가이딩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힘이 너무 강해 S급 이하 에스퍼들은 복용하더라도 도리어 능력이 제한되거나 반발 작용으로 폭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걸 가이딩 포션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생각하는데. 독이라면 모를까.]
[그런…….]
‘너무 강해서 문제라는 거야? 하긴, 오천rp가 넘었지. 고등급 재료를 써서 그런 건가. 하지만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내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어. 몇 개라면 몰라도 전체적으로 하향시킬 수는 없는데.’
연승연이 어떻게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한서진이 한 말을 듣고 머리를 스친 생각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잠깐, 그래…. 지금은 가이딩 포션이 존재하잖아? 그걸 기반으로 다시 연구할 수 있는 거야. 혹시 희석이 가능하다면…….’
“……님, 호현 님!”
“어, 엉?”
“어떻게 하죠? 저걸 보세요!”
내가 잠시 정신 팔린 사이 쑥덕대던 센터 놈들이 계약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제안했던 조항들이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지원금과 예상 거래 금액은 삭감, 샘플 분량은 두 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아무래도 리스크가 커 그대로 계약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적당한 수준으로 계약서를 수정했는데 이 정도는 어떠세요? 물론 충분할 만큼의 지원은 해 드릴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래서 윗 놈들이랑 얘기할 땐 잠깐도 한눈팔면 안 된다. 정신 놓으면 코 베인다니까.
“크윽, 치사한 새끼들.”
“어쩌죠…….”
“나와 봐. 내가 말할 테니까.”
“안 됩니다! 저 에스퍼와는 면식이 있는 사이잖아요. 말투만 보고도 알아챌 거라고요.”
“하, 그럼 잠깐 기다려.”
부스 밖으로 달려 나가 펜과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종이에 메모를 갈겨 연승연에게 읽게 시켰다.
「뒈질래? 호의가 계속되니까 내가 호군 줄 아냐?」
“호, 호현 님…….”
“안 읽을 거면 마이크 내놔.”
손을 까딱이자 연승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긴 한숨을 뱉은 연승연은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좋은 뜻에서 제안한 호의에 돌아온 게 이런 식이라니 정말 유감입니다. 제작권이 아닌 레시피를 넘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모르진 않을 텐데요.”
[포션 메이커님. 저희 의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저희가 책임자로서 에스퍼들에게 심각하고 치명적인 리스크를 겪게 할 수는 없고 그를 저희가 모두 감수하기보단 서로 함께 힘을 합쳐 보자. 이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부디 오해 말아 주십시오. 정식적인 거래 계약서도 아닐뿐더러 함께하는 첫 발걸음 아니겠습니까.]
박사 새끼. 말은 잘한다. 벌써 홀려 안절부절못하는 연승연의 모습에 혀를 차며 펜을 움직였다.
「퀘스트 뜨자마자 호소문 올린 게 어디 사는 누구더라? 못 믿겠으면 꺼져. 레시피 달라고 내 발이라도 핥을 나라가 한두 개인 줄 알아?」
메모를 본 연승연이 침음을 삼켰다. 빨리 말하라고 발길질하자 그제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미 퀘스트로 저희, 아니 제 포션의 가치는 증명된 거나 다름없습니다만 그래도 신뢰가 없다니 이 거래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먼저 얻으려는 나라들은 많으니까요.”
***
[이 거래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먼저 얻으려는 나라들은 많으니까요.]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 단호한 음성에 결국 한서현은 완전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여지가 없는 거래였다.
“저희는 포션 메이커님께 필요한 모든 편의를 맞춰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제안하신 모든 계약 조건을 수용하겠습니다.”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이상한 변조 음성과 함께 대체 영상이 떠올라 있던 화면이 꺼졌다. 연락이 끊기자마자 한서현은 그 자리에서 깔깔 웃으며 펄쩍 뛰었다. 조심스럽게 비위를 맞추던 것과 백팔십도 다른 태도였다.
“완전 성공이야!! 세상에, 우리나라에 강의진만 한 포션 메이커가 또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심지어 강의진보다 더 선하고 예의 바른 것 같던데요. 레시피를 공개한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지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박사님도 고생했어요.”
며칠 전 제게 떠오른 퀘스트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거의 포기하고 있던 가이딩 포션의 성공이라니. 한서현은 그 제작자가 어느 무인도에 있든 제가 직접 찾아가 계약을 따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이야. 제작계 각성자 특유의 변덕을 부려 갑자기 하지 않겠다 뻗대기라도 할까봐 조금 줄을 타며 자존심을 긁긴 했지만 애초에 포션 메이커를 의심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한서현은 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앞서 레시피를 약속받았다. 가이딩 포션만 완성된다면 얼마나 많은 에스퍼와 가이드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까. 벅찰 정도로 날뛰는 환희를 감추기가 힘이 들었다. 계약서를 소중히 안으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서진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어. 퀘스트 성공했다는 알람도 떴어.”
“뭐어? 그럼 정말 완벽한 포션이라는 거잖아! 너 그럼 혹시 계약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을…….”
“아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도 맞아. 가이딩이 되긴 했지만 너무 강해서 오히려 공격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상용화하기 위해선 많이 손봐야 할 거야.”
딱딱하게 답한 한서진은 한서현의 품에 안긴 서류 봉투를 빤히 보다 물었다.
“어디야?”
“뭐가.”
“포션 메이커가 있는 곳. 당연히 뒷조사했을 거 아니야.”
“아니. 못 찾았어. 회선도 보낸 곳도 모두 숨겨져 있는 데다……. 여기.”
한서현이 품에서 서류 하나를 빼내 보여 줬다.
“어찌나 철저한지 추적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며 전결서약서까지 보냈지 뭐야.”
“그래서?”
“전이라면 모를까 그 사람이 정말 가이딩 포션을 만든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이상 이제부턴 내가 보호해야 해. 아무리 너라도 관련한 정보는 못 넘겨줘.”
무표정하게 듣던 한서진은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상관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
회의가 끝나자마자 통장에 곧바로 꽂힌 1차 지원금 20억. 인건비와 재료비로 하루 만에 모두 사용했다. 임청과 제로는 새로 짜 준 리스트를 들고 다시 각지의 던전으로 향했고 진명이도 끝없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하루에 세 번씩 공방에 방문했다. 가득 찬 펜트리와 함께 나는 또다시 지하실에 박혀 연구를 시작했다. 센터가 가이딩 포션 계약을 따내서인지 어느 순간 전결서약이 풀린 연승연 역시 함께 지하실로 내려와 연구를 도왔다.
포션 내에 담기는 가이딩양을 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제작을 해 봐도 모든 결과는 하나를 가리켰다. 비어 있던 조각.
“설풍의 결정이 필요해…….”
시선이 자연히 우편물을 쌓아 놓은 더미로 향했다. 가장 위의 반질반질한 종이엔 화려한 그림과 함께 커다란 글씨가 써져 있었다.
「<세계 아틀리에 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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