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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84화 (84/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84.

그땐 당장 퀘스트를 깨는 데에 급급해 꼼수를 썼지만 가끔은 생략할 수 없는 과정도 있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가이딩 포션의 해답도 정도에 있는 듯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때와 같은 시간제한도 없어 부담이 덜했다.

“퀘스트창.”

메인 퀘스트#5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다섯 번째 연계 퀘스트는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퀘스트창을 열자 뒤따라 미뤄 두었던 네 번째 퀘스트의 보상을 선택하라는 창이 떠올랐다.

활성화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최대 2가지)

►의신(醫神)의 손길 (S)

►Born to be Star (S)

►선산의 주인 (S)

►플라멜의 현안 (S)

►천지보감 (S)

► 정신 방비 (S)

.

.

자그마치 두 가지의 스킬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가장 필요한 황금 솥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수많은 스킬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의 늪에 빠졌다.

가장 끌리는 건 ‘의신의 손길’과 ‘선산의 주인’이었다. ‘의신의 손길’이 있다면 성산하의 손이 왜 그 꼴인지 진단할 수 있었고 ‘선산의 주인’을 선택하면 내 약산이 있는 이공간이 생긴다. 직접 채집해야 해 번거롭긴 하지만 재룟값을 굉장히 많이 아낄 수 있다. 둘뿐 아니라 사기급 감정 스킬인 ‘플라멜의 현안’이나 레시피 연구에 필요한 ‘천지보감’, S급 스킬은 아니어도 몇몇 힘들게 얻었던 전투 관련 스킬도 놓치긴 아까웠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번에도 결정하지 못하고 손을 휘저어 창을 사라지게 했다.

“나중에 할게. 나중에.”

뭐, 급할 거 없으니까. 당장 급한 건 가이딩 포션 안정화다. 등을 기댄 채 꽤나 두꺼운 엑스포 안내 책자를 펼쳐 들고 한 장씩 넘겼다. 내가 지하실에 박힌 사이 이미 시작한 엑스포는 화려한 개막식을 치르고 하루에도 수십만이 넘는 인원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설풍의 결정……. 설풍의 결정…. 찾았다!”

「4부 <아뜰리에 친선 대회>

부문 : 장비, 의복, 포션, 테이밍…….

부상(각 부문)

- 1위 : WOH상금, S급 아이템, 설풍의 결정

- 2위 : WOH상금, S급 아이템

- 3위 : 설풍의 결정」

대회 부상이라니. 거저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책자를 소리 나게 덮으며 벌떡 일어났다.

“목표는 3등이다.”

***

연승연과 함께 세계 아뜰리에 엑스포가 열리는 상암동으로 향했다. 차량 진입을 막은 대로변부터 일대 모든 건물들에 사람이 넘쳐났다. 세계적인 행사다 보니 우리나라 헌터뿐 아니라 관광 겸 놀러 온 외국인들까지 합쳐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혹시 누군가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로브에 마스크까지 쓰고 온 게 다행이었다. 여기다 S급 아이템인 반지까지 끼고 있으니 누가 알아보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친선 대회 참여 신청서를 내러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얼굴에 그대로 굳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많은 기대를 하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총장께서 미스틱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천랑 길드장님 때문에 오는 거나 다름없지요.』

『저 역시……. 이런, 잠시 실례를.』

외국인과 대화하는 성산하를 못 본 척하고 슬쩍 등을 돌려 접수처로 향하는데 덥썩 뒷덜미가 잡혀 한쪽 구석으로 질질 끌려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누구세요?”

성산하가 그대로 어깨를 돌려 나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벽에 등이 닿고 성산하의 양팔에 갇혀 도망갈 데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어색하게 마스크를 내리며 웃었다.

“어, 너였냐? 어쩐 일이야. 여기서 다 보고.”

“공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처음 나왔다. 처음.”

“엑스포가 구경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시간 내어 놀아 줬을 텐데.”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에 울컥했지만 저 멀리 신청서를 내고 돌아와 나를 찾는 연승연의 모습에 어서 가야겠다 싶어 순순히 답했다. 어차피 숨긴다고 모를 놈도 아니고.

“할 일 있어서 온 거야.”

“네가 엑스포에 무슨 일이 있다고?”

“설풍의 결정. 그게 필요해서.”

“설풍의 결정?”

성산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게 묻지도 않고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는지 턱에 걸친 마스크를 툭 건드리며 비꽜다.

“이렇게 얼굴 다 드러내고 어딜 나가려고. 경연장도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것 알고 있지.”

“몰랐…. 지만 마스크 끼고 있잖아. 반지도 있고, 또 대회엔 익명으로 참가도 되니까 위험하지 않아. 일부러 이목 끌지 않으려고 일 등 아니라 삼 등하려고까지 생각을…….”

주절주절 말을 잇다 입을 다물고 불만스레 성산하를 바라봤다.

“씨발. 내가 이걸 너한테 왜 변명하고 있어야 하냐? 어딜 가서 뭘 하든 내 마음이라고.”

“엑스포 끝나면 매물 풀릴 텐데 기다리지 않고.”

“당장 구할 수 있는데 왜 기다려?”

“하하, 어련하시겠어.”

시계를 확인한 성산하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판촉물을 배포하는 창구로 가서 종이 가면 하나를 들고 와 내 품에 안겼다. 점 같은 눈 두 개에 빙긋 웃는 입. 마냥 멍청하게 생긴 캐릭터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얼굴 잘 가리고.”

“이딴 거 안 써. 마스크도 썼고 로브도…….”

“그래서 나한테 바로 걸렸어?”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봐도 유치한 가면을 내려다보다 던전에서 성산하가 썼던 꽤나 멋있었던 가면이 떠올라 넌지시 물었다.

“……네 가면 빌려주면 안 되냐?”

내 말에 성산하가 눈을 휘며 손목을 잡아 올렸다.

“그때 매스컴 타서 내 가면인 거 밝혀졌는데 괜찮겠어? 그걸 쓰고 나가면 미스틱이랑 무슨 사이인지 다들 궁금해할 텐데.”

손끝으로 내 반지를 매만지며 실실대는 얼굴에 소름이 돋아 왈칵 표정을 구기며 손을 내쳤다.

“꺼져.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나도 치사해서 안 해.”

“꽤나 실력 좋은 건 알지만, 상 못 탔다고 너무 실망하진 말고. 외국 제작계들도 많이 참여하는 대회라 난이도가 높아.”

그제야 성산하가 나를 쉽게 풀어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내가 예선 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내 위엄을 몰라보는 성산하의 편협한 육감에 코웃음 치며 등을 돌렸다.

“됐어. 나 간다.”

“일찍 끝나면 보러 가지. 온 김에 엑스포 구경시켜 줄게.”

“바쁜데. 뭐, 그렇게 부탁하니까 생각은 해 볼게. 참고로 중앙 광장부터 돌고 싶어.”

“내가 가기 전에 탈락 하면 연락해. 사람 보낼 테니.”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채 등을 돌렸다.

***

하, 이게 아닌데…….

“C조 본선 진출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마두석, 카밀라!”

“본선에서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는 TOP 10을 발표하겠습니다. 레오, 익명 76번, 모션K, 마두석, 카밀라, 화타…….”

“네! 드디어 준결승전입니다. 린지, 익명 76번, 마두석, 그리고 수아드!”

“린지와의 대결에서 마두석이 승리했습니다! 마두석, 결승 진출!”

눈에 띄지 않으려 일부러 심사 위원 눈앞에서 실수를 반복했는데도 내 점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삼 등을 하기 위해서는 준결승전에서 져서 3,4위전을 치러야 하건만 결승까지 올라가 버린 것이다. 그나마 익명 76번이 있어서 단독 선두를 달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젠 일등 아니면 이등뿐이다. 설풍의 결정은 일 등 상품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WOH와 엑스포 홍보를 위해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삼 등에게 가서 팔라고 해야겠다. 설풍의 결정은 용도가 한정적이니 이 등 부상과 바꾸자고 하면 팔겠지.’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라운드. 결승전입니다!”

나와 익명 76번이 무대로 올랐다. 경기장 내에 이곳저곳 퍼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가 서 있는 무대를 향했고, 수많은 카메라가 머저리 같고 조악한 내 가면을 렌즈에 담았다. 무대 앞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승연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가면 안 썼으면 좆 될 뻔했네. 이번에는 무조건 져야 한다.’

익명 76번 역시 나와 비슷한 체구에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 그 어떤 인터뷰에도 답하지 않았기에 사회자가 전보다 더 많이 말을 해야 했다.

“올해엔 포션계에 슬픈 소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포션 마스터 강의진을 기리며 잠시 묵념하겠습니다.”

미리 계획된 식순이었는지 슬픈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대를 향해 고개를 숙인 관중들을 황당히 내려다봤다.

‘이딴 의식 필요 없다고!!’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사회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지만 포션계의 미래는 여전히 밝습니다. 두 분이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익명과 익명의 싸움이네요. 서로 닮은 듯 다른 익명 76번과 가명을 쓰신 마두석 님은 지금껏 그 어떤 실수도 않고 선두를 다투며 올라왔는데요. 지금까지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으신 비밀스러운 포션 메이커들이십니다. 우승자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들으면 저는 감격해 울지도 몰라요.”

흑흑 소리를 내며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사회자에 관중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빨리 내려가고 싶은 생각에 그저 지루한 표정으로 앞의 관객석을 훑던 나는 언제 왔는지 팔짱을 낀 채 구석의 기둥에 기대 선 성산하를 발견했다. 다른 관중들과 달리 성산하의 시선은 오롯이 내게만 꽂혀 있었다.

삼 등을 한다는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결승 자리에 서서 성산하를 내려다보니 기분은 좋았다. 가면 뒤로도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흰 장갑을 낀 손이 살랑 흔들렸다.

결승전이 시작됐다. 이번엔 마음먹고 포션을 망쳤다. 순조롭게 향기로운 연기를 내뿜는 익명 놈의 시약과 달리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내 냄비는 늪처럼 눅진하게 끓고 있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구역질 나기 짝이 없었다. 누가 승리했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압도적인 점수 차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이번 친선 대회의 우승자는 익명 76번입니다!”

내가 져 줬다곤 하나 꽤나 실력 있는 놈이긴 했다. 힐긋 익명 놈을 바라봤다. 로브 아래로 씩 웃는 입꼬리가 보였다. 왜인지 모를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응? 뭐지…….’

사회자가 익명 76번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축하드립니다!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이네.”

“네?”

놈이 천천히 로브를 걷었다. 환한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에 내 눈도 튀어나올 듯 확장됐다.

“뭐야, 씨발?”

나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얼굴이 거기 서 있었다. 존나 잘생긴 얼굴이…….

사회자가 건넨 마이크를 잡은 놈이 입을 열었다.

“나는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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