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86화 (86/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86.

“귀엽긴.”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성산하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외려 뒤에서 기다리던 이초가 더 초조한 낯으로 다가와 말했다.

“강의진은 이미 도착했는데 어서 가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급해. 천랑 길드장이 보잔다고 전하지 않았어?”

“그래도 강의진이잖습니까. 첫 만남인 데다…….”

농담조 뒤에 감춰진 가벼운 힐난에 머쓱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섰던 이초는 망설이다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잖아요.”

“그래. 지겹도록 오래 기다렸지.”

“그런데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이초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떨군 성산하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툭툭 창틀을 두드리며 한참을 고민하다 빙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냥. 설레서.”

“예?”

“이만 가 볼까? 누군 늦으면 난리가 나는데 이쪽은 어떨지 모르겠군.”

설렌다기엔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이초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바라보다 그새 앞서 나간 제 상사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따로 준비된 VIP 룸에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겨우 따돌린 강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성산하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진 강의진이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산하 형!”

성산하가 우뚝 발을 멈췄다. 뒤따라 들어오던 이초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강의진은 활달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게다가 하필 오늘 같은 날.”

“……기억하고 있네? 잊었을 줄 알았는데.”

“그럼. 당연하지. 보육원에서 가장 친했잖아. 우리.”

당당한 강의진의 말에 성산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산하의 얼굴엔 어느새 그린것처럼 완벽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친했지. 누구보다.”

***

「세계 아틀리에 엑스포에 몰래 온 손님! 강의진의 화려한 복귀. 엑스포 ‘들썩’」

「세계 유일의 ‘포션 마스터’ 강의진을 얻은 노바리온의 정체 전격 해부」

「죽음에 대한 의문, 강의진VS녹스? 의혹에도 수장이 잠적한 녹스는 묵묵부답」

「포션 마스터 강의진 정식 기자 회견은 미정」

일주일이 지나도록 온 세상이 죄다 가짜 강의진 얘기뿐이었다. 어떤 채널을 돌려 봐도 보이는 놈의 얼굴을 짜증스레 바라봤다. 정말 나라도 되는 듯 활개를 치고 다니는 놈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한동안 의뢰는 받을 생각 없어. 하지만 이제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씨발, 지랄한다…….”

복귀했다던 태제헌은 왜 조용한지 모를 일이었다. 진짜든 가짜든 일단 강의진이 밖에서 저 지랄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놈이 아닌데. 사람들과 성산하야 그렇다고 쳐도 설마 태제헌까지 속아 넘어갔나 싶은 생각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새끼가 속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조용한 걸 보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날 찾아다닐 일은 없으니 그건 잘된 건가? 좆같네 진짜…….”

머리를 긁적이다 티브이를 끄고 방을 나갔다. 아래에선 연승연이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간에 비뚤게 기대 쳐다보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위를 올려다본 연승연의 표정이 확 밝아지며 꾸벅 인사를 했다.

“호현 님. 일어나셨어요?”

“아까 일어났지. 벌써 준비 다 했네?”

“네……. 늦게 가면 앞자리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연승연은 오늘 월계나루 홍보식에 간다. 아틀리에 엑스포에 부스를 내지 않은 공방들은 오늘 홍보식에 대표 책임자 한 명씩을 참석시켜야 한다는 공문을 받아서였다. 물론 홍보식은 허울일 뿐 그 뒤에 있을 강의진의 정식 복귀 기자 회견을 장식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불렀다는 것은 암암리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정장을 차려입은 연승연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뭘 그렇게 차려입어. 슬리퍼나 신고 가지.”

“하, 하지만 의진 님을 처음 보는 자리라…….”

며칠간 내 반응으로 내가 ‘강의진’을 싫어한다는 걸 알아 티 내지는 않았지만 차마 숨기지 못한 기대와 설렘이 연승연의 얼굴에 빤히 보였다.

‘강의진은 무슨 짭의진이지.’

속으로 삐죽대는데 가방을 든 연승연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호현 님. 오늘 가이딩 포션 테스트 담당자에겐 제가 미리 내용 전달해 놓았고, 에스퍼들이…….”

“알아, 알아.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 말고 가.”

“네……. 다른 것 말고 테스트만 해 주시면 됩니다! 테스트만…….”

연승연이 홍보식으로 먼저 떠난 후 나는 대강의 준비만 마치고 2층의 부스로 올라갔다. 가이딩 포션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지금까진 연승연이 도맡아 하던 일이었는데 오늘만 어쩔 수 없어 내가 대신 테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6차 테스트 진행을 맡은 황석민입니다.]

“어라……?”

답하기 위해 마이크를 찾았는데 마이크가 있는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걱정이 많은 연승연이 마이크를 다른 곳에다 숨겨 놓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익명 : 안녕하십니까.」

내가 치는 타자 역시 자연히 연승연이 입력해 둔 어구로 변경됐다. ‘안녕.’은 ‘안녕하십니까.’로, ‘응’은 ‘네’…….

어디까지 등록했나 궁금해 슬쩍 ‘씨발’을 검색하자 ‘하하’로 치환됐다. 그뿐 아니라 모든 욕설은 죄다 ‘하하’였다.

“하여간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혼자 이리저리 검색하는 사이 테스트는 수월히 진행되며 10명의 에스퍼들에게 시약이 투여됐다. 각 화면의 불이 초록빛으로 바뀌며 어느 등급까지 효과를 보이는지 나타내기 시작했다. 부작용을 뜻하는 붉은 빛은 하나도 없었고 C급 이하의 등급에서만 애매함을 뜻하는 노란 빛이 표시됐다.

[전에 조언해 주셨던 대로 가이딩 포션을 희석해 등급별로 제작했는데요. 추이가 아주 좋습니다. 다만 아무리 해도 1000rp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포션 메이커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지원금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그는 걱정 마시고요.]

「익명 : 조금 더 조절해 볼게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희 연구팀에서 요청이 많아서요. 포션을 이용해 임의로 레시피 연구를 해도 될까요?]

「익명 : 전 레시피 팔았으니 그건 알아서 해세요.」

[기존 포션만 등급별로 완성이 된다면 필드에서 활용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저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박사에 화면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박사가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역시 ‘그분’이신 거죠?]

“그분이라니 뭘 말하는……. 아, 씨발.”

뒤늦게 강의진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 썩은 표정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개나 소나 강의진, 강의진. 강의진! 평소라면 기분 좋았을 일이 이렇게 짜증 나게 다가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강의진이 맞긴 하지만 놈이 말하는 건 짭의진이잖아. 뭔가 크고 소중한 걸 빼앗긴 느낌에 가슴이 답답해 퍽퍽 타자를 쳤다.

[복귀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알았습니다. 마스터님 외에 누가 만들겠어요?]

「익명 : 씨바ㄹ 저 강의진 아닌데?입니다.」

연승연의 텍스트 대치만 믿고 욕을 했는데 너무 급하게 치다 오타가 나 그런지 욕설이 적나라하게 보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당황한 박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저 채팅을 보냈다.

「익명 : 헛소리하지 말아 주세요. 강의진 아닙니다. 이딴 식으로 지껄이시면 하하속상합니다.」

[아, 아. 네. 죄송합니다.]

테스트가 끝난 후 급히 나간 박사를 시작으로 연구에 참여했던 에스퍼들이 통신을 나가며 화면이 하나둘씩 꺼졌다. 잠깐 레시피를 고민하느라 생각에 잠겨 있던 나도 뒤늦게 통화를 끄려는데 하나의 화면이 나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익명인 데다 차례로 나열되어 있던 사람들이 사라져 어떤 등급의 에스퍼인지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안녕은 무슨, 안녕 못한다.’

[누구 가이딩을 훔친 거예요?]

“뭘 훔쳐? 이 미친놈은 또 뭐야? 기분 좆같게 하네. 센터 새끼들.”

테스트가 끝나면 바로 통화를 끄라던 연승연의 경고는 까맣게 잊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익명 : 무슨 하하소리입니까? 훔치긴 뭘 훔치세요. 하하?」

[레시피 봤어요. 가이딩 포션을 만들기 위해선 가이드가 필요하다면서요. 그쪽도 누군가의 가이딩을 썼다는 소리잖아.]

「익명 : 님이 알 거 없으십니다. 신경 끄십시오. 하하.」

[알아야 겠는데. 중요한 문제라서.]

「익명 : 전 알려 주기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찾아오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화나게 만들지 마세요.」

[말투 진짜 좆같네요.]

「익명 : 감사합니다. 너도요. ㅈ같습니다.」

반대편에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새끼 튀었나, 스피커를 툭툭 치는데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움찔했다.

[상관없어요. 거의 다 찾았어.]

“……뭐?”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 가지고 장난친 거라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기다려요.]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에 멈춰서 기억을 더듬는 사이 통화는 저 혼자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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