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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87화 (87/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87.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찾아온다면 겁먹을 줄 아나. 아마 놈도 내가 강의진이라고 생각해 한 말인 것 같은데 백날 뒤져 봐라. 이 공방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걱정하는 단 한 가지는 이러다 가이딩 포션도 가짜 놈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게 아닌지, 그것뿐이었다. 내가 만들었다고 소문이 나는 건 좋은데 짭의진이 의기양양한 모습은 보기 싫단 말이지.

소파에 늘어져 멍하니 천장만 보던 나를 일으킨 건 갑자기 온 손님들이었다.

“호현 씨!”

“누나? 어쩐 일이야?”

서둘러 달려가 문을 잡아 주자 누나의 뒤로 성산하의 차가 보였다. 안송아가 웃으며 뒤로 고갯짓했다.

“어쩐 일이긴. 호현 씨, 우리 계약 갱신할 때가 됐지?”

“승연이 지금 없는데.”

“그거 알고 온 거야. 호현 씨 혼자 심심할까 봐. 계약은 핑계고 겸사겸사 나가서 맛있는 밥도 먹고 바람 좀 쐬자고 왔어. 길드장님이 비싼 거 사 주신대. 같이 가자.”

“나야 뭐…….”

역시나 뒤의 차에는 성산하가 있나 보다. 안송아의 말과 달리 가이딩 포션 연구로 심심할 틈은 없었으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안송아를 따라 차로 가 문을 열자 성산하가 손을 까딱였다. 일주일 만에 처음 연락했으면서 아닌 척 친근한 태도였다.

“좋은 아침.”

“열한 시도 넘었는데 무슨 아침.”

“예의상 하는 말이니 걸러 들어.”

잇새로 욕을 흘리며 차에 탔다.

누나와 성산하랑 시답잖은 얘길 나누다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창밖을 본 나는 앞에 보이는 건물을 보곤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성산하가 데리고 온 한정식집은 태제헌의 단골집이었다. 당연히 나 역시 많이 와 봤었고.

‘하필 여길 오다니…….’

태제헌이 있을까 봐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잠적했다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더욱 신경 쓰였다. 주춤대며 차에서 나가지 않자 성산하와 송아 누나가 의아하게 돌아봤다.

“안 나와?”

“호현 씨. 왜 그래?”

“어어. 먼저 가. 신발 끈이 풀려서.”

평상복이라 얼굴을 가릴 물건도 없었다. 주위를 확인하곤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다닥 둘의 뒤를 쫓아 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 불안하던 것과 달리 막상 상다리 부러지게 나온 음식들을 보자 반가우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전에도 맛있어서 좋아했는데. 심지어 지금은 앞에 태제헌도 없어서 소화도 잘돼 10인분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창 집중해 먹는데 안송아가 두 손을 모으며 감탄했다.

“세상에. 호현 씨 왜 이렇게 예쁘게 잘 먹어?”

“예쁘긴 무슨. 남자한테.”

옆에 앉아 있던 성산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호현이 상남자지.”

“호현 씨 잘생긴 거 누가 몰라요. 잘 먹어서 예쁘다는 거지.”

“그보다도. 전에 와 본 적 있나 봐? 익숙한 걸 보니.”

날 보며 묻는 말에 숟가락질을 하던 상태 그대로 멈췄다.

‘……어떻게 알았지?’

딱히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겉으로 티가 날 줄은 몰랐는데. 물을 마시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원래 다 잘 알아.”

밥을 먹다 송아누나는 걸려 온 급한 전화에 먼저 떠나고 둘만 남게 됐다. 휴대폰을 들어 일정을 확인한 성산하가 내게 물었다.

“두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별일 없으면 잠깐 홍보식 구경 갈래?”

“거긴 왜. 너도 참여하냐?”

허울만 홍보식일 뿐 강의진 복귀 기자 회견이 있다는 걸 알아 삐딱하게 묻자 자리에서 일어난 성산하가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헤집으며 말했다.

“데이트 신청하는 거잖아.”

“꺼져.”

손을 쳐 내자 피식 웃은 성산하가 먼저 뒤돌아 떠났다. 내가 당연히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재수 없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가짜 놈이 기자 회견에서 뭐라고 할지,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궁금하긴 하고…….

“에이씨.”

벌떡 일어나 성산하의 뒤를 따라갔다.

“야! 같이 가!!”

***

색색의 화려한 꽃들에 둘러싸인 성산하를 썩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옆에선 꽃집 직원들의 야트막한 탄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이걸 더 좋아하려나.”

“둘 다 너무너무 잘 어울리셔요.”

“고마운 말이지만 선물할 거라. 받는 사람에게 어울려야 할 텐데.”

팔짱 낀 채 한 발 뒤로 떨어져 떨떠름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데이트는 개뿔. 성산하 개새끼는 날 데리고 짭의진에게 줄 꽃다발을 사러 왔다!

“손님이시라면 길가의 들꽃을 꺾어 주어도 좋아할걸요.”

‘꽃집 사장이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사람 좋은 척 웃은 성산하가 날 돌아봤다.

“어떻게 생각해? 강의진에게 뭐가 더 어울릴 것 같아?”

“몰라.”

“그러지 말고 골라 봐.”

나를 달고 제 사적인 일을 하러 온 건 그렇다고 쳐도 나보고 그 새끼 꽃다발을 골라 주라는 거냐? 패 줘도 모자랄 판에 꽃다발?

욕이 절로 나왔지만 꽃들 한복판에 서서 생긋 웃는 얼굴이 나의 고매한 심미안을 자극한 탓에 차마 쌍욕은 하지 못했다.

“강의진은 꽃 같은 거 안 좋아해. 아니, 강의진은 그냥 널 안 좋아할걸. 그러니까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가자고.”

“어머나…….”

꽃집 사장이 입을 막고 탄식을 흘렸다. 날 무뢰배 바라보듯 하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반면 성산하는 전혀 타격받지 않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이런, 상처인걸. 그래도 막상 받으면 좋아할 수도 있잖아.”

“안 좋아해.”

“질투해서 하는 소리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개소…….”

무슨 말장난이냐고 버럭 화내려는 순간 안쪽에 들어갔던 직원이 연보랏빛의 꽃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여기, 이건 어떠세요? 오늘 리시안이 크고 싱싱해서…….”

“한번 볼까요? 잠깐 들어 줘.”

성산하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안기더니 직원에게 다가갔다. 얼떨결에 받아 안자마자 꽃다발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물씬 풍겼다. 들어갈 생각을 않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그것을 내려다봤다.

몇 번 꽃다발을 선물한 적은 있었다만 그건 그냥 그 사이에 들어 있는 선물이나 카드를 포장하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만큼 아무 관심이 없어 지금까지 포션에 필요한 재료가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받아 안자 묵직한 무게감이 조금 신기했다. 겨우 꽃을 모아 묶었을 뿐인데도 꽃 한 송이를 보는 것보다 배로 화려한 모습이나 부드럽게 섞이는 향기도 나쁘진 않았다.

‘이래서 다들 꽃다발을 받으면 좋아했던 건가.’

강의진은 꽃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지만 막상 처음 안아 본 꽃다발에 대한 감상이 변한 걸 보니 그 가짜 새끼는 받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짜증 나 발끝으로 툭툭 바닥을 쳤다.

‘그럼 더 주면 안 되는 거잖아. 걔 가짜라고.’

이래서야 성산하 말대로 질투라도 하는 것 같잖아? 하, 질투는 무슨. 내가 기분 나쁜 건 이깟 꽃다발 때문이 아니라 내 이름을 빼앗겨서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스토커 짓을 하며 날 귀찮게 굴더니 막상 가짜는 못 알아보고 홀라당 속아 넘어간 멍청한 성산하를 보니 견딜 수 없이 한심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짜증 나는 거다.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그나마 꽃향기를 맡으니 차분해져 얼굴을 묻고 깊이 심호흡했다.

‘신경 끄자. 나랑 상관없잖아. 오히려 태제헌한테 걸려 뒈지라지. 그래…. 신경 끄자. 돌아가면 한동안 뉴스도 안 보고…….’

찰칵.

돌연 앞에서 들린 소리에 눈을 번쩍 뜨자 언제 왔는지 성산하가 앞에 서 있었다. 게다가 만면에 감돈 흡족한 미소는…….

오싹한 소름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산하는 제 휴대폰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어울리네. 그건 우리 강아지 줘야겠다.”

“뭐? 필요 없어. 이딴, 이런 거 누가 좋아한다고…….”

던져 버리려다 예쁘게 엮인 꽃들이 마음에 걸려 몸만 움찔하다 말았다.

“필요 없어.”

“이거랑 아까 그거. 두 개 살게요.”

“정말 안목이 좋으시네요. 저도 아까부터 너무 어울려서 선물로라도 드려야 하나 했는데. 저기 혹시 두 분 사진 저희 SNS에 올려도 될까요?”

“아니요.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포장만 부탁합니다.”

“아휴, 그럼 어쩔 수 없죠. 포장 예쁘게 해 드릴게요.”

“뭐? 야. 이걸 쪽팔리게 어떻게 들고 가? 공방에 놓을 데도 없어!”

“손님 걱정 마세요. 저희 배달 서비스도 있답니다. 여기 주소 적어 주세요.”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오는 직원을 내치지 못하고 펜을 받아 들었다.

직원이 짭의진 꽃다발을 새로 만드는 사이 성산하는 사장의 권유에 못 이겨 손바닥만 한 카드에 문구를 적니 마니 하고 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밖에서 기다리려는데 문을 잡자마자 성산하가 나를 돌아봤다.

“어디 가게? 금방 끝나니 기다려.”

“더워서. 바로 앞에 있을 거니까. 금방 끝나니 상관없잖아.”

“멀리 가지 마.”

고개를 건성건성 끄덕이고 꽃집을 나왔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꽃집이라 주위는 한적했다. 일단 나오긴 했으나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차로 가서 기다릴 생각에 지름길로 빠졌는데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와 푸륵거리는 소리에 기시감이 느껴져 천천히 뒤를 돌았다.

길 한복판을 막고 우뚝 선 커다란 검정 개 한 마리가 있었다. 그것을 보자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씨발…….”

태제헌의 개 새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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