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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88화 (88/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88.

개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새빨간 눈과 시선을 마주한 채 뒷걸음치며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개와 거리를 벌리는데 골목에서 한 마리가 더 나타났다.

“룬, 루트…….”

자연스레 불러 버릴 뻔한 이름을 입술을 깨물어 겨우 참았다. 씨발, 저 둘이라니. 근처에 태제헌이 있단 소리다. 진짜 좆됐다.

슬쩍 주위를 곁눈질했다. 다행히 태제헌에게 들킨 건 아닌가.

이대로라면 놈을 마주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쟤들의 흥미를 끌거나 얕보여서는 안 된다. 저 새끼들은 그냥 개가 아니었다. 태제헌이 어릴 때 직접 잡아 기른 몬스터로 수많은 소송과 돈으로 테이밍 법까지 개정해 데리고 다니는 미친 마수들이란 말이다. 웬만한 헌터들은 저 둘을 피해 도망칠 수 없었다.

“크르르릉…….”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하는 룬과 달리 뒤늦게 나타난 루트는 코를 킁킁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 뒤에서 살랑살랑거리던 꼬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혀를 내밀고 내게 신나서 달려왔다. 루트는 날 알아봤는지 다리에 몸을 마구 치대기 시작했다.

‘젠장. 이 똥개가…….’

차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자 아래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자기를 모른 체하냐며 내 허리께를 주둥이로 치는 루트와 달리 룬은 경고하듯 짖었다.

“웡!”

“웡! 워우…. 웕….”

“멍! 멍멍!”

루트도 몸을 낮추며 룬에게 맞섰다. 어느새 나는 뒷전으로 하고 저희 둘이 치고받는 모습에 머리를 짚었다. 이러다 하울링이라도 하면 그 소리를 듣자마자 태제헌이 곧바로 올 거다. 이미 내게 관심을 둔 이상 태제헌이 부르기 전까지도 가지 않을 거고. 초조한 마음에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러다 걸릴 바에야 차라리…….’

상황을 보다 슬쩍 발을 옮기려는데 한 발 떼자마자 룬과 루트가 날 보며 으르렁댔다. 저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걸 알았는지 다시 내게 다가오는 둘의 모습에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쳤다. 결국 벽에 등이 부딪혔다.

“크르르…….”

“얘들아. 말로 하자, 말로. 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몰라? 지금 가면 착한 강아지, 안 가면 나쁜 개 새끼야.”

룬은 금방이라도 물 것처럼 이를 드러내며 다가왔고 루트는 서러운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더니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부푸는 가슴팍에 루트가 뭘 하려는 지 알아챈 나는 급히 손을 뻗었다. 태제헌을 부르려고 하잖아!

“아, 안돼!”

“메에에-!”

“웕우웡?”

돌연 들려온 양의 울음소리에 놀란 룬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나고 금방이라도 하울링을 하려던 루트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내리자 내 발밑엔 구름이가 우뚝 서 있었다. 몸에서 빛이 나는 구름이가 맹렬한 표정으로 발을 쾅 구르며 길게 울자 룬과 루트가 꼬리를 말고는 뒤돌아 도망쳤다.

“구름아. 잘했어!!”

“미에.”

“아우우우-!!”

개들이 사라진 쪽에서 룬의 하울링 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어 구름이를 껴안고 후다닥 옆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층 반을 겨우 올라가 계단 층계참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열린 창문 바깥으로 태제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루트. 재밌는 거라도 봤니?”

목뒤에 오스스 소름이 끼쳤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어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껏 태제헌을 만나면 어떨지 몇 번이나 상상해 봤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내가 했던 그 어떤 상상보다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자폭까지 해 본 몸, 무서울 게 뭐 있냐 생각했었는데 자유를 맛본 이후라 그런지 그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구름이가 눈을 크게 뜬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걱정스레 올려다봤다.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알아들었다는 듯 내 품에 머리를 푹 기댔다.

바깥에선 룬과 루트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뛰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겁이 났다. 혹시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오기라도 할까 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태제헌은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쉽게 등을 돌렸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소리 내지 않은 착한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구름이가 부르르 떨더니 내 품에서 벗어났다. 구름이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허리춤에서 미친 듯이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구름이가 휴대폰 진동을 제 털로 막아 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고 감동의 눈길로 바라봤다.

“구름이 너……. 구름아!!”

“메에-!”

구름이가 당당히 서서 발을 콩 굴렀다. 기특함에 감동한 나머지 이곳저곳을 마구 쓰다듬어 주다 아까부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나 방금…….”

나도 모르게 태제헌을 만났단 말을 하려다 멈췄다. 그 말을 꺼냈다간 ‘주호현’이 보이기에 과한 반응이라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결국 마른 입술을 핥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어, 미안. 구름이랑 잠깐 놀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다. 바로 갈게.”

[아니, 어딘지 말해. 내가 갈게.]

“그럴 필요 없는데.”

[태제헌이 근처야. 괜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으니까 장소 찍어.]

빨리도 알아챘다. 새끼야. 속으로 투덜대며 얌전히 GPS를 찍어 보냈다.

기사 옆에 놓인 성인 몸만 한 커다란 종이 상자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가짜 강의진에게 줄 꽃다발이 담겨 있는지 차 안이 꽃향기로 가득했다. 괜히 거슬리는 향기에 코를 씰룩댔다. 역시 꽃은 싫다니까.

“방 잡아 뒀어. 홍보식 장소가 호텔 중앙정원이라 방에서도 잘 보일 거야.”

“너도 같이 있냐?”

“나랑 같이 있으면 좋겠어?”

“꺼져.”

성산하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앞의 꽃다발로 시선이 가는 걸 보니 모르긴 몰라도 강의진에게 갈 생각이겠지. 짜증스레 고개를 돌렸다.

몰래 찾아가 흠씬 패 줄까, 어차피 태제헌이 나타나면 가짜인 걸 알아볼 테니 가만둬야 하나. 근데 태제헌도 못 알아보면 어쩌지. 그럼 진짜 그 새끼가 강의진이 되어 살게 되는 거야? 포션 마스터도 아닌 게!! 미친놈. 나인 척하다 태제헌한테 잡혀가 봐야 정신 차리지.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점점 차 속도가 느려졌다. 홍보식장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많아 거리가 막히는 듯했다. 뚱하니 창밖을 보는데 바로 옆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조끼를 맞춰 입은 모습이나 이마에 두른 머리띠, 중간중간 보이는 피켓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호텔 내부로 들어가려고 앞의 가드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성산하 역시 반대편 창을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오늘 날짜에 맞춰서 시위대가 입구 쪽을 점거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두 해산시켰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시위?”

기사의 답에 의아하게 창밖을 보는데 무언가 익숙한 글자가 눈을 스쳤다. 방금 저 피켓에 강의진이라고 써져 있던 것 같은데? 내 눈을 의심하며 창문에 찰싹 붙었다.

“포…션…. 책임……. 포션 미친놈 강의진은 책임져라? 으엥?”

정말이었다. 「포션 살인마 강의진은 책임져라.」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강의진은 책임지고 보상해라」, 「포션 부작용을 인정해라」 등의 글들이 눈에 띄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황당히 밖을 바라보는데 마침 밖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녹스와 강의진은 부작용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인정해라! 인정해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도통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개중 어떤 아주머니 몸에 매달린 넓찍한 패널에 거친 글씨로 적힌 긴 글을 읽으려는데 정체되어 있던 길이 뚫리며 차가 호텔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읽고 있었는데!”

“읽어서 뭐 하게.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대수롭지 않은 성산하의 말에 입술만 달싹였다. 나는 주호현이니까. 관심 꺼야 하는 게 맞지만…….

미련 가득히 뒤를 봤다. 조금 읽다 만 패널에 적혀 있던 호소문. 몇 년 전 내가 만든 포션의 부작용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데……. 포션이 한두 개도 아니고 대체 뭘 말하는지,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호텔 부지 깊숙한 곳으로 차를 몬 기사는 본관 뒷문에 차를 세웠다. 날 돌아본 성산하가 카드키를 건넸다.

“방 키야. 707호. 일만 보고 갈 테니 중간에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사람 많아서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기 힘들 거야.”

“일은 무슨, …의진 보러 가는 거면서.”

“마음에 안 들어?”

실실 웃는 성산하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당연하지.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라 좆같지만 그건 내 행세를 하는 가짜 때문이고. 저 물음에 솔직히 긍정하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지 빤히 보여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

“간다.”

방으로 들어가 영 답답한 마음에 룸서비스와 와인을 잔뜩 시켜 두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과연 성산하의 말대로 뷰가 좋아 홍보식장이 너무 멀지도 않으면서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창문도 조금 열어 놓으니 마이크로 전해지는 소리도 생생히 들려왔다.

“우리 다람쥐는 어딨으려나…….”

와인을 홀짝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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