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89.
국가 행사를 너무 얕봤다. 이렇게 지루할 줄이야. 짭의진은커녕 월계나루의 포션 메이커들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머리 아저씨가 벌써 몇십 분째 경축사를 하는 모습을 지루하게 바라보다 휴대폰을 들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거나 찾아봐야겠다.
“부작용이라고 했지…….”
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포션 마스터였다. 게다가 임상 시험까지 몇 번이나 거치는데 부작용 같은 게 있을 리가. 무언가 오해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강의진 포션 부작용’을 검색하자 여러 기사들이 나왔다. 겨우 몇 분 전에 올라온 기사를 클릭하니 방금 내가 지나오면서 본 시위대의 사진도 함께 삽입돼 있었다. 기사에는 내 포션의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헌터들과 그 가족, 또 부작용을 인정받지 못해 시위에 나왔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 읽은 후 곧바로 다른 기사들을 클릭했다. 사이트에 있는 기사를 다 읽을 때쯤엔 내 미간에는 깊은 홈이 파여 펴질 줄을 몰랐다. 모든 기사들이 중복해 언급하는 문제의 포션은 마나 증폭 포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일리미탈을 말하는 건가?”
일리미탈은 남은 마나를 한 번에 폭발시켜 최후의 일격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버프 포션이다. 돌발성 게이트의 출현이 잦은 일본에서 수주가 들어와 제작했던 기억이 있었다. 한번 마시면 거의 광전사가 되어 날뛰는 터라 발표 직후 결투 대회나 경기 등에선 공식적으로 금지 포션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일리미탈의 효능이 사라지면 하급 스킬 사용도 힘들 정도로 무력해져 일주일은 누워서 요양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마나를 극한까지 짜내는 효능에 당연히 따라오는 반작용일 뿐 부작용이라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로 저항하는 재료까지 추가해 일부러 몸이 회복되기 전까진 중첩이나 재복용을 할 수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까지 써 줬는데!
대체 무슨 부작용이라는 건지 궁금해 더 찾아보고 싶었으나 이때의 나는 녹스에 소속되어 있었어서 그런지 관련 기사나 글들이 적었다. 녹스의 입막음이야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더 찾는 걸 포기하고 뒤로 등을 기댔다.
“부작용이라고……. 헛소리.”
마음 같아서야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루한 홍보식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조금 과하게 마신 와인이 문제였을까. 아래에서 연승연 찾기를 하다 조금 취기가 올라 열을 식히려 창가에 잠시 볼을 기댔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감았던 눈을 뜨자 침대에 몸이 눕혀져 있었다.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졌는지 어두컴컴했다. 한쪽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성산하가 보였다. 일을 하는 건지 스탠드 불빛 아래 서류를 넘겨 보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소리가 들렸는지 성산하가 나를 쳐다봤다. 따분하던 눈에 장난기가 스치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잤어?”
“응……. 존나 잘 자서 문제다. 언제 온 거야. 기자 회견은 끝났어?”
고개를 끄덕여 답한 성산하가 침대로 다가와 머리맡에 있는 등을 켜더니 걸터앉았다.
“홍보식 이후에 강의진 복귀 기자 회견이 있는 것 알고 있었나 보지?”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왜 보러 왔겠냐.”
“강의진에게 관심이 많은가 봐?”
“너만 할까.”
비웃으며 답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휴대폰을 찾자 성산하가 옆의 협탁에 놓인 것을 던져 줬다.
“밤 늦었으니 자고 가. 연승연에게 이미 말해 뒀어.”
“깨우지 그랬냐.”
“너무 잘 자던데. 깨울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역시 날 눕힌 것도 성산하인가 보다. 흥청망청 먹고 마셨던 흔적이 가득했던 창가의 테이블도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걱정 어린 연승연의 메시지가 많이 와 있어 답장을 보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곧바로 전화가 왔다.
“어. 승연아. ……일은 무슨. 자서 그래, 별일 아니야. 내일 갈게. 어.”
자지 않고 기다렸는지 걱정 가득한 연승연을 겨우 재우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도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성산하를 의아하게 보고 물었다.
“넌 안 가냐? 언제 가게”
“어딜 가. 여기가 내 방인걸?”
태연한 말에 얼굴을 팍삭 구겼다. 룸 안에 여러 개의 방이 있긴 했지만 침대는 여기 하나뿐이다. 영역을 지키려는 당연한 본능에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 말했다.
“침대 여기 하난데.”
“이렇게나 넓은데 곁 좀 내어 주지? 가이드였으니 익숙할 거 아니야.”
오랜만에 듣는 가이드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성산하의 말대로 센터에서는 자주 있던 일인 데다 남자끼리니 안 될 것도 없었지만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이 재수 없어 콧방귀 뀌었다.
“넌 에스퍼가 아니니까 가이딩받을 필요도 없잖아.”
“에스퍼면 기꺼이 해 주고?”
성산하가 레이븐 팀이었다면……. 첫인상으로 보아 아마 팀장처럼 좆같지 않았을까. 지금이면 몰라도 손잡기는커녕 닿기도 싫었을 거다.
“무슨 의민데. 갑자기 그딴 건 왜 물어봐.”
떨떠름하게 묻자 성산하는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이드였던 넌 어땠을지 궁금해서. 지금으로선 잘 상상 가진 않거든. 내가 알던 가이드로 지냈었다니.”
“별게 다 궁금하다. 어땠긴, 개같았지. 그래서 튀었잖아.”
중얼거리며 성산하가 누울 자리를 생각해 옆으로 몸을 피해 줬다. 눈썹을 치켜올린 성산하가 피식 웃더니 아예 몸을 내려 옆으로 기대 누웠다. 스르르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을 빤히 바라봤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열리며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안일한 것 같은데.”
“뭐가?”
“가이드 출신이면…….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멀뚱히 바라보는 내 이마를 툭 치는 손길에 그제야 무슨 개소리인지 알아챈 나는 황당히 되물었다.
“너 게이냐?”
“아니.”
“놀랐잖아. 근데 왜 개소리…….”
“딱히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단호한 대답에 마음을 놓다 이어진 성산하의 말에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이 미친놈이…… 알아보긴 씨발. 뭘 알아봐.’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다. 성산하가 게이일 줄이야. 슬금슬금 성산하에게서 멀어졌다.
“넌……. 넌 안 되겠다. 소파 가서 자라.”
“같이 자자며?”
“씨발 꺼져. 게이랑 같이 자는 취미 없어.”
말없이 몸을 돌려 눕자 등 뒤에서 들리는 피식대며 웃는 소리에 몰래 토하는 시늉을 했다.
“더 자려고?”
“말 걸지 마. 잘 거야.”
일어나는지 침대 한쪽이 확 가벼워졌다. 곧 스탠드 불빛이 한 단계 더 어두워지고 다시 사락거리는 종이 스치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을 채웠다.
포근한 분위기와는 달리 내 눈은 말똥말똥했다. 충분한 숙면으로 술기운도 모두 사라진 데다 낮부터 계속 잔 탓에 전혀 졸리지 않았다.-성산하의 헛소리도 한몫했다- 이럴 땐 숨이 찰 정도로 운동하다 씻고 자면 딱인데.
맞은편의 어두운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와 똑같이 생긴 주호현의 얼굴. 그러고 보니 주호현도 게이지 않았나.
슬쩍 손을 올려 손끝으로 볼과 턱선을 더듬었다.
‘……게이들한테 잘 먹히는 얼굴인가.’
하긴 고도로 발달 된 외모는 성별을 막론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미남박명이라더니. 이런 귀찮은 일도 다 있네. 눈을 꾹 감고 이불을 모아 품에 끌어안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자.
조용한 적막과 가끔씩 사락 하며 종이 넘어가는 소리는 묘한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침구 역시 푹신하고 포근한 게 내가 좋아하는 느낌의 것이라 충분히 잤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똑똑.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거의 잠에 들었던 정신이 건져 올려졌다. 자다 깬 느낌이 불유쾌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밤늦은 시간에 성산하의 방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어 당연히 이초일 거라 생각했다. 그사이 누군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몸을 움직일 기력은 없어 슬며시 눈만 뜨고 창문에 반사되는 광경을 바라봤다. 서류를 내려놓은 성산하가 고개를 돌려 내가 자는 걸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 뒤에 들려온 음성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산하 형.”
짭의진이잖아? 조금 남아 있던 잠기운마저 모두 달아났다. 성산하 역시 한밤중의 방문객이 예상외였는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형이랑 얘기 좀 하고 싶어서. 혹시 시간 돼?”
내 예상보다도 훨씬 친밀한 목소리였다. 강의진에게 준답시고 꽃을 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형? 혀어엉? 둘이 언제부터 친했다고?’
내 탈을 쓰고 성산하에게 친한 척을 하는 저의가 궁금했다. 게다가 성산하는 79% 확률의 게이였다!
온 신경이 문으로 향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밖의 대화를 엿들었다. 혹시 안으로 들어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성산하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진 않았는지 짭의진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어렵겠는데. 나중에 얘기하자.”
“하지만…….”
“돌아가. 늦었으니 어서 자고.”
문이 닫히려는 순간 짭의진이 소리쳤다.
“나 성좌들에 대해 알고 있어! 하말과 카스토르가 위험한 상태라는 것 역시…….”
“뭐?”
“그것 때문에 온 거야. 형. 잠깐 시간 좀 내 줘.”
“……네 방으로 가서 얘기하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금 하말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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