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90.
여태까지 성산하가 숨기고 있던 하말의 정체. 짭의진은 그걸 알고 있단 소리인가? 나도 모르는 걸 사칭범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기도 잠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얘기 하는지 나도 들어야겠다.
‘문으로 나가 봤자 따라갈 수도 없고…….’
주위를 둘러보며 고민하던 내 눈에 창문 너머 어두운 테라스가 보였다. 곧바로 테라스로 나간 나는 난간에 기대 몸을 한껏 젖히고 호텔 전경을 훑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불이 켜진 방은 한 손에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머지않아 꺼져 있던 수많은 창문 중 한 군데에 불이 켜졌다.
“저기다! 하나, 둘, 셋……. 십칠 층에 첫 번째 방.”
위치를 알아냈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칠 층에서 한 층 더 위로 올라갔다. 십팔 층에 멈춰 열린 문밖으로 옥상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래에 짭의진의 방이 위치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난간을 넘어 매달렸다. 예상외로 미끄러워 손을 놓칠 뻔한 것을 겨우 버텨 잡았다. 발아래로 뻥 뚫린 허공이 아찔했다.
“큭.”
탄력으로 몇 번 몸을 튕기다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테라스에 잘 안착할 수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와 몸을 숨기고 엿들었다.
“해야 할 얘기라는 게 뭐지?”
“급할 거 있어?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얘기…….”
“미안한데, 오늘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
아주 화기애애하다. 형 소리에 술을 받느니 마느니……. 짭의진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로 친한 걸 보면 성산하는 내 경고도 무시한 채 놈이 강의진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 쪽에서 보이는 침실 안에는 낮에 성산하와 함께 봤던 꽃이 보이는 위치라 더 한심하고 아니꼬웠다. 킁, 코를 씰룩였다.
***
“미안한데, 오늘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
여지없는 거절에 잔을 건네던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산하는 눈웃음을 치며 그를 제 앞에 앉혔다.
강의진이라는 남자. 제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얼굴로 나타난 데다 심지어 성좌까지 함께 조사하고 있었다고?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나. 꼭 짜 맞춘 것처럼.
속으로 웃음을 삼킨 산하는 고개를 까딱이며 재촉했다. 아까부터 공기 중에 감도는 묘한 향기가 불쾌해 지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들어야 할 말이 많은데, 먼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부터.”
“정확한 경위까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내가 속한 단체에서도 천체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어. 그러다 보니 천랑에서도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고.”
“노바리온은 그냥 제약 회사 아니었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말했잖아. 정확한 경위까지는 말하기 힘들다고……. 우리 쪽에선 천랑과 힘을 합쳐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을 뿐야. 형이 날 바로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해. 중요한 사안이니까. 그치만 증명해 낼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단지…….”
빤히 바라보는 성산하의 시선에 얼굴을 붉힌 강의진은 목이 타는지 몇 번 입을 달싹이다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가 뜻이 같다는 게 기뻐서. ……꼭 운명 같잖아.”
“아.”
강의진의 말을 들은 성산하의 얼굴에 완벽한 웃음이 드리웠다. 멈칫해 올려다보는 시선에 성산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의심할 리 없잖아. 네가 누군데.”
“형…….”
“믿고 있어. 의진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서. 우리는 너희 쪽과 달리 아직 협의가 되지 않았거든, 누군가와 힘을 함께한다는 게.”
“알지. 회장님 허락도 받아야 할 테고 형도 누구랑 같이 움직이는 스타일 아니잖아.”
“의진이는 형에 대해서 참 잘 아네.”
다정한 칭찬에 강의진이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산하의 믿음이 흐려질까 황급히 덧대듯 말을 이었다.
“처음엔 국내 헌터들을 보다 알아챘어. S급,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특별한 강한 힘이 있는 헌터가 죽으면 별이 사라진다는 걸. 시스템 아우라 때문에 일반인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둘 다 이상한 일이잖아. 별이 빛을 잃는 것도, 강한 헌터들이 이렇게 여럿이나 죽는다는 것도.”
“정확히 천랑에 원하는 게 뭐지?”
진중한 성산하의 표정에 강의진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지키길 원해. 지키고 싶어도 각 성좌의 힘을 가진 헌터가 누군지 정보가 부족해 실패한 적이 많아. 그건 형도 마찬가지겠지?”
“실패한 적이 있어?”
“사실……. 우리도 하말, 그러니까 S급 가이드인 류수윤이 하말의 대응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지켜보고 있었어. 사달멜리크의 아디티 싱과 스피카의 벨라 역시 마찬가지고. 위험에서 보호하려 했지. 하지만 알다시피 모두 잃고 말았어. 그러다 결국 남은 성좌는 알데바란, 레굴루스. 그리고…….”
“주벤엘게누비, 루크바트, 알레샤 겨우 다섯이지. 별이 빛을 잃을수록 게이트와 던전 역시 불안해지고 있고.”
“맞아. 하루라도 빨리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해. ……천랑은 남은 성좌들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어?”
“몇 명 정도.”
“누, 누구야? 알데바란? 루크바트? 아니면 알레샤?”
저희의 추측이 맞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해 묻던 강의진은 턱을 괸 채 빤히 응시하는 성산하의 눈빛에 애써 침착하곤 말했다.
“협의에 대해선 걱정 마. 먼저 밝히자면,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성좌가 있어. 그를 보면 천랑도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그건 흥미로운데. 어떤?”
“형부터 말해 줘. 얼마나 보호하고 있는지.”
“셋.”
“역시……!”
환희로 가득 찬 표정의 강의진을 바라보던 성산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조금 의문이 드는군. 내가 보호하고 있는 자들과 아주 기척을 지운 둘을 제외하면 남은 건 비정상적인 하말과 카스토르뿐인데. 누굴 보호하고 있다는 거지?”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성산하의 중얼거림에 강의진은 당당히 제가 숨겨 놓은 패를 꺼내 들었다.
“카스토르.”
“카스토르라고?”
“알아. 하말과 카스토르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지. 이건 형을 믿고 먼저 말해 주는 거야. 깜빡이는 별들은 완전히 죽지 않았어. 류수윤이 죽기 전에 하말의 힘을 어딘가 숨겨 둔 게 분명한데, 아직 그건 찾지 못했고. 사실 의심 중이던 인물은 있었는데 이미 죽어 버려서.”
“……카스토르도 하말과 같은 상태라는 건가.”
“맞아. 카스토르가 처음 빛을 잃은 건 3월 17일. 그날 죽을 뻔한 헌터가 있어.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목숨을 붙여 놓는 게 최선이었고. 지금은 가사 상태야.”
“그게 누구지?”
“나중에. 형이 나머지 성좌들의 소재지를 알려 주면 나도 카스토르를 만나게 해 줄게.”
***
둘의 대화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데다 혹시나 숨어든 것을 걸리기라도 할까 봐 중간에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다시 성산하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룸 키가 없어 들어갈 방법이 없길래 그냥 호텔을 나왔다. 밤이 깊어 그런지 시위하는 사람도, 기자들도 없이 한적했다.
지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공방으로 돌아와 내 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위가 고요하자 그제야 생각할 틈이 났다.
머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보들의 범람에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비밀 얘기라고 해 봤자 고등급 아이템이라거나 S급 퀘스트의 실마리. 뭐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사달멜리크, 카스토르, 스피카…….”
오면서 찾아본 것에 의하면 모두 하말처럼 별자리의 알파성이었다. 차례로 물병자리, 쌍둥이자리, 처녀자리. 그것보다도 더 많았겠지. 그 별들이 빛을 잃었다니.
뭘 알아야 소름이 돋든 말든 할 텐데 나는 별자리에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옥상에 가면 별들 잘만 보이던데. 뭐가 문제람.’
시스템 아우라로 별 관측이 어려워졌다는 말이야 들은 적이 있지만 어쨌든 별들은 뒤섞여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어떤 게 별인지 알파성인지는 내가 알 리가 없었고.
이해하기 힘든 둘의 대화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하말…. 즉, 구름이를 노리는 놈들이 있고 내가 구름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성산하가 하말, 하말 하며 미친놈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게 조금은 이해가 갔다.
“구름이랑 비슷한 애들이 더 있다는 건가……. 아니다, 다른 놈들은 다 죽었는데 하말이랑 카스토르만 이상하다고 했지. 그럼 구름이가 둘?”
“메에에!”
제 얘기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서는. 튀어나온 구름이가 침대 다리를 머리로 쳐 댔다. 구름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침대에 올리며 머리를 간질였다.
“쉿. 지금 밤이야. 승연이 깬다.”
“메.”
“네 친구들 때문에 머리 아프다. 여하튼 넌 내가 지켜 줄 테니 하나도 걱정하지 마. 나머지는 성산하가 어딨는지 알고 있고 카스토르 그놈은 죽었, 아니 가사 상태라는데.”
구름이에게 친구 이야기를 해 주듯 중얼거리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카스토르가 꺼졌다는 3월 17일은 내가 죽은 날이기도 했다. 태제헌을 배신하기로 한 디데이. 단 한 번이라도 태제헌 뒤통수를 거하게 칠 생각으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날만 손에 꼽으며 살아왔기에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죽던 날 함께 죽은 사람이 있다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별이니 뭐니, 난 구름이만 위험하지 않다면 그뿐이다. 던전의 이상 반응이 심해진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다른 것들이야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지키는 일은 내 전문이 아니다. 성산하 같은 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그보다도 나는 가짜나 어떻게 해야겠다. 주호현으로도 강의진으로도 살아 있을 수 없었기에 나서질 못했지만 내 이름을 대고 활개 치는 꼴을 더는 봐줄 수 없었다. 성산하처럼 별을 지키는 놈이래도 용서는 없다. 게다가 그 구역질 나는 형 소리란.
‘가장 끔찍한 방법은 역시 태제헌에게 잡혀가 100년 감금당해 죽는 건데.’
그렇게 되면 놈이 영영 강의진으로 살게 되는 거라 마냥 좋은 방법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아암……. 전혀 닮지 않았다고. 내가 훨씬 잘생겼잖아.”
아닌 밤중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내 허리께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구름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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