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91.
부스에서 뛰쳐나온 연승연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호현 님! 됐어요, 됐습니다! 7차 시약이 F급 가이드에게까지 성공적으로 효과를 보인다고 합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녀석을 쳐다봤다. 설풍의 결정을 사용한 새로운 가이딩 포션을 만들어 보냈지만 아직도 강력한 건 매한가지라 범용화를 위해선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고민하다 제시한 방법이 바로 내 포션을 희석하는 거였다. 포션 희석은 단순히 정제수에 원액을 타는 수준의 영역이 아니었다.
조금의 손실도 없이 효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선 희석 과정에서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와 임상 시험을 거쳐야 했다. 물론 나는 그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에 휘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레시피를 넘겨줬으니 그걸 에스퍼들에게 맞게 희석하는 건 센터의 몫이지. 그렇게 말하며 신경 끄려 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포션 메이커들이 ‘미지의 포션’을 만들어 주면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주입해야 포션이 완성되는 건데 여태껏 에스퍼에게만 가이딩해 와서 그런지 가이드들이 물건에 가이딩을 하는 걸 어려워한 것이다. 간헐적으로 성공하는 가이드들이 있다곤 하나 필요한 물량엔 한참 모자라 결국 센터는 내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이주가 지난 지금에서야 드디어 희석에 성공해 낸 것이다.
“생각보다는 빠르네. 하는 짓으로 봐선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만.”
“오늘 마지막 대금과 지원금, 보상금을 모두 입금한다고 합니다. 아, 또 한서현 팀장이 국가 차원의 지원과 그 외에도 개인적인 후원을 제안했습니다. 경호를 포함한 전반적인 후원이라고 하던데요.”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까지 쓰던 서류를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막바지에 다다른 청년 제작자 지원 사업에 제출할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지원이니 후원이니, 돈이 궁할 때야 좋지. 주기적으로 보고를 해야 하는 점도 성가셨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는 기분이라 달갑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필요 없어. 거절해.”
“네. 그럼 센터 일은 끝났고……. 레시피 판매는 어떻게 할까요? 전 동료들에게 들었는데 아직 가이딩 포션에 관해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소문이 났는지 이미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에서는 눈치채고 센터에게 레시피 거래 요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잖아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가이딩 포션은 내가 만든 작품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널리 쓰일 포션이다. 게다가 레시피 거래라 다들 혈안이 되어 달려들 텐데 나를 드러내지 않고 판매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포션 제작자지 상인이 아니라고.
“거래 사이트 이용하긴 좀 그렇지?”
“포션나라요? 으음, 거길 이용하면 익명 거래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희 정보를 포션나라에 온전히 맡겨야 하는데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10억 이하로 거래 금액 제한도 있습니다. 수수료도 크고요.”
“그럼 안 되지.”
턱을 괸 채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그럴듯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고민이 길어지자 점점 안절부절못하던 연승연이 결국 조심스레 말했다.
“……저, 호현 님. 그러고 보니 한서현 팀장이 제안했던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후원 같은 건 그냥 네 선에서 다 거절해.”
“그것이 아니라……. 레시피 판매에서 같이 움직일 생각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여기 저번에 보낸 제안서가…….”
연승연이 건네는 제안서를 받아 드니 보상금과 레시피 판매를 대신 처리하여 익명을 보장해 주는 대신 판매 순서나 기간에 개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요약하면 대가를 치르고 가이딩 포션으로 외교를 하고 싶다는 소리다.
내겐 필요 없는 것이 그쪽엔 유용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도움 줄 마음이 있어 선판매할 국가들 목록을 추천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먼저 이렇게 나와 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딱이네! 이걸 왜 지금 줘?”
“……죄송합니다.”
연승연도 그걸 알고 있을텐데 이 사실을 왜 지금 전하지 하는 의문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사라졌다.
“이건 다시 읽어 보고 내일 연락하자. 그동안 너도 고생 많았다. 승연아.”
연승연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제 이상형이요? 아하하, 부끄러운데……. 강의진이요.]
[현재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제약·바이오 주죠. 강의진과 노바리온 중심으로 지난주를 복기하고 설명 들어가겠습니다.]
[…아직 강의진은 가이딩 포션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응수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이딩 포션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죠. 전 세계의 에스퍼들에게 순차적으로 떠오르던 퀘스트, 그리고 강의진의 화려한 복귀. 이건 영화로 나와도 뻔하다고 욕먹어요.]
티브이 채널 어디를 돌려 봐도 모두 강의진 얘기뿐이다. 짜증스레 티브이를 꺼 버리자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놈들에게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아……!”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뭐.”
“사장 아저씨 강의진 질투해서 그러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소리치는 백다혜에게 허공에 딱밤을 치는 척하고는 티브이를 다시 켜며 물었다.
“누가, 내가 저놈을? 야, 꼬맹이. 저 아저씨가 잘생겼어 아님 내가 잘생겼어.”
“그야 당연히 강의진이 훨씬 더…….”
화면이 밝아지며 마침 화면에 강의진의 얼굴이 크게 비쳤다.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보던 백다혜의 입술이 채 말을 끝맺음 하지 못하고 앙 다물렸다.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에 신이 나 웃는데 벨 소리가 울리더니 진명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며 의아하게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왜 왔냐? 오늘 물건 받는 날 아니잖아.”
“네? 네? 그, 그게, 지, 지나가다가…….”
“진명아. 왔구나?”
“누나 안녕하세요…….”
백다인이 일어나 인사하자 김진명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봤다. 백다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연승연과 새로 발견된 재료집을 보는 반면 진명이는 주춤대며 슬그머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재밌는 예감에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이거 혹시……. 진명이 이 자식.’
자리에 앉던 진명이가 아직 켜진 티브이를 슬쩍 보곤 머쓱하게 말했다.
“아, 강의진 보고 계셨습니까.”
“안 봐. 끌 거야.”
툴툴댔지만 로비 내의 사람들이 흥미롭게 보고 있어 차마 끄진 못하고 강의진 얘기가 끝난 채널로 돌렸다. 소파에 둘러앉아 티브이를 보는 군식구들을 보니 어이없어 한숨이 나왔다.
‘가관이다. 가관이야.’
백씨 자매와 진명이, 연승연에 제로와 임청까지. 저 밖엔 수철이 놈이 상추에 물을 주고 있었다. 소파에 남은 자리 하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 이 중 손님은 단 한 명도 없다니. 심지어 개업 이래로 제대로 된 손님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뭐가 문제지. 내 공방은 완벽한데.’
첫 손님이 온다면 그 어떤 포션을 원하든 꼭 만들어 주리라 다짐하며 한숨을 폭 내뱉었다. 누구 염장이라도 지르듯 티브이에선 또 짭의진이 처음 정체를 드러낼 때의 자료 화면이 나왔다. 그를 보다 연승연에게 물었다.
“승연아. 넌 누가 네 소중한 걸 빼앗아 가면 어떻게 복수할 거냐?”
“제 소중한 것이요……?”
연승연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날 바라봤다. 큰 눈을 깜빡이며 날 응시하는 시선에 어서 말하라 턱을 까딱이자 연승연이 더듬대며 말을 이었다.
“전, 저는 제 소중한 거라면……. 처음부터 빼앗기지 않게 노력할 것 같아요…….”
“이미 뺏겼으면?”
“그건, 복수…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해요.”
하긴 워낙 착해서 이것저것 다 뺏길 다람쥐한테 물어본 내 잘못이다. 이참에 다 물어볼 생각에 날 돌아보는 눈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어떻게 할 거야? 내 소중한 걸 빼앗아 간 놈이 희희낙락 살고 있으면. 근데 내가 당장 나서서 뭘 하기가 힘든 상황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그냥 다시 그 소중한 것을 만들 겁니다. 이번엔 더 단단하게요.”
“아저씨 바보예요? 그럴 땐 머리를 부셔 버려야지!”
“다혜야! 죄송합니다. 음…. 제 일이 아니라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본인을 위해서라도 용서가 가장 큰 복수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진 백다혜의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꼬맹이. 알고 보니 영재인 건가.
차례로 말하다 제 차례가 오자 씨익 웃은 제로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좋은 살인 청부업자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애 듣는다.”
“사장님은 싸게 해 드리겠습니다.”
왠지 그 청부업자의 정체가 제로 본인인 것 같다는 생각은 내 기우일까.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내키지 않는 이유는 강의진이 사칭한 대상이 나여서였다. 그 이름값 탓에 함부로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
아직까진 이거다 싶은 의견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임청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임청 너는?”
임청의 서늘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단단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기대심이 들었다. 어쩌면 임청이 그 답을 줄지도 몰랐다. 임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 것을 빼앗길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응. 존나 잘났다. 부럽다.”
기대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황당함에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려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아무도 도움이 안 돼요. 아무도…….
강의진으로 나서면 태제헌이, 주호현으로 나서면 하말에 미친놈들과 센터가 내 뒤를 쫓을 텐데.
‘씨발. 내 이름 내놔…….’
축 늘어져 있던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벨이 울렸다. 이번엔 또 어떤 한가한 새낀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내 눈에 절뚝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초면의 남자가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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