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98화 (98/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98.

다리를 툭 치고 지나가는 가벼운 자극에 심장을 죄이던 무게감이 사라지며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였다.

“허억……!”

꺄르륵 아이들이 웃는 소리와 함께 까맣던 시야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화려하게 꾸며진 꽃밭, 밝은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는 사람들 뒤로는 저 멀리 놀이 기구들이 보였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자 긴장에 떨리던 몸이 빠르게 진정됐다.

“여긴 놀이공원이잖아?”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왜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까.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환상처럼 내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뭔가에 이끌려 발을 옮겼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놀이공원 중심의 넓은 호수에 다다랐다. 호숫가를 둘러 띄엄띄엄 놓인 하얀 벤치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도 그게 나란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꿈을 꾸는 건가…….’

신기한 기분으로 벤치에 다가가던 나는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이상함을 느꼈다. 마주 서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리깐 눈이며 굳은 입매, 반듯한 자세까지. 그는 내가 아니라 주호현이었다.

주호현 역시 나를 올려다봤다. 꼭 같은 생김새인데도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뭐냐. 너.”

“앉아.”

제 옆을 가리키며 말하는 놈을 빤히 바라보다 조금 떨어져 털썩 걸터앉았다.

내 옆에 주호현이 있다. 주호현의 몸에 들어와 그 이름으로 살며 궁금한 게 많았는데 누군가 지우개로 지워 버리기라도 한 듯 크고 작은 궁금증은 모두 사라져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주호현 역시 당연하게 옆자리를 권한 것치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놀이공원이라 활기찬 주위의 소음 덕에 정적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호수면에 부딪혀 반짝이는 햇살이나 구경하던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야.”

“……먼저 말해.”

별건 아닌데…….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존나 잘생겼다. 그치.”

“…….”

주호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는 새끼. 장난이라며 손을 내젓고는 신발 앞코로 땅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장난이고, 너 죽지 않았냐? 영혼이야? 아니면 내 환상?”

“……죽은 거 맞아. 정확히는 사념체지만.”

“아아.”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사념체든 영혼이든 결국 똑같은 거 아닌가. 그래서 왜 내 꿈속에 나타났냐는 건데.

답답한 마음이 들었으나 왜인지 주호현에게는 좋은 감정만 들어 말을 고르게 됐다.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런가.

“왜 내 꿈에 나왔는데? 원하는 게 뭐야?”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무슨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뭔지 알아야 들어주든지 말든지 하지.”

그 순간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주호현] : “넌 할 수 있을 것 같아. 수윤이를 지켜 줘.”

류수윤의 이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류수윤과 관련 있는 퀘스트인가? 그런데 이미 죽은 놈을 어떻게 지켜? 고민하기도 전에 또 다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으로 ‘강의진’의 대답을 출력합니다.」

「완료!」

[주호현] : “넌 할 수 있을 것 같아. 수윤이를 지켜 줘.”

►그래! 내가 지켜 줄게.

►내가 왜? 귀찮아. 씨발, 걍 성불해. 꺼져.

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 나왔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보고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굴 성격 파탄자로 아나……. 내가 언제 이랬다고.’

사실 귀찮은 마음이 더 컸으나 나를 멋대로 판단하는 시스템창에 반발심이 더 컸다. 그를 비뚤게 노려보며 주호현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지키라는 거야. 이미 죽은 놈을.”

주호현이 내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몸이 움찔했다.

“넌 이미 가지고 있어. 하말.”

“구름이? 그건 걱정할 것 없어. 퀘스트 없어도 구름인 내가 지킬 거니까.”

“고맙다. 너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면, 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

주호현의 떨리는 목소리와 결의에 찬 표정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어차피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도 미뤄진 판에 몸의 주인인 주호현 부탁을 못 들어주겠냐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내 뒤통수를 때리듯 눈앞에 뜬 것은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알리는 황금빛 시스템창이었다. 동시에 주호현과 맞잡은 내 손에서도 희미한 빛이 났다.

“네 걸 돌려줄게.”

{ 메인 퀘스트 }

#5. ZODIAC SYSTEM 수호

조건 : 성좌의 빛을 지키고 수호하라. 10개 이상의 알파성이 빛을 잃으면 실패.

*남은 성좌의 수 : ▒

*보호 중인 성좌의 수 : 2

난이도 : EX

제한 시간 : ∞

보상 : 생존

실패 시 7가지 대재앙 창궐

“뭐? 야!!”

주호현의 부탁이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의 시작이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냅다 수락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게다가 난이도에 붉게 빛나는 저 EX란 글자는 또 뭐야? 황당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엑스트라 등급이 실존하는 거였어?”

엑스트라 등급은 던전의 유적을 조사하다 고대 문자를 해석하던 학자들이 S급 위에 또 다른 등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세상에 드러난 전설 속의 등급이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어떤 위력으로 나타나는지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고 여태껏 그 어떤 스킬, 아이템, 퀘스트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었다. 증거도 없는 걸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나는 여태껏 엑스트라 급은 구라라며 헛소리로 치부했었는데!

‘진짜 있었다니……. 그렇다면 설마 내가 처음 발견한 건가?’

허상이라면 모를까, 황금빛 시스템창의 연계 퀘스트부터가 매우 희귀한 상황이라 엑스트라 등급이 나온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이라니! 전설이라는 엑스트라 등급이라니. 심장이 빠르게 뛰며 두근댔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보상이 등급에 비해 너무 하잘것없고 실패 시 따르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보상이 뭐? 생존? 새애앵존? 장난하나. 일곱 가지 대재앙은 또 뭐야?”

심지어 오류인지 뭔지 남은 성좌의 수는 계속 깜빡이며 5, 6, 7이 번갈아 떴다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시스템은 타협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모를 대재앙이라는 리스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최초로 엑스트라 급 퀘스트를 수행하는 기회를 포기한다는 게 아쉽긴 했으나 저울질할 거리는 아니었다.

반투명한 시스템창 뒤로 비치는 주호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못해.”

“…….”

내 말에 주호현이 움찔했다. 그러곤 마치 내 시스템창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봤다. 잘생긴 입술을 말아 물더니 소리 없이 작게 웅얼거렸다.

“뭐? 안 들려, 뭐라는 거야. …안, 미안? 미안하다고?”

주호현이 내 눈을 피함과 동시에 눈앞에는 발랄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퀘스트를 수락합니다.」

“뭐? 야, 내가 언제! 안 한다고……! 안 해! 퀘스트 취소! 취소!!”

「이미 수락한 퀘스트입니다.」

“씨발, 지랄하네! 취소하겠다고! 이번엔 거절 불가능도 안 써 있었잖…….”

그때 슬며시 시스템창이 움직이며 리스크 아래 작은 글자를 끼워 넣었다.

.

.

.

실패 시 7가지 대재앙 창궐

※거부 불가능

“장난하냐!!”

길길이 날뛰자 시스템창이 내 눈과 귀를 막기라도 하듯 와르르 알림창을 띄워 댔다. 그와 함께 주위가 어두워졌다. 호숫가가 사라지며 내 몸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진행에 따른 하위 퀘스트가 있습니다.」

「조건을 충족해 주세요.」

「[강의진] ⇄ [주호현] 동기화된 상태입니다. (진행률 88%)」

“성공하면 네 것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을 거야.”

사방을 울리는 주호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취소! 안 해!”

이미 나는 꿈속에서 빠져나온 이후였다. 눈을 끔뻑이다 몸이 영 묵직해 옆을 돌아보자 과하게 가까운 한서진의 얼굴이 보였다.

“핫, 씨…. 깜짝이야.”

크게 소리 지르려다 겨우 목소리를 죽였다. 한서진은 날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잠을 자다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쓰러지기 전 일이 아주 생생히 기억났다. 개싸가지 없던 한서진과 좁아터진 방, 그리고 열리지 않던 문……. 다시 생각해도 두통이 일 정도로 머리가 띵했다. 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광경은 그 방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편안하다 못해 익숙했다.

당연하다. 여긴 서울 센터 내에 있는 한서진의 집이었으니까!!

“뭐…. 뭐야! 말도 안 돼!”

내가 센터를 어떻게 튀었는데!

한서진이 깨든 말든 가슴 위에 얹힌 팔을 냅다 집어던지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 구조도, 문을 열고 나타난 복도와 계단도 한서진의 집이 맞다!

“일어났어요?”

뒤에서 들려온 한서진의 목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소리쳤다.

“야! 너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상쾌한 표정의 한서진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딴소리를 했다.

“잘 잤어요? 어젠 미안해요. 좁은 곳에 트라우마 있는 거 몰랐어. 알았으면 거기 안 뒀을 거야. 그래도 여긴 넓으니까 괜찮죠? 집에만 있으면 안전해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