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99.
“어제라고? 씨발 대체 시간이…….”
대체 그날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내가 사라져 놀랐을 연승연이나 일리미탈 부작용 치료제를 기다리는 놈들도 걱정됐고, 성산하에게 정기 보고하는 시간 역시 지났을 게 뻔했다. 잠깐 나가는 거야 말 안 해도 괜찮지만 정기 보고는 그냥 넘어가면 좆 되는데.
‘승연이에게 연락을……. 휴대폰이 어디 있지?’
주머니가 가벼운 걸 보니 머리를 맞고 습격을 당했을 때 잃어버린 듯했다. 혀를 차며 손을 털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얼핏 손금에 가려 발견하지 못할 뻔했는데 내 손바닥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꿈속에서 주호현이 잡았던 것과 똑같은 자리였다.
♊.
분명 기억 속에 있는 문양이다. 성산하와 짭의진의 대화를 엿듣고 조사했을 때 봤던……. ‘하말과 같은 성좌, 쌍둥이자리의 문양.’
순간 나와 꼭 닮은 주호현의 얼굴이 떠올라 황급히 머리를 저어 털어 냈다. 그럴 리가 없다. 주호현은 나와 다르다. 전에 봤던 기억에서도 보통의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형?”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이상했는지 의아한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나 가 봐야겠다.”
퀘스트든 문양이든 일단 나가서 고민해야겠단 생각에 한서진을 지나쳐 가려는데 곧바로 어깨를 잡혔다.
“어딜 가려고요.”
“집 가야지.”
“무슨 소리예요. 우리 집은 여긴데.”
“뭐?”
황당한 헛소리에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잡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빠져 바라보자 한서진은 내 어깨를 돌려 마주 보게 한 채 한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상처라도 난 건지 엄지가 스치는 부분이 따가워 눈을 찌푸리자 낮게 웃은 한서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형.”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초조해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나 역시 보고 싶긴 했다만…. 한서진은 나를 가이드로 보고 있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반갑다 한들 센터에 잡아 두려는 의도가 달갑진 않았다.
그래도 한서진이니까. 잘 달래서 나가면 되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에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안 그래도 말없이 떠나야 했어서 마음 불편했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네. 잘 지냈지? 그런데 서진아. 내가 빨리 돌아가 봐야 하거든? 넌 내가 일부러 도망간 것도 알고 있었다면서 여기로 데려오면 어떡하냐? 센터에 있으면 나 좆 되는 거 너도 알잖아.”
“모르겠는데.”
“모르…! 하하, 그걸 왜 몰라.”
오랜만에 본 한서진은 훨씬 더 까칠해져 있었다. 뚱한 대답에 혈압이 올라 눈을 질끈 감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든 한서진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나가서도 제 생각했어요?”
“당연하지. 존-나 많이 했어. 알면 깜짝 놀랄걸.”
“……형.”
입술을 말아 문 한서진이 돌연 다가와 날 덥썩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고개를 처박은 한서진을 차마 내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젠 기분 좀 풀렸으려나. 그럼 좀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꽉 껴안은 팔과 목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불편해 몸을 뒤척이다 말했다.
“맞다, 난 너 보기도 했는데.”
“어디서요?”
“월계나루 근처 던전에서. 헌터들이랑 시비 붙은 거 봤어.”
맞닿은 몸이 움찔하며 굳는 게 느껴졌다. 한서진이 어깨에 머리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그걸 봤다고?”
“응. 내 공방이 그쪽이잖아. 야 좀…! 간지러워. 떨어져. 마침 말도 나왔겠다, 보러 가자! 내 공방 엄청 좋아. 특별히 내가 구경시켜 줄게.”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데 성공한 나는 한서진의 손목을 잡아챘다. 문으로 가려했지만 돌덩이 같은 게 조금도 끌리지가 않았다. 돌아보자 우뚝 선 한서진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자꾸 모른 척해요. 못 나간다니까.”
갑자기 팔을 당기는 한서진 때문에 손목을 잡고 있던 나까지 훅 끌려갔다.
“제 곁에 있어요. 센터가 싫은 거라면 내 가이드만 해. 그러면 되잖아.”
입을 열기도 전에 한서진은 내게 다가와 두 팔로 끌어안았다.
“또 모른 척할까 봐 말하는데, 각인하자는 말이에요.”
“뭐……? 방금 각인이라고 했냐?”
“네. 형이랑 나랑.”
“무슨 헛소릴…….”
헛소리를 비웃어 줘야 하는데. 한서진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굳은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한서진을 밀어 냈다. 맞닿은 가슴은 떨어졌지만 허리 뒤를 감싼 손은 그대로였다.
“각인이라니. 이제 그럴 필요 없잖아. 가이딩 포션도 있고…….”
“여기서 포션이 왜 나와. 난 형 가이딩이 필요한 건데. 가이딩 포션보다 형 가이딩이 좋아요.”
“웃기네. 거기 들어간 것도 어차피 내 가이딩……. 맞다! 너 그때 내 포션 보고 쓰레기라고 했지? 어, 먹지 마. 평생 먹지 마. 인마.”
“그땐 그 새… 그 사람이 형 가지고 장난치는 줄 알고 그런 거고. 원승원인가 원숭이인가.”
“연승연.”
“지금까지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낸 거예요? 그 새끼가 가이딩 포션 만들자고 꼬드겨서 같이 센터 나간 거야?”
번뜩이는 한서진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시선을 내렸다. 아직까지 허리를 두른 손을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이걸 발로 차, 말아.
“놔라.”
“가이딩 부족해져서 그래요.”
“지랄. 네가 가이딩 부족해질 일이 뭐 있다고.”
켕기는 것만 없어도 한 대는 꼭 때려 줬을 텐데. 한서진의 손을 힘주어 떼 내며 말했다.
“장난은 이쯤 하자.”
“……장난이라고? 형은 제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요?”
또 삐딱해지는 표정과 말투에 미간을 좁히는데 허탈한 웃음을 흘린 한서진이 나를 노려봤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든가. 그런데 형은 센터 못 나가요. 이 집 나가는 즉시 다시 신원 부활시키고 가이드 계약 맺게 될 거야.”
틈 없이 닫힌 눈빛을 마주하자 알 수 있었다. 이게 한서진의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 통할 거라 여긴 것도 내 착각일 뿐이었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요. 각인하자고.”
“……한서진. 난 가이드로 살 생각 없어. 그게 센터 가이드든 네 가이드든 마찬가지야. 왜 나 같은 하급한테 각인해 달라고 조르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야 당연히 …이니까!”
“메에에!”
동시에 들려온 양 울음소리 탓에 한서진의 목소리가 묻혀 ‘당연히 메-니까!’라고 들렸다. 구름이가 또 말을 안 듣고 나왔구나 싶어 곤란한 눈으로 발밑을 봤다. 그러나 구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없는데?’
하지만 구름이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쉬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다. 분명 이 방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메에…. 미에에에. 메에에에!!”
“뭐야, 어딨는 거야?”
“하아…….”
머리를 짚은 한서진이 깊은 한숨을 내뱉고 방 한쪽으로 향했다. 구석에 수상하게 얹어진 천을 걷자 기둥에 묶인 구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구름이의 배에는 거의 제 몸만 한 푸른색 구속구가 매여 있었다. 상급 몬스터를 제압할 때나 쓰는 거대한 구속구였다.
“구름아!”
“메에에에!”
당장 달려가 무릎을 꿇고 구름이를 들어 안았다. 구속구에 연결된 사슬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항상 당당하고 귀엽던 모습은 어디 가고 구름이는 그저 애처로운 눈망울을 끔뻑이며 가늘게 울고 있었다.
“씨발! 이 잔악무도한 새끼! 애 몸에 이런 걸 묶어 놔?”
“애…? 하, 제가 그 괴물 제압하느라 포션을 몇 개나 마셨는지 알고 하는 말이에요?”
“괴물이라니, 구름아 듣지 마.”
“메에에!”
구름이의 귀를 막아 주자 구름이가 울며 한서진을 흘겼다. 한서진이 가증스럽단 눈으로 구름이를 쳐다봤다.
“작은 걸로는 제어가 안 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대체 뭘 달고 다니는 거예요. 소환수? 아이템?”
“넌 몰라도 돼. 절대 말해 줄 생각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요. 연구소에 넘기기 전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야! 잠깐…!”
한서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한서진을 말리려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저 바짓자락을 잡아 날 보게 할 생각이었는데 손에 잡힌 것은 바지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순식간에 터질 듯 얼굴이 붉어진 한서진이 뒤로 크게 한 발 물러났다.
“……놔요. 어, 어딜 만지는….”
“엇, 어…. 미안. 야. 당황해서. 미안하다.”
잠시 찾아온 민망한 공기는 다행히 구름이 덕에 사라졌다. 아래서 울어 대는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양이 있을 발목을 가져다 댔다.
“구름아 들어와.”
“메에에.”
제멋대로 드나들던 때와 달리 구름이는 고개를 저으며 발로 툭툭 쇠사슬을 건드렸다.
“왜, 못 들어오겠어? 이거 때문에 그래? 한서진! 이것 좀 풀으라고!”
거리를 벌린 그대로 팔짱 낀 채 지켜보던 한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바보예요? 그게 뭔 줄 알고 풀어 줘요. 도망갈 게 뻔한데.”
한서진이 나가면 구름이에게 무슨 수 없냐고 슬쩍 물어볼 생각이긴 해서 조금 찔리긴 했다.
‘구름이는 그냥 귀엽고 힘없는 성좌일 뿐인데 경계하기는……. 잠깐, 설마.’
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퀘스트창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창의 ‘보호 중인 성좌의 수’가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어 있었다! 다른 하나가 뭔진 몰라도 구름이가 묶여서 그런 게 확실했다. 퀘스트창 하단에 실패 시 7가지 대재앙 창궐이라는 문장이 위험하게 빛났다.
“오후에 몬스터부 직원 오기로 했어요. 그편에 그거 들려 보낼 거야.”
한 발 앞으로 다가온 대재앙의 존재감에 사색이 되어 구름이를 껴안았다.
“안돼! 취소해! 도망 안 가, 안 갈 테니까! 그러니까 구름이부터 풀어 줘.”
“여기 있겠다고요?”
“씨발, 있을 수밖에 없는 거 알잖아!”
구름이를 안고 소리치는 내 모습에 살짝 입을 벌린 한서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일단 그 반지부터 빼요. 잘라 버릴까 하다 참았어요.”
“뭘, 뭘 잘라. 씨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겁을 먹어요. 내가 손가락이라도 자를까 봐?”
한서진은 어서 빼라며 손을 까딱였다. 이를 부득 악물고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 내던졌다. 단번에 낚아챈 한서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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