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02.
누굴 안아 달래는 능력은 없는데. 어색한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어깨의 떨림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는데 내내 민망해하던 박무일의 표정이 변했다. 혼자 뭔가를 느낀 듯이 놀라 한서진을 바라봤다.
“한서진 너…….”
잠시 놀랐다 서서히 얼굴을 굳히는 게 심상치 않아 고개를 갸웃했지만 박무일의 시선은 오롯이 한서진에게만 향해 있어 물어볼 틈이 없었다. 박무일이 경악해 물었다.
“너 설마 지금까지 누르고 있었냐? 형 죽은 이후로 계속?”
“…….”
“이 미친 새끼야!”
“왜, 뭔데.”
의아하게 묻자 내게 안겨 있던 한서진이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눈가가 온통 붉어진 한서진이 나를 빤히 보다 툭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긴!! 씨…. 형님! 저 새끼 이능으로…….”
“형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서릿발 같은 경고에 결국 박무일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니 더 궁금해져 내가 다시 물으려 했으나 영리하게도 말을 돌리는 한서진에 휩쓸려 어느새 소파에 다시 앉혀졌다.
“그보다는 공방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정말 지금 돌아갈 거예요?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적어도 노바리온 조사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공방 사람들은 따로 사람 보내서 보호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포션 만든 게 형이라면 더 위험한 거잖아. 나 그런 곳에 형 혼자 못 보내요.”
“형님. 그런데 정말, 정말 가이딩 포션을 형님이 만드신 겁니까? 아무도 만들지 못했던, 강의진도 실패한 포션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포션 만드는 스킬은 그럼 감추고 계셨던 겁니까?”
입이 간질간질했는지 참지 못하고 끼어든 박무일이 줄줄 물어 댔다. 강의진이 실패했다는 말에 열이 확 올랐으나 박무일은 가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이도 저도 못한 채 부루퉁하게 답했다.
“몇 번을 물어봐. 전에 던전에서 각성했어. 잘 기억 안 나.”
“호, 혹시 스킬 등급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되겠냐? 이게 남의 밑천을 파먹으려고 하네. 그보다 나 하던 일 있어서 빨리 가 봐야 해. 못 미더운 보호자들과 시한폭탄 같은 환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어떤 환자요?”
“있어, 가짜 일리미탈 먹고 부작용 난 사람들.”
그다지 숨길 것도 아니라 생각해 서슴없이 뱉은 답에 한서진과 박무일이 침묵했다. 미간을 좁힌 한서진 대신 박무일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이…. 형님…….”
“왜 또.”
“그거 강의진 포션 부작용이잖습니까……. 가이딩 포션만으로도 형님을 슥삭하려는 놈인데 부작용까지 대신 치료한다고 돌아다니시면 더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잖아. 손님 주문인데.”
가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미적거리는 둘의 모습이 답답해 소리쳤다.
“뭐가 문제야? 가이딩 포션은 센터에서 먼저 발표해. 강의진 아니고 익명의 포션 메이커라고. 그럼 뺏을 생각 못하겠지. 게다가 일리미탈은 노바리온이 엮인 일도 아니야. 녹스 잘못이라고. 돌아가서 노바리온만 조심하면 되는 거잖아.”
“형님,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놈들은…….”
“배후에 사이비가 있어요.”
머뭇대는 박무일 대신 한서진이 답했다. 전혀 예상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사이비라니?”
“노바리온은 놈들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배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전국 각지에 지부가 있을뿐더러 그 신도들도 수십만이야.”
“게다가 정체를 숨기고 이곳저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길드나 협회는 물론이고 센터에서까지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오는데……. 그중 형님이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성우?”
박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성우 존나 이상한 새끼 맞다니까? 설마 사이비일 줄이야.
“강의진이랑 노바리온도 사이비일 거라는 말이지.”
“네. 녹스에 충성하던 강의진이 갑자기 잠적했다가 노바리온 소속으로 나타난 것도 설명이 돼요.”
“맞습니다. 아마 녹스에 녹아 있던 사이비한테 세뇌당해 넘어간 거겠죠.”
헛다리를 단단히 짚긴 했다만,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닥에 떨어진 내 이름을 생각하자 속이 갑갑해 손으로 얼굴을 쓸며 한숨을 뱉었다. 깊은 탄식에 한서진이 위로하듯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 공방에 드나드는 사람 중 사이비가 없으리란 생각도 하지 않아요. 직원이나 손님, 그 누구라도 사이비가 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거기 형을 어떻게 보내.”
“이건 극비인데, 외국에서도 비슷한 성향의 단체를 다수 발견했습니다. 아직 조사가 미흡하지만 놈들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사이비라는 겁니다. 목적이 뭔지라도 알면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할 텐데…….”
“여러 팀들이 던전이나 센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조사 중이지만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사이비라는 걸 아는 건 우리 팀뿐이에요. 현재는 여기가 제일 안전하니까 조금만 더 있어요. 형은 이미 타깃이 되었잖아. 놈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대비라도 하니까 적어도 놈들의 목적이 뭔지 알아낼 때까지만.”
“목적이라고…….”
구름이를 노리던 예성우와 짭의진. 모두 같은 사이비라면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성좌의 빛을 수호하라는 내 퀘스트로 보아 사이비는 특정한 각성자들을 죽여 별의 빛을 잃게 하는 게 목적이겠지. 그런데 성좌를 지키라는 내 퀘스트와 정확히 같은 방향의 행동을 하던 성산하는 지금 짭의진이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낚인 상태다.
내 앞에 앉은 한서진과 박무일을 바라봤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성산하도 센터 측의 입장이라면 무시하지 않을 테고, 짭의진이 사이비며 믿을 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텐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한서진에게 성좌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 그렇잖아도 바깥이 위험하다고 경계하는 한서진이 하말과 카스토르를 내가 보호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호시탐탐 날 잡아 놓으려 하는 한서진과 짭의진에게 낚인 멍청한 성산하. 어떤 쪽이 더 위험할지 둘의 무게를 재 봤다. 몇 번을 고민해 봐도 내가 한서진에게 잡히는 상황 보다는 대재앙 창궐 쪽이 더 위험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실 짐작 가는 게 있어.”
교묘하게 내가 데리고 있는 구름이가 하말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성좌에 대해 말하자, 박무일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듯 얼떨떨한 얼굴인 반면 한서진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서 그때 하말이라고…… 카스토르도 성좌예요?”
“……내 기억 또 읽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첫날 단편적으로 내 기억을 읽은 덕에 한서진을 설득하는 것은 수월했다. 일단 공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자마자 나는 휴대폰과 반지를 돌려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서진이 선뜻 내어놓은 휴대폰은 방전되어 있었고 심지어 반지 얘기는 못 들은 척 모르쇠 했다.
그게 없으면 사람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게 돼서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서진에게 결국 너와 나 모두가 힘들고 위험하게 될 거라고 달변하자 한서진이 어쩔 수 없이 반지를 가져왔다.
“근데 이 반지 누가 준 거예요?”
한서진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성산하의 이름을 댔다. 한서진은 듣자마자 표정을 구기며 반지를 건네려던 손을 꽉 쥐었다.
“천랑 길드장이……. 형한테 왜 반지를 줘요? 형은 그걸 왜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는 건데?”
“몰라. 거기밖에 안 들어가던데? 그냥 아이템이잖아.”
“……이건 안 되겠어요. 사람들 오해할 거 아니야.”
“뭐? 야…! 무슨 오해!!”
급히 손을 뻗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무일 때문에 상황이 흐지부지됐다.
“저는 준비 끝났습니다. 비행기 시간 맞추려면 지금 출발해야……! 어, 다음 비행기로 미룰까?”
“아니! 지금 출발해!”
***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도 되는데.”
이미 센터 공항이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우스웠다. 안전벨트를 풀어내며 투덜댔다.
“반지나 줘, 인마. 누가 내 얼굴 보면 어떡해?”
“이미 가는 길 통제해 뒀어요. 볼 사람 없어.”
“버린 거 아니지? 그거 S급 아이템이라고.”
“버렸으면 뭐. 다른 S급 구해다 줄 테니까 미련 갖지 마요.”
쾅 문을 닫고 내리는 한서진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레이븐 팀에 속해 있을 때는 헬기나 전투기를 이용했기에 센터 공항에 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멀리 입구 쪽을 보면 유동 인구가 적은 것 같진 않던데 길을 통제해 뒀다는 한서진의 말이 진짜인지 우리가 가는 길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통제 구역이나 일반인 출입 금지 등이 적힌 문을 몇 개 지나자 어느새 나는 비행기에 올라타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들을 보자 문양 안에 잠잠히 숨어 있을 구름이가 생각났다.
‘어쩌냐. 구름아. 한서진도 자주 볼 것 같은데.’
벌써부터 구름이의 짜증스러운 울음소리가 귀에 맴도는 듯해 웃음이 지어졌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자 한서진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짜증 나요.”
“왜.”
한서진은 답 없이 홱 고개를 돌렸다. 싱거운 새끼.
가면 윤하얀의 상태부터 점검해야겠다. 환자들 마나 포션 수급량도 알아봐야 하고, 혹시 부족하면 승연이에겐 마나 포션 먼저 만들라고……. 공방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 비행기인데도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외양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멍하니 입을 벌리는데 반듯한 미간이 좁혀졌다.
“속 타게 하는 데는 선수지.”
“성산하?”
“멍멍아.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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