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04.
한서진을 보는 연승연의 얼굴에 충격이 가득했다. 온몸이 얼어붙어 입만 뻐끔대는 모습이 마치 포식자를 마주쳐 겁먹은 소동물처럼 느껴져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원승원 아니라 연승연이라니까. 둘은 구면이지?”
연승연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고 한서진은 연승연과 닿았던 장갑을 툭툭 털었다. 흔들리는 커다란 눈망울이 날 향했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어, 어째서 호현 님과 함께 온 건가요?”
“그게 말이지….”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센터 연구원이 왜 남의 가이드…….”
“한서진!”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이 자식이? 손을 들어 한서진의 입을 급히 막았다. 왜 그러냐는 태연한 표정에 머리가 아파 왔다. 에스퍼들을 로비에 풀어놔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 둘 다 올라가, 올라가.”
박무일을 일으키고 한서진의 등을 떠미는데 뒤에서 연승연이 내 옷깃을 잡았다. 돌아보자 연승연이 우물쭈물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현 님. 잠시 따로 얘기 좀 하고 싶습니다. 저희 작업실로 가서…….”
“어? 뭐, 그래. 서진아 둘이 먼저 올라가 있어. 사무실은 2층 세 번째 방이야.”
내키지 않는 낯의 한서진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기다릴게요.”
둘을 보낸 후 나는 연승연과 지하로 내려갔다. 두꺼운 작업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승연이 다급히 물었다.
“그,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몸은 괜찮으세요? 혹시 센터에 가이딩 포션 제작자가 호현 님이라는 사실을 걸린 건가요? 역시 가이딩 포션을 직접 거래하는 건 위험했습니다!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센터가 호현 님을…….”
“승연아, 승연아!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 괜찮아.”
내 생각보다 충격이 컸는지 패닉에 빠져 소리치는 연승연을 붙잡아 겨우 의자에 앉혔다. 연승연에게 알려도 되는 것들이 많지 않아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나 혼자 나갔다가 문제가 조금 생겼어. 그때 우연히 한서진을 마주쳐 도움을 받았고.”
“한서진 에스퍼가 호현 님을 도왔다고요? 대체 어떤 문제였길래….”
“지금 말하긴 힘들어.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한서진은 센터에 신고하지 않을 거야. 그건 믿어도 돼.”
내 말에도 연승연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노바리온이나 성좌에 관해 전혀 듣지 못한 연승연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시원하게 말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더군다나 울적한 다람쥐의 표정을 보니까 괜히 마음도 꺼림칙한 게….
‘승연아.’ 하고 부르자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연승연이 고개를 푹 떨궜다. 주먹을 꼭 쥔 연승연에게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는, 저는 그냥…… 싫어요.”
“뭐라고?”
“호현 님과 저의 공방이잖아요, 한서진 에스퍼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젠 호현 님과 아무 사이도 아닌데. 또 찾아와서…….”
“……둘이 나 모르게 싸웠냐? 하긴 서진이가 유독 네 이름을 헷갈려 했….”
“그런 게 아닙니다!”
돌연 고개를 쳐들고 소리치는 연승연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자 연승연은 도리어 제가 더 당황해 허둥지둥하더니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이건……. 죄송합니다. 호현 님.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승연아. 너 괜찮아?”
“괜찮습, 아니요. 조,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호현 님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여기 조금 더 있다가 올라가겠습니다!”
“굳이 그럴 거 있어? 피곤하면 쉬어야지. 같이 올라가자.”
“아닙니다! 캠프에 보낼 마나 포션도 만들어야 하고, 호현 님 안 계신 동안 작업실이 온통 엉망이라 그것도 정리해야 하고……. 저는 포션 만드는 게 쉬는 겁니다!”
횡설수설하며 작업실을 들쑤시는 연승연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깨끗하기만 한데, 뭘 치운다는 거지? 어쨌거나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조수가 있다니. 그저 뿌듯한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작업실에서 나온 나는 한서진과 박무일이 기다리고 있을 사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1층에서 수철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사장님. 휴대폰이 켜지자마자 계속 전화가 와서요. 아무래도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수철이 내민 것은 카운터에 충전 중이던 내 휴대폰이었다. 수철이가 왠지 졸아 있다 싶더라니 역시나 화면에 떠 있는 건 성산하의 이름이었다. 수신을 눌러 전화를 받으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응.”
[목소리 한번 듣기가 힘들어. 응?]
“휴대폰이 방전되어 있다가 지금 켜졌어. 일부러 보고 안 한 거 아니야.”
사실 성산하 보고를 씹었다가 곧바로 습격을 당한 전적이 있었기에 조금 찔려서 우다다 말을 뱉어내자 반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짜야. 지금도 어디 안 가고 공방임.”
[알아. 위치 뜨거든.]
“뭐? ……야, 너 설마 내 폰에 추적기 달아 놨냐?”
[활성화는 며칠 전에 했으니 봐주지? 혹시 모를 일 대비였어.]
“그런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었잖아!”
[그럼 죽어도 안 썼을 거면서 말은 잘하지.]
딱히 틀리진 않는 말이라 할 말을 잃었다.
‘전화만 끝나 봐라. 이것도 당장 바꿔야지.’
애초에 성산하가 준 휴대폰을 의심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투덜대며 방문을 닫고 들어와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 떨거지들은 누구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박무일 헌터와 그 외 한 명, 둘 다 특수부대 소속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한 명은 센터에서 같은 팀이었던 애야.”
[납치당했다가 함께 돌아오다니.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생긴 건가?]
“그게 뭔데?”
[…….]
말을 잃은 성산하가 침묵했다. 스토…뭐? 한서진이 내 뒷조사를 하긴 했는데, 스토킹을 말하는 건가? 콧잔등을 긁적이다 말했다.
“그나저나 공방으론 못 와? 서진이랑 셋이서 할 말이 있어.”
[셋이서 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럼 넷이 하게 빨리 와. 무일이 놈도 있을 때 다 같이 하면 되겠네.”
[하, ……정말 무슨 말을 못 하겠군.]
반대편에서 웃음기 섞인 한숨이 흘러왔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라 휴대폰을 떼 내고 귀를 터는데 성산하가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답했다.
[우리 강아지가 이렇게 부르는데.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양쪽에서 형을 괴롭혀 대서 공방에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형은 개뿔…. 근데 양쪽이라니? 짜…. 강의진 말하는 거야?”
[궁금해?]
“응!”
혹시 짭의진과 관계 있을까 싶어 몸을 세워 앉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성산하의 답을 기다렸지만 놈은 웃기만 하고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쳐 웃는 소리에 부아가 치밀어 결국 휴대폰을 잡고 소리쳤다.
“멍청아 빨리 오기나 해! 지금 성좌들이 위험하다고!”
[……성좌라고? 호현아, 방금 뭐라고 했어?]
순식간에 장난기가 사라져 딱딱해진 목소리에 움찔했다. 이런 식으로 전화로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는 수 없었다. 바쁘다고 며칠 오지 않는 사이 또 짭의진에게 낚이거나 하면 안 되니까.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노바리온 존나 수상한 회사라고. 센터에서도 따로 거길 조사 중이라고 했어. 그런데 전에도 하말을 노리던 놈이…….”
센터는 사이비를 쫓고 천랑은 성좌를 조사 중이다. 두 단체가 얽힌 사건을 나 혼자 전화로만 전하려니 정리가 되질 않아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한서진이라면 모를까, 내가 센터에서 들었던 내용을 천랑 길드장에게 모두 전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들었고.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퍽 치고는 하려던 말을 모두 주워 삼켰다.
“그냥 공방으로 와서 얘기해.”
[……기다려. 내일 바로 가지.]
***
내일 성산하가 온다는 소리를 들은 한서진과 박무일은 오늘 공방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그들에게 방을 내어 주고 나니 소식을 들은 김진명과 백다인, 백다혜 자매가 찾아왔다. 날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린 백다혜를 달래고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자 어느새 밤이었다.
하급 마나 포션 99개를 만들어 내고 반쯤 실신해 버린 연승연을 들어 안아 제 방 침대에 누이고 윤하얀과는 다시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 몇 가지 검사와 실험을 반복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누나도 잘 자.”
뒷정리를 마치고 나온 나는 어둡고 적막한 로비를 돌아봤다. 며칠 떨어져 있어 그런지 더 애정이 깊어져 하나하나가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손님만 많으면 완벽한데.
기지개를 피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내일 짜증 나고 빡치는 일이 적게는 한두 번, 많게는 쉴 새 없이 생길 게 분명했다. 삼자, 아니 사자 대면을 위해선 피로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한 후 숙면을 취할 계획이었다.
목욕을 마친 후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왔다. 특별 주문한 호텔의 폭신한 침구를 기대하며 고개를 든 나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영을 보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네가 왜 여기 누워 있냐?”
아주 자연스럽게 내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한서진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같이 자야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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