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05.
“뭐? 좁게 뭐 하러. 넓은 방 줬잖아.”
그쪽 방이 더 넓고 침대도 편하게 혼자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내 방으로 온 거지.
‘설마 손님 방보다 내 침대가 더 고급인 거 알아챘나?’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서진이 제 옆에 누우라는 듯 남은 자리를 두드렸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안돼. 같이 못 자.”
“왜요?”
“같이 자야 할 이유가 없잖아.”
“없긴 왜 없어. 형은 내 가이드잖아요.”
“이제는 아닌데?”
잘생긴 얼굴에 짙은 서운함이 드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서진이 내게 다가오며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그래요? 이젠 아니라고.”
“내가…. 야, 서진아……?”
“제게 가이드는 형뿐이에요. 센터를 나온 건 형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어서지 형을 포기해서가 아니에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서진의 진지한 눈을 보며 입만 뻐끔대다 겨우 목소리를 냈다.
“가이딩 포션 만들어 줬잖아.”
“고마워요. 포션 덕에 등급과 관계없이 형이랑 각인할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잖아.”
또 각인 타령이다. 각인에 대해 아주 잘 알진 못해도 그게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서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한서진의 부탁을 들어줄 순 없다. 여지없는 결론에 마음을 단호하게 먹는데 내 손을 가져간 한서진이 아무것도 없이 빈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대며 투덜댔다.
“항상 함께 잤는데 뭐가 문제예요. 당장 어제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잤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요. 겨우 오늘 하루 더할 뿐이잖아.”
“그건 그렇……. 아니야.”
잠깐이나마 홀려서 낚일 뻔했다. 황급히 잡힌 손을 빼냈다.
물론 숙소에서 함께 지낼 땐 같이 자긴 했다. 그래서 한서진의 입장에서 갑작스러울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여긴 센터가 아니라 내 공방이다. 나 역시 가이드가 아니라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고! 가이드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못하는데 한서진이랑 함께 잔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심지어 지금은 공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역대급으로 많다. 가이드인 걸 아는 승연이나 성산하를 빼고도 제로와 청이, 수철과 윤하얀 가족들에 백다인, 백다혜. 거기에 가끔 오는 이초나 송아 누나, 진명이까지.
‘모두 다 내가 게이인 줄 알 거 아니야!’
물론 주호현은 류수윤과 연인 사이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쓸데없는 오해는 사절이다. 생각할수록 파국인 상황에 단호하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안 돼. 여긴 센터도 아니고 내가 가이드였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도 안 되잖아. 네 방 가서 자.”
“역시 ……게 아니었어.”
“뭐라고?”
싸늘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 한서진이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그럼 자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그건 되죠?”
“뭐, 그 정도야 안 될 건 없지.”
“어서 누워요. 벌써 한 시네. 포션 만든다고 매번 이렇게 늦게 잤어요?”
“네가 빨리 갔으면 더 일찍 잤을 거거든.”
한서진이 방금 전까지 제가 누워 있던 자리의 이불을 들추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불을 든 한서진의 팔 아래를 허리 숙여 지나 펼쳐진 자리로 들어가자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한서진의 미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잘 자요.”
“응. 너도 빨리 가라.”
“형이 빨리 자야 빨리 가죠.”
“고집 세기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
사자대면이 골치 아프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말했던 대로 성산하는 날이 밝자마자 이초를 대동하고 공방으로 찾아왔다. 문이 열리며 보이는 그의 모습에 로비 내의 모두가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게 오늘따라 성산하의 차림새가 유독 더 화려하고 빛이 났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평범한 옷을 입던 평소와는 달리 검은색 양복에 고급스러운 케이프까지 두른 모습이 어색해 내가 알던 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둘러보다 나를 찾은 성산하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
“……너 어디 가냐?”
황당하게 보다 겨우 입을 떼자 뒤늦게 밖으로 나온 한서진과 박무일이 있는 2층을 흘깃 올려다본 성산하가 눈을 휘며 속삭였다.
“글쎄. 견제 정도로 해 둘까. 어때, 마음에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곤 성산하의 몸을 훑었다. 뭐, 이렇게 보니 새롭고 잘생기기야 했다만. 또 굉장히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웃음기 가득한 눈꼬리에 괜히 배가 아파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 싫어 홱 등을 돌렸다.
“…잘 어울리긴 하네. 시간 없다며? 빨리 올라가자.”
성산하의 실물을 처음 봐 넋 나가 있는 정혁과 하얀, 하정의 시선을 뒤로한 채 함께 2층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다과를 놓아 준 수철이가 나가고 사무실 문이 완전히 닫혔다. 상석에 앉아 앞을 바라봤다. 왼쪽엔 한서진과 박무일, 오른쪽엔 성산하와 이초가 자리했다. 평소 비어 있던 사무실이 왜 이리 꽉 차 보이는지. 다리를 꼰 채 차 맛을 보던 성산하가 혼잣말인 척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대화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사안을 아무나랑 공유하긴 힘든데. 협회장 정도면 모를까…….”
명백한 조롱에 한서진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이 일의 책임자는 저입니다. 게다가 그쪽보다는 제가 경력 긴 걸로 알고 있는데.”
“어린애랑 얘기할 생각 없으니 그쪽 상급자 데려와.”
“얼마나 차이 난다고 유세야.”
날 선 둘의 대화에 박무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고 이초는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서진과 성산하는 입을 놀리는 걸 멈추질 않았다.
“어린 거 알면 손 떼지 그러시죠? 의도가 더럽고 불순해서 참아주기가 힘듭니다만. 듣자하니 몰래 센터까지 들어와 수작 부렸던데.”
“세간에선 그걸 초청이라고 하더군. 말도 안 되는 떼쓰고 있는 게 누군지부터 알아보는 걸 추천하지.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고 모두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애초에 넌 취향이 아니야.”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좋아하는 게 뭔진 내가 더 잘 알아.”
“과연 그럴까?”
이상한 데로 빠진 대화에 결국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둘이 뭐 하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무례하잖아요.”
“건방지잖아.”
“장난하냐? 여기 노바리온 문제로 협력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럴 생각 없으면 둘 다 나가.”
내 질책에 한서진은 입을 꾹 다물고 홱 고개를 돌렸고 성산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숨을 쉬며 팔걸이에 몸을 기댄 나는 성산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센터에서 노바리온을 조사 중이었어. 내가 말 했잖아. 존나 수상한 곳이라고 거기. 근데 네가 성좌를 지킨다는 짜, 강의진 말에 홀라당 낚여서……!”
“난 호현이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건지가 더 궁금한걸.”
“……우리 호텔에서. 너 강의진이랑 얘기하러 간 거 들었어.”
“내 뒤를 미행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무슨 호텔?”
추궁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한서진이 끼어들어 물었다. 성산하는 그를 못 들은 체하며 손을 뻗어 내 팔목을 쥐었다. 그러곤 다정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고 있는 줄 알고 잠시 나간 건데. 그날 고생해서 피곤했잖아.”
“많이 자서 괜찮았어.”
“나 올 때까지 쉬면서 기다리지. 돌아오면 다시 할 일이 많았는데.”
“형, 무슨 소린데요.”
“어? 별거 아니야.”
“주호현!”
참지 못하고 소리치는 한서진을 박무일이 잡아 말렸다. 그를 어이없게 바라봤다.
정말 별거 아니라 그런 건데. 홍보식을 보러 갔다가 와인을 많이 마시고 잠들어 버려 밤에 잠이 안 왔는데 마침 강의진이 성산하를 찾아와 나는 그걸 미행했다는 말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다른 불편한 곳이 있는가 싶어 한서진의 팔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네. 누구 때문에요.”
‘지금 이 새끼 나한테 짜증 내는 건가?’
차가운 답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박무일의 속삭임에 겨우 분기를 가라앉힌 한서진이 전보다 더욱 삐딱한 태도로 성산하를 노려봤다.
“센터는 사이비를 조사 중입니다.”
“사이비라니? 노바리온이 종교에 관련되었단 말인가?”
성산하의 중얼거림에 한서진이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봐도 싸가지 없는 태도라 성산하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쪽은 더 가관이었다. 성산하는 존나 재수 없는 웃음을 지은 채였다! 성산하는 적선하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주제에 노력했군. 센터치곤 대견한 일이야.”
“하, 무슨……!”
“하지만 한참 부족해. 센터는 그들의 목적에 대해선 조금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굳이 그쪽과 손을 잡아서 얻을 이득이 뭔지 모르겠군.”
“그건 이쪽에서 해 줄 말입니다. 실체도 모르면서 허상만 쫓는 꼴이라니, 우습지도 않네요. 심지어 지금은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고……. 천랑의 명성도 이젠 옛말인가 보죠. 리더를 잘못 들여서 그런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음모가 엮인 일이야. 그렇게 단편적으로 접근해서는 평생 알아낼 수 없을 텐데.”
“실제하는 적에 대해선 천랑보단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카스토르나 하말 같은 성좌 역시도.”
한서진의 마지막 말에 성산하의 시선이 가만히 내게 향했다.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말한 거 아니야! 한서진이 읽은 거라고. 별거 없어. 그냥 이름 정도만……. 그보다, 둘이 싸우러 왔냐?”
성산하가 전결서약을 걸고 넘어질까 봐 황급히 말을 돌렸다.
“힘을 합쳐서 하루라도 빨리 잡아도 모자란데 왜 자꾸 자기네가 잘났다고 잘난 척이야.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
안달복달하는 내 모습을 뭐라고 이해한 건지 한서진이 내 왼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이비는 센터가 쫓고 있으니까 형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제가 지켜 줄게요.”
한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빈손마저 잡히며 오른쪽으로 몸이 끌려갔다.
“다신 네가 원치 않는 곳에 끌려가는 일 없게 해 줄게. 이번 일만 해결되면 약속했던 여행도 가자. 우리.”
“씨발, 그게 아니라!”
양손을 붙잡힌 채 차마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겨우 삼켜 냈다.
‘이 새끼들아. 내 퀘스트 때문에 그런다.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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