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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09화 (109/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09.

성산하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목에 느껴지는 숨결과 이리저리 부딪히는 코끝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달밤에 무슨 헛소리야. 너 미쳤냐?”

“외국 가 보고 싶다며, 같이 가자. 그럼 나도 일찍 돌아올 필요 없잖아. 궁금했던 곳 모두 데려가고 보고 싶은 거 다 보여 줄게.”

“내 공방 놔두고 어딜 가. ……뭐, 휴가라면 모를까.”

황당히 대답하다 조금 구미가 당겨 슬쩍 덧붙이자 쿡쿡 웃던 성산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나 둥글게 휘어진 눈매,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린 얼굴이었지만 그 안의 옅은 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 흐릿한 시선 뒤에 비친 이질적인 감정에 아차 싶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인지도 뒤늦게 다가왔다.

맞다, 성산하는 79% 확률의 게이인데. 당장 밀쳐 내야 했지만 당황해서 몸이 삐걱거렸다.

“좀 놔, 봐. 뭐 하는데.”

“천랑으로 들어 오는 건?”

“싫어! 너만 길드장인 줄 아나 본데, 나도 사장이야. 네 밑으로 들어갈 것 같냐?”

“큽, ……그래. 사장이지.”

“이제부터 사장님이라고 불러.”

“그래. 사장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

퉁명스레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빤히 쳐다보던 성산하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기억 상실이라고 했지. 어릴 적 기억도 나지 않는 건가.”

“갑자기 그건 왜?”

“입양되었던 기억이 있나 궁금해서.”

“누가, 내가?”

이 타이밍에 갑자기 입양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설마 아직도 강의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 아니겠지?’

한동안은 이런 걱정하지 않았는데. 이젠 성산하가 짭의진에게 애초에 속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어쨌거나 주호현은 멀쩡하게 부모님과 함께 자란 평범한 놈이다. 시스템의 환영에서 분명히 본 적 있으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아무리 기억 상실이래도 다 잊은 건 아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 얘기는 이쯤 하고, 성산하. 손 좀 줘 봐.”

화제를 전환할 겸 말을 돌렸다. 일리미탈 건도 끝나 한가하겠다, 마침 보기 힘든 성산하도 만난 참에 던전에서 봤던 장갑 아래의 손에 대해 알아봐야지. 이제는 S급 스킬인 의신의 손길이 있으니 전보다 상태를 정확히 읽을 수 있을 거다.

아직도 붙어 있는 놈의 돌덩이 같은 팔을 짜증스레 밀치고 나서야 성산하는 순순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갑자기 손은 왜?”

“다른 건 아니고, 그때 다친 거 봤잖아. 상태 좀 확인하게.”

손을 까딱이며 말하자 성산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게 어딨냐?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못 믿어. 그러니까 순순히 손 내놔라.”

“고집 세긴…, 소용없다니까.”

“설령 그렇대도 다른 대응책이 있을 수도 있잖아. 평생 독 먹고 버틸 것도 아니고……. 빨리 손 줘. 밤마다 생각나서 미치겠다고.”

썩어 가던 손을 못 봤다면 모를까 내가 아는 이상 가만히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팔짱 낀 채 단호히 말하자 웃음이 터진 성산하가 망설이듯 가만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하아, 정말 너…….”

성산하가 한쪽 손을 들어 내 왼쪽 볼을 감쌌다. 눈 아래며 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장갑의 감촉에 움찔 눈을 찌푸리는데 성산하는 무언가 참는 표정으로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성산하?”

의아하게 이름을 부르자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손이 그대로 내 볼을 주욱 잡아 늘렸다.

“아!”

“……죄짓는 기분이라 뭘 할 수 있어야지. 언제 클래?”

“미쳤냐? 누굴 애 취급이야.”

얼굴에 닿은 손을 쳐 냈다. 오늘따라 성산하의 분위기가 정말 이상하다. 밤도 늦었고, 서둘러 손의 상태만 본 후 보내야겠다.

내가 먼저 손목을 잡아 올리자 성산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순순히 제 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흰 장갑을 벗기는데 집중한 머리 위로 감상적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를 벗기는 것을 허락한 건 네가 처음이야. 다른 사람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는 건 상당히 부끄러운 기분이군.”

“…발, 진짜 미쳤냐? 헛소리할 거면 좀 닥쳐.”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오랜만에 괴사된 피부를 마주하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성산하와는 존나 어울리지 않는 손이었다. 꼭 치료하리라 다짐하곤 성산하의 손에 의신의 손길을 사용했다. 이제는 전과 달리 스킬이 있으니 정확한 상태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떠오른 정보를 확인한 나는 말문이 막혀 성산하를 멍하니 바라봤다.

“야, 이건…….”

“말했잖아.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병이 아니라 저주거든.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성산하가 손을 빼냈다. 그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흰 장갑을 낀 성산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는데. ……이거 받아.”

익숙한 생김새에 눈을 찌푸렸다. 얼어붙은 내 손에 직접 쥐여 준 건 다름 아닌 ‘라이라프스의 목줄’이었다.

“뭐야 이건. 너 설마 나보고 차라는 개소리면…….”

“잠시 맡기는 거야. 가지고만 있어.”

“맡긴다고?”

“또 저번처럼 갑자기 사라지면 찾으러 가야 하잖아? 무서우면 형 불러.”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은 성산하는 눈을 찡긋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테라스로 나갔다.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에 황급히 뒤쫓아 나갔지만 이미 성산하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씨발. 아주 제집 안방이지…….”

괜히 분한 마음에 손에 남은 목줄을 꽉 쥐었다. 누가 이딴 거 찰 줄 알고.

***

25주년 각성 대전은 최근 벌어진 기이한 현상으로 놀란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취지에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개최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연승연은 물론이고 윤하얀 가족, 새벽에 돌아온 한서진과 박무일, 백씨 자매와 금붕어 똥 김진명까지 함께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시상식장에 도착한 우리는 입구에서 연승연과 인사를 나눴다.

“다녀오겠습니다.”

“대통령상 잘 받고 와.”

“저, 저 저는 다른 상으로도 만족합니다.”

평소와 달리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올려 멋을 냈으면서도 주춤대는 모습이 영락없이 다람쥐였다. 연승연과 함께 입장하면 좀 더 전망 좋은 관계자석에 앉아 구경할 수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일반 시민들에게 열린 외부 관람석에 앉기로 했다.

‘로브도 썼고, 반지도 있고.’

한서진이 개지랄 떨어서 약지엔 끼지 못한 반지는 검지 두 번째 마디에 대강 걸쳐 놓은 상태였다. 엄지로 반지를 휘휘 돌리며 우리 자리로 향했다.

개막 연설이 끝나자 25주년을 축하하는 정치인들과 유명 헌터들의 축하 영상이 틀어졌다. 성산하나 임단, 전에 녹스에서 본 적 있는 헌터 등의 익숙한 얼굴이 나왔기에 꽤나 재미있었다. 유명 헌터라는 말은 곧 내 고객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기에 모르는 얼굴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 가며 흥미롭게 지켜봤다. 뒤이어 초청 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외부 관람석은 격식 없고 다들 행사를 즐기러 온 탓에 시상식이라기보단 축제 같았다. 지루한 연설을 틈타 우리도 잠시 허기를 달래러 관람석을 빠져나왔다. 관람석 뒤로는 널따란 공터가 펼쳐진 데다 사이드에는 푸드 트럭이 쫙 깔려 있어 먹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은 다른 손엔 풍선이나 제 얼굴보다 큰 솜사탕을 들고 있었고 공터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백다혜와 송하정에게도 다른 어떤 꼬맹이 것보다도 커다란 솜사탕을 사 주곤 잠깐 따로 빠져 인기 많은 푸드 트럭에 줄을 섰다. 다른 사람들 몫까지 사 가느라 한 손에 7개의 핫도그를 들고 있던 한서진이 닭꼬치를 먹다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웃었다.

“이러니까 꼭 놀러 온 것 같아요.”

“맞아. 생각보다 더 재밌다. 승연이 혼자 떼 놓고 와서 미안하네.”

한서진과 둘이 킥킥대는데 뒤에서 뻘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도 있습니다? 잊으신 거 아니죠?”

돌아보자 음료를 든 박무일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 모습에 한서진이 건네는 핫도그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다 받았어?”

“네. 애들은 펭귄맨 음료, 윤하얀 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송정혁 씨는 카페라떼…….”

하나둘씩 세며 체크하는 박무일을 지켜보던 내 뒤에서 한서진이 속삭였다.

“다음엔 둘이 놀러 가요.”

둘이? 다 같이 놀러 가면 더 재밌지 않나. 볼에 가득 찬 핫도그 때문에 답하지 못하고 우물댔다. 그런데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환호하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그레져 관람석쪽을 바라봤다.

‘뭐지? 벌써 시작한 거면 안 되는데!’

혹시 승연이가 상을 받는 모습을 놓치기라도 할까 급히 달려갔다. 겨우 자리에 앉았지만 무대에 벌써 몇몇의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왜, 뭐야? 뭔데? 시상식 시작했어? 무슨 상 받은 거야?”

내 말에 잠시 당황하던 옆자리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긴 했는데 이제 입상 호명 중이라 아직 중요한 건 남았어. ……근데 혹시 너 나 알아?”

“아니? 만나서 반가워.”

얼떨결에 악수를 나눴다. 옆에서 한서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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