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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12화 (112/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12.

잠깐 기절했다가 일어나자 이미 모든 게 털린 상태였다.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갈아입혀져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급히 바지를 걷어 발목을 살폈다. 은은하던 빛이 사라진 하말의 문양은 희미해져 옅은 자국만을 남긴 채였다.

“구름, 구름아….”

발목을 톡톡 치며 불러 봤지만 구름이가 나타나 새하얗고 복실복실한 머리를 내 손에 비비거나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정말 구름이가 사라졌단 사실이 실감이 났다.

S급 장비나 휴대폰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도 구름이를 잃었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씨발, 더럽고 치사한 새끼!”

태제헌이 대체 성좌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지? 구름이는 무사할까, 다치진 않았겠지? 다시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곤 문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잠겨 있어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짜증스레 발로 차고 창문이라도 활짝 열었다. 역시 태제헌이라 창문까지 잠겨 있는 일은 없었다.

‘삼 층 정도인가. 밟을 것도 많네.’

벽을 타면 충분히 땅까지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거리였지만 아쉽게도 창문 옆엔 CCTV가 달려 있었다.

탈출은 잠시 미뤄 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쾌한 공기에 답답했던 가슴이 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경악해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대체 뭐야……?”

저번에 처음 모습을 보인 행성 뒤로 또 하나의 커다란 구체가 생겨나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멸망이니 뭐니 하며 우수수 떠올랐던 경고성 짙은 상태창들이 생각났다. 설마 이렇게 바로 대재앙이 시작되는 건가?

퀘스트창을 불러 봤지만 메인 퀘스트는 까맣게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대신 처음 보는 돌발 퀘스트 하나가 남아 있었다.

{ 돌발 퀘스트 }

성좌 쟁탈에서 승리해 조디악 시스템 파괴를 막아라.

조건 : 2개 이상의 성좌 보호

*남은 성좌의 수 : 12

*보호 중인 성좌의 수 : 0

제한 시간 : 18일

보상 : 메인 퀘스트 #5.5, 성좌 지도 활성화

성좌를 되찾으란 내용이야 예상 못할 것도 없었지만 보상이 미심쩍었다. 이미 실패한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다시 돌려준다고? 그런데 뒤에 딸린 ‘.5’는 뭐지.

남은 성좌의 수가 열둘이어도 당장 내가 찾을 수 있는 성좌는 두 개뿐이었다.

“겨우 18일이라니!”

태제헌을 상대로 너무 촉박했다. 그래도 퀘스트가 떴다는 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

“구름아 조금만 기다려. 무조건 다시 찾아 줄 테니까.”

굳은 다짐과는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태제헌은 협상이라는 게 통하는 놈이 아니라 문제다. 욕을 하든 화를 내든 귓등으로도 처듣지 않는 데다 또 변덕은 죽 끓듯 해 날 엿 먹이는 데 선수였다. 이번에도 뻔하다. 줄 것처럼 실컷 굴려 먹다가 선심 쓰는 척 구름이의 시체를 안겨 줄 새끼라고.

‘어쩔 수 없지. 몰래 훔치는 수밖엔…….’

하지만 전과는 달리 지금은 녹스에 내 편도 권력도 남아 있지 않은데. 또 구름이가 아직 이곳에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녹스 본사라거나 혹은 다른 곳에 뒀다면 되찾을 방법이 없었다.

희끄무레한 행성들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중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덩치 큰 놈들을 이끈 태제헌의 비서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비서가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어나셨군요. 저는 길드장님의 비서입니다. 이쪽은 의진 님의 보호를 맡은 가드들…….”

“가드는 씨발, 감시겠지.”

“편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응. 편하게 생각할게. 그럼 꼴 보기 싫으니까 다 꺼져.”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비서의 얼굴이 구겨졌다. 태제헌의 비서치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인 듯싶었다.

‘태제헌이 웬일로 저딴 애송이를…… 전에 놈들은 다 어디 갔지?’

겨우 감정을 가다듬은 비서가 턱짓하자 옆의 가드가 내게 다가와 들고 있던 검은색 케이스를 펼쳐 들었다.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자 비서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장비 아이템이 없으시니 남은 인벤토리 여유분은 세 개겠지요. 모두 여기 담아 주시면 됩니다.”

“싫은데?”

“거부하면 잠시 재워 두라는 길드장님 명이십니다. 직접 와서 거두시겠다고.”

비서의 시선이 열린 케이스로 향했다. 케이스 한쪽엔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주사기 여러 개가 담겨 있었다.

“서둘러 주십시오. 제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결국 인벤토리를 열어 소지하고 있던 단도와 상급 힐링 포션 여러 개를 케이스에 와르르 부었다. 케이스가 꽉 찰 정도의 순도 높은 힐링 포션에 가드들이 눈을 빛내는 사이 눈을 가늘게 뜬 비서가 눈치 빠르게 내부를 확인했다.

“단도와 포션이네요, 남은 한 칸도 비워 주십시오.”

“그것뿐이야. 원래부터 한 칸은 비어 있었어.”

“숨기시는 거라면…….”

“이렇게 된 판에 숨겨서 뭐 하냐? 어차피 나 잘 때 상급 아이템 있는지 탐색해 봤을 거 아니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포션들을 번갈아 살피던 놈은 그제야 케이스를 닫고 물러났다.

“길드장님이 오실 때까지 편히 쉬고 계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저것들도 데리고 꺼져.”

어느새 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선 가드를 턱짓하며 말하자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길드장님 명이라.”

“야!!”

재수 없는 비웃음을 입에 건 채 등을 돌린 비서가 먼저 방을 나가고 나는 세 명의 덩치와 함께 방에 남겨졌다. 두 명은 날 선 내 모습에 눈치껏 밖으로 나갔지만 쓸데없이 덩치만 큰 빡빡이는 홀로 남아 방 한쪽에 우뚝 서 있었다.

“너도 나가.”

“규정상 한 명은 의진 님의 5m 내에서 경호해야 합니다.”

기계 같은 말투와 꽉 막힌 목소리. 경험상 저런 새끼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괜히 목이 아파 오는 느낌에 대충 문지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나가.”

놈을 지나쳐 가자 빡빡이가 헐레벌떡 따라와 문 앞을 막아섰다. 당황한 놈의 얼굴을 팔짱 낀 채 비뚤게 쳐다봤다.

“왜. 이건 따로 명령 못 받았나 봐? 강의진이 나가려고 하면 어쩌라고 태제헌이 말 안 해 줘?”

“그, 그건…….”

“네가 나갈래, 내가 나갈까?”

놈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당황한 틈을 타서 ‘내가 나가는 건 네놈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말인즉 네가 날 내보낸 것과 다름없다. 태제헌을 만나면 이를 그대로 말할 테고 나가서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오롯이 네 책이다.’라며 개소리를 이어 가자 빡빡이가 드디어 고장 났다.

“그럼……. 이번엔, 긴급 상황이 아니니 이번만 15m 내 경호를 하겠습니다. 대신 방 안에 계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달리 필요한 게 있으면 나오지 말고 저희를 불러 말씀해 주십시오.”

한발 물러난 빡빡이는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문을 닫았다.

“휴, 겨우 떼어 냈네.”

소매 속에서 감춰 놨던 주사기를 빼냈다. 아까 케이스에 포션을 쏟는 척하며 하나 슬쩍 했다. 감정해 보니 꽤나 강력한 마취 효과를 지닌 포션이었다. 아이템이라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있고, 내 예상보다 강력해 쓸 만하다.

“비움이 있으면 채움도 있어야 공평한 거다. 새끼들아.”

방 구석으로 가 마루 아래 숨겨 뒀던 라이라프스의 목줄도 꺼냈다. 내가 자는 사이 전체적으로 수색했으니 한동안은 인벤토리를 털릴 위험이 적어졌다. 주사기와 목줄을 인벤토리에 넣자 텅텅 비었던 공간이 도로 채워졌다.

창밖을 내다봤다. 정원을 지키는 개새끼들도 없는 데다 스킬과 움직임을 제한하는 구속구도 채우지 않았다. 내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달리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였다. 이럴 땐 슬쩍 나가더라도 제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크게 혼나지 않았다.

‘첫날이라 감시 카메라만 죽치고 보고 있진 않을 테고……. 떨거지 없이 혼자 둘러보려면 지금뿐이다.’

구름이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선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 했다. 카메라를 발로 차 하늘로 방향을 돌린 후 창밖으로 몸을 빼냈다.

아래로 한 발 내디디려는데 옆의 창문이 열리기에 급하게 뛰어내렸다.

“큭.”

제대로 착지하지 못해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발목을 부여잡았다. 머리 위의 테라스에서 담배 연기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왔어. 말해도 돼.”

젠장, 하필이면……. 숨을 죽인 채 등을 벽에 붙였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지 놈은 내 욕을 줄기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어떠냐고? 하…. 정말 욕 나올 정도다. 전부터 싸가지 없다, 오만하다 말은 들었지만 실력은 있으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직접 보니까 버릇없는 애새끼잖아. 무례하고 상스러워. 길드장님께선 대체 배신자를 왜 그렇게…….”

“양 비서님. 말씀하신 자료 도착했습니다.”

“아, 네. 들어갈게요.”

내 눈앞으로 담배꽁초가 떨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아직 남아 있는 담배 연기에 손을 휘저으며 빨간 불씨가 남아 있는 꽁초를 발로 밟았다.

“씨발. 불나면 어쩌려고.”

역시 태제헌의 부하들은 다 나를 싫어한다.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태제헌한테 가서 강의진 좀 놔주라고 말할 것이지 하나같이 나한테만 지랄하는 꼴도 똑같았다.

‘나도 사장인데.’

투덜대며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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