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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13화 (113/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13.

얼마 가지도 않아 5m가 넘는 장벽을 마주친 나는 그제야 태제헌이 나를 구속구도 없이 풀어 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넓고 외진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벽에 그 너머로는 나무들이 빽빽했다. 감시 카메라와 경비들의 수도 적지 않아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대체 여긴 뭐 하는 데야?’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규모가 절대 아닌데. 십수 년을 녹스에 머무른 나조차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일단 가까워지는 경비를 피해 오른쪽으로 발을 돌렸다.

이렇게 넓어서는 구름이를 어디서 찾지. 차라리 태제헌에게 구름이를 달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질린 얼굴로 비슷비슷한 건물들을 지나쳐 가는데 점점 인적이 드물어진다 싶더니 아스팔트 도로가 끊기는 지점에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녹슨 철조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조망 너머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붉은 벽돌 건물이 여러 채 보였다. 사이의 문에는 표지판이 하나 달려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두 구역을 번갈아 봤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문을 열고 울타리 너머로 들어갔다.

낡긴 했지만 생각보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지 깔끔한 길을 따라 걷자 저 멀리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가가 등을 툭 쳤다.

“여기 어디야?”

“거의 다 했습니다! 마당만 쓸면……. 어?”

누구랑 착각한 건지 황급히 변명하며 돌아본 남자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점점 입이 벌어지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너는……! 강의진?”

“그래. 강의진이다.”

주호현이 아닌 강의진을 보고 놀라는 반응이야 익숙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곤 용건을 말하려는데 놈이 손을 내저으며 다가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기억 안 나? 창식이잖아, 한창식!”

“……우리 아는 사이라고?”

내 모든 관계는 녹스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녹스에서 한창식이란 놈은 본 적이 없…, 잠깐.

하나 걸리는 게 있어 눈살을 찌푸리자 그런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한창식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아오! 베타룸에 한창식! 보육원 옆방이었잖아. 기억 안 나?”

“보육원이라고?”

얼굴이 창백해져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릴 적 기억은 별로 달갑지 않다.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편했다. 아주 많이.

앞에서 퍽퍽 가슴을 치는 모습을 보니 길쭉한 아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멸치 새끼?”

“그래! 기억하네! 와…, 그 별명을 다시 들을 줄은 몰랐다.”

“대체 그동안 뭘 먹은….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긴 녹스…….”

놀라움에 트였던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한창식도 알고 있을 텐데. 나 때문에 친구들이 죽었다는 걸.

이제 와 한창식의 반응이 두려워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한 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여기 왜 있긴, 인마. 보다시피 일하는 중이지.”

제 어깨 너머의 건물을 턱짓하며 말하는 한창식의 뒤로 월영 보육원이라 적힌 낡은 현판이 보였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가… 보육원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정체에 얼떨떨해 있는 사이 한창식은 내 팔을 잡고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 여기는 식당이었고 여기는 예전 놀이방이었고 하며 넉살 좋게 설명을 이어 갔다. 구조나 방들의 위치 등이 예전 그대로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지내던 보육원이었다.

“어때. 직접 보니까 예전 기억들 좀 나지? 너 저기 소각장 앞에서 감마룸이랑 패싸움했던 건 기억하냐?”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 네가 여기 남아 있을 줄도 몰랐고.”

“으하핫, 각성한 애들은 다 신관으로 가 버리고 나만 구관에 남은 김에 눌러앉은 거지 뭐.”

“신관이라니? 그런 게 있어?”

처음 듣는 소리에 의아하게 묻자 한창식은 이상하다는 듯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가장 먼저 신관으로 간 게 너잖아. 강의진.”

“무슨…….”

“신관, 각성한 애들이 가는 곳.”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철창 너머에서 사람들을 소집하는 경보음이 울린 탓에 서둘러 보육원을 벗어나야 했다. 한창식을 만났다는 걸, 내가 보육원에 가 봤다는 것을 아직은 태제헌에게 알리기 싫었다.

“한창식, 나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내가 어딜 가냐? 어차피 나 여기 살아. 언제든 와.”

“내일 바로 올 거니까 기다려! 아, 나 봤다고 말하면 죽는다.”

“으하하. 알았다. 들어가!”

“진짜 죽는다고.”

태제헌에게 네가 죽을 거란 소리였는데 농담 같았는지 한창식은 제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냐며 땅에 머리를 떨구는 척을 했다.

***

인상을 찌푸린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에 주위의 시선이나 CCTV따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보육원…….”

한창식은 친구들이 죽은 게 나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쯤 헌터가 되어 녹스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제발 선재 살려 주세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포션도 잘 만들 테니까…!

-말했잖아. 네가 해독제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또 실패군.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고민하며 걷던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짜증을 감추지 못한 얼굴의 비서가 서 있었다.

“뭐야.”

“설마 도망이라도 가실 생각이었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황당히 대꾸하던 내 눈에 비서의 뒤로 우뚝 선 장벽과 커다란 철문이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넋 놓고 걷다 입구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건 길드장님께 그대로 보고드리죠.”

“실수야.”

“우습지도 않은 변명이네요. 본인이 녹스의 배신자라는 자각쯤은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입구는 꽤나 등급 높은 헌터들이 지키고 있었다. 속속들이 들이닥치는 경비원들 또한 죄다 각성자로 보였다.

‘정문으로는 못 도망치겠네.’

슬쩍 열린 문 너머를 내다보니 널따란 도로가 있었다. 좌우로는 나무가 빼곡한 것이 역시 숲속이다. 하긴, 보육원을 떠올려 보면 대충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이 됐다. 그런데 보육원 주위가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태제헌 본가는 어쩌고 왜 여기로 온 거래? 녹스 본사는?”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비서의 얼굴이 흥분해 붉어졌다. 어느새 내 뒤를 지키고 선 덩치들에게 소리치듯 명령했다.

“다시 방으로 데려가!”

결국 가드들에게 팔을 잡힌 나는 방으로 질질 끌려갔다.

“길드장님이 오실 때까지 편히 쉬고 계십시오.”

“불편한데 어떻게 편하게 쉬냐? 도망 안 가. 그냥 좀 구경하자니까?”

“저녁 식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문이 쾅 하고 세게 닫혔다. 아까보다 상황이 더 좋지 못했다. 문은 잠긴 데다 방 안에는 빡빡이가 버티고 서서는…….

자기를 속였다는 것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는지 내가 숨 쉬는 것, 움직이는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야.”

“5m 내에서 경호합니다. 나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던가. 부담스러우니까 앉아서 경호해.”

한쪽에 놓인 소파를 턱짓하며 말하곤 창문으로 다가갔다. 태제헌에게 언질을 받은 건지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가드 세 명이 밑을 지키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나가냐…….’

어떻게 하면 저것들을 치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저녁 식사랍시고 삼단 카트가 들어왔다. 끼니를 거른 지 오래됐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긴, 이 상황에 좋다고 처먹으면 그게 사람이냐.

거들떠도 보지 않자 빡빡이가 바로 뒤까지 다가와 말했다.

“저녁 식사가 왔습니다.”

“안 먹어.”

“길드장님께서 직접 챙기라 명하신 겁니다.”

“어쩌라고. 너나 먹든가.”

놈이 난처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내가 먹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다시 카트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틀에 턱을 괸 채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다시 녹스로 돌아왔다는 걸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안 그래도 좆같은 상황에 하늘에 뜬 두 개의 행성까지 날 압박하고 있었다. 네가 성좌를 빼앗겼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씨발…….”

태제헌에게서 도망칠 때 목숨을 걸었다. 이제는 뭘 걸어야 도망칠 수 있는 걸까.

***

배려 없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잠에서 깼을 땐 태제헌이 옆에 있었다. 날 향한 새카만 두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태제헌을 배신하기 전,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근 몇 달간의 일들이 긴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꿈이면 좋았을 텐데. 씨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태제헌이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더 자지 않고.”

“자려고 했는데 깨웠잖아요.”

전이야 제 기분 따라 멋대로 세기를 달리하는 쓰다듬음에도 무시하고 잠을 잘 잤지만 이제는 주호현의 몸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오랜만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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