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15.
“씨발, 청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겁도 없이 덤벼들기에 조금 손봐 줬을 뿐이야.”
“조금은 무슨! 애가 피떡이 됐는데!!”
“멍청하기도 하지. 센터와 천랑도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틈만 노리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단신으로 들어와서. 응?”
태제헌이 구두 끝으로 청이를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이를 부득 갈며 그를 노려봤다. 줘 터진 청이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태제헌의 손짓 한 번에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 쉽게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도통 의중을 알 수 없는 태제헌의 표정을 살피다 눈치 보며 카트를 들고 피하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다급히 소리쳤다.
“밥…! 밥 먹을게요.”
“하하. 머리 굴리더니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발, 나보고 어쩌라고… 뭘 원하는데요.”
태제헌이 무언가 말하려던 때, 그의 어깨 뒤로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언제 일어난 건지 무섭게 눈을 뜬 청이가 뛰어올라 태제헌을 향해 칼을 내리꽂고 있었다. 내게까지 느껴지는 열기에 눈을 크게 떴다. 칼끝이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태제헌이 사라졌다.
“크윽…!”
“청아!”
청이의 뒤에서 나타난 태제헌이 칼을 발로 차 거둬 버리곤 중심을 잃은 청이를 쓰러트렸다. 그러곤 등을 짓밟아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차마 벗어나지 못한 청이가 분한 표정으로 태제헌을 노려봤다.
몸에 가려진 청이의 손이 꿈틀하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을 내리깐 태제헌이 사냥감을 기다리는 뱀처럼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죽는다, 저건 무조건 죽일 생각이다. 검은 연기가 태제헌의 손을 타고 올라가는 걸 발견하고 청이가 움직이기 전에 다급히 소리쳤다.
“청아, 안 돼! 가만 있어!!”
“사장…님.”
두 팔을 흔들며 겨우 말리자 감정 없는 눈으로 청이를 내려다보던 태제헌이 나를 돌아봤다. 청이에게 다가가려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자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어때, 죽일까?”
빤히 바라보는 태제헌의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래, 저런 새끼다. 어릴 때부터 벌레 죽이듯 사람 목숨을 갖고 놀고 버리는 싸이코.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또 목숨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게요?”
“…….”
“씨발, 뭘 물어보는데. 어차피 살려 주는 척 나 갖고 놀다 결국 죽일 거잖아.”
청이에게 다가가자 아무 말 없는 태제헌의 시선이 나를 따랐다. 청이의 팔을 잡아 내 뒤로 끌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맘대로 해요. 그런데 청이 죽일 거면 나도 같이 죽여. 잘됐네.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러 가 보게.”
“협박은 네가 하는 게 협박이고. 의진아.”
태제헌이 손을 까딱이자 한쪽에 서 있던 여자가 종이 뭉치를 들고 왔다. 태제헌이 그걸 내 발밑에 흩뿌렸다.
“이건….”
연승연, 백다인. 김진명, 윤하얀……. 심지어 천랑의 성산하와 한서진까지. ‘주호현’으로 만났던 모든 사람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전부…….’
멍하니 보는 사이 한 발 크게 다가온 태제헌이 한 손으로 내 얼굴을 틀어쥐고 말했다.
“협박을 들으면 선택을 해야 하지. 반항하거나 굴종하거나……. 네 협박에 나는 져 줄 거야. 널 죽이지 않고 길들일 자신 있으니까. 그런데 너는 선택지가 있나?”
아래를 보는 태제헌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내 발밑에 깔린 사람들의 프로필이 검은색 구두에 밟혀 구겨져 있었다.
“이건 그냥 체벌일 뿐이야. 네가 착하게 굴면 살리고, 반항하면 죽이는.”
“진짜… 미친 새끼야. 너는.”
“이해했으면 무릎 꿇어.”
죽인다고 협박하면서 그저 체벌일 뿐이라니. 사람 목숨을 나를 복종시킬 수단으로만 보는 거다. 하지만 태제헌의 말대로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성산하나 한서진이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
무릎이 땅에 닿았다.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청이도 뒤에서 다가온 가드의 아이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태제헌이 제 구두에 묻은 피를 청이의 옷에 비벼 닦으며 말했다.
“구속구 채워서 철창에 가둬.”
“……청이 풀어 줘요. 굳이 데리고 있을 필요 없잖아.”
“길들이지도 않은 맹수를 굳이 밖에 풀어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지.”
“안 죽인다며!!”
“안 죽여. 네가 착하게 굴면. 바닥 더러우니까 일어나.”
씨발. 꿇으랄 땐 언제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경박한 태도가 태제헌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달리 핀잔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따듯한 음식이 다시 차려졌다. 식기를 들고 깨작대자 앞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입맛 없다고요. 안 먹겠다는데 …발.”
“강의진.”
작게 말했는데. 귀도 밝은 새끼. 삐죽대는 입으로 고기를 집어넣었다. 정말 내 감시가 목표였는지 태제헌은 제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위스키만 처먹고 있었다.
“열흘 후에 여기 나갈 거야. 한동안 외국에서 지낼 거니까 그런 줄 알아.”
“갑자기 무슨 외국이요? 싫어요. 나 여기 있을래.”
갑작스러운 소리에 불만을 표했지만 태제헌 새끼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포션 만들고 싶으면 말하고. 스킬은 어느 정도 되찾았지?”
“…몰라요. 퀘스트 보상이 스킬이었는데 성좌 뺏겨서 실패했잖아. 내 스킬 다 못 받으면 책임질 거냐고. 그냥 구름…, 성좌 돌려주면 안 돼요?”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다시 접시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제야 태제헌의 답이 돌아왔다.
“성좌는 포기해. 네가 엮일 일 아니야.”
‘내 건데 내가 엮일 일이 왜 아니야. 개새끼야.’
“네….”
순순히 대답하자 태제헌이 나름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드 대동하고 잠깐 산책쯤은 해도 돼.”
“……그럼 잠깐 월계나루까지만 산책 갔다 와도 되나?”
“그 정도 거리를 산책이라고 하던가? 뭐, 마음대로 해. 네 공방 폭파쇼 보고 싶으면 다녀와.”
“씹…….”
독한 새끼. 속으로 욕을 퍼붓고 겨우 진정해 말했다.
“주변 볼 것도 없고, 그냥 포션이나 만들래. 재료 좀 구해다 줘요.”
“어떤 것? 연구 일지도 필요한가?”
“그건 아니고. 그냥 기본적인 것만. 힐링 포션이나 활력 포션 같은 거요.”
***
“좋은 꿈 꿔라 새끼들아.”
전에 숨겨 놨던 마취제를 증폭시켜 가드들을 죄다 재운 후에 몰래 빠져나왔다. 전에 나왔을 때 봤던 CCTV들을 피해 빙 돌아 삼 일 만에 찾아간 보육원 구관에는 오늘도 한창식이 있었다. 무너진 벽돌 담장을 수리하던 놈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야, 며칠 만이야! 내일 보자더니 안 와서 아예 간 줄 알았다!”
“그사이에 일이 생겨서.”
“하긴, 너야 할 일 많으니까. 엄청 바쁘겠지.”
“나 만난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진 않았지?”
태제헌에게 걸리면 몽땅 수포로 돌아간다. 아마 한창식까지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일부러 보육원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얌전히 포션 만드는 척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심각하게 묻자 한창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당연하지. 그리고 여기 봐라. 누구 말할 사람이나 있겠냐?”
“그러고 보니 애들이 안 보이네? 너 말고 다른 선생님들은?”
“다 신관에 있지. 새로운 애들도 안 들어온 지 몇 년 된 데다 요즘은 각성 못하는 애들도 없더라고. 여기도 올해까지만 하고 접어.”
“그럼 넌…? 보육원이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데?”
“다른 데로 발령 준댄다. 오히려 잘됐지. 녹스 본사 경비원이라도 하면 그게 어디냐? 건물도 삐까뻔쩍한 데다 월급도 거의 두 배는 오를 걸.”
보육원이 사라진다고? 그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으며 기억 속에 묻어 뒀던 곳이었는데도 막상 사라진다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창식이 일을 마무리하는 사이 휴대폰을 빌려 내가 납치당하던 날의 뉴스들을 훑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태평했다. 뉴스에선 내가 납치당한 일이 단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촬영한 동영상에도 태제헌의 첫 등장만 나올 뿐 그가 한 짓이나 태제헌이 나를 ‘강의진’이라고 부르는 모습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녹스나 노바리온 측에서 의도적으로 숨긴 게 분명했다. 각성자 커뮤니티에라도 접속해 보려 했으나 일반인인 한창식의 휴대폰으로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찾는 걸 포기했다.
할 일 없이 휴대폰을 허공에 던지고 받으며 놀았다. 승연이나 한서진, 성산하의 번호가 머리에 떠돌았다.
‘당장 전화 걸 수 있는데.’
하지만 그랬다간 나랑 한창식은 태제헌에게 걸려서 좆되겠지. 당장 전화한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청이가 그랬듯 아마 성산하나 한서진도 내가 여기 있는 건 알고 있을 거다. 녹스와 전면으로 살육전을 벌일 수가 없어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테지만.
“강의진! 이거 봐 봐! 내가 뭘 찾았는지 좀 봐!”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한창식이 뭔가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한창식이 가지고 온 건 한 장의 낡은 사진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찍은 단체 사진 아래에는 ‘알파룸’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의 정중앙에서 브이 자를 하고 씩 웃고 있는 건…….
“이 잘생긴 꼬마 나냐?”
“야, 강의진. 지금이랑 똑같네. 나도 오랜만에 본다. 여기 김선재, 양태오, 정수진, 신하늘…….”
위에서부터 하나씩 손으로 짚으며 줄줄 읊는 한창식에 심장이 따끔따끔 찔렸다. 하나 걸러 하나가 모두 죄책감 가득한 이름들이었다. 한창식의 손끝에서 시선을 돌리다 눈이 어느 한 곳에 꽂혔다. 내 바로 옆에 서 있는 작은 아이. 내 옷자락을 꼭 잡은 채 웃음기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빛바랜 낡은 사진으로도 가릴 수 없는 예쁜 외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이런 얼굴, 잊을 리가 없는데. 날 듯 말 듯한 기억에 미간을 찌푸리고 빤히 보자 한창식이 그를 눈치챘는지 바로 야유했다.
“역시,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때도 끼고 살더니 지금도 보자마자 꼬맹이한테 아주 눈을 못 뗀다?”
“꼬맹이라니. 얘 말하는 거야?”
“그래! 얘가 너 졸졸 따라다녔잖아. 넌 옆구리에 끼고 살고. 너 얘 땜에 김선재랑 싸운 거 기억 안 나?”
“내가 얘 때문에 싸웠…….”
바람을 타고 들려온 듯 갑자기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너 이름이 뭐야?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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