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16.
태제헌의 협박에 위험해지기라도 할까 봐 십 년간 이름을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애써 묻어 뒀던 기억들에 물꼬가 트이자 그동안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생생한 기억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녹은 뒤에 찾아오는 따듯한 봄이면 보육원에도 새로운 아이들이 입소했다. 작년 입소였던 나는 처음으로 우리 알파룸에도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온다는 기대감에 입소식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때늦은 감기로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을 꼬박 앓느라 정작 입소식은 보지 못하고 허탈하게 지나가 버렸다.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내가 없던 사이 감마룸 놈들이 알파룸 간식들을 모두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사사건건 부딪치던 감마룸 놈들과 담판을 지을 생각으로 신입들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곧바로 소각장으로 향했다.
-야! 안형태!
-어떤 자식이……. 강의진?
뭔가를 감싸듯 둘러서 있던 놈들이 당황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사이엔 한 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어린 눈에도 신기할 정도로 예뻤던 작은 아이. 사나를 그날 처음 만났다.
놈들을 쫓아내고 아직도 구석에 구겨져 서 있는 그 애에게 다가갔다. 자그만 데다 처음 보는 놈인 게 신입이 분명했다.
-여기서 뭐 해? 우냐?
-…….
-반 어디야? 야, 울지 마. 꼬추 떨어져.
우는 애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며 말하자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남자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여자애였다. 난생처음 보는 예쁜 외모에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봤다.
-어, 어… 미안. 여자앤 줄 몰랐어. ……데려다줄까?
안형태와 싸우느라 흙이 묻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애는 날 사납게 노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쳐 갔다. 소각장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깨끗한데…. 우리 반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머지않아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기대와는 달리 그 아이는 베타룸이었고, 심지어는……!
-뭐…? 걔가 남자애라고?
-그래! 그래서 아까 안형태가 바지 벗어 보라느니, 엄청 괴롭히……. 너 울어?
-아니야! 먼지 들어간…. 씨이…….
남자애란 걸 알게 된 날은 왠지 모르게 눈이 시큰거리고 목이 턱 막혀 간식으로 나온 초코빵도 얼마 먹지 못하고 선재 줘 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축구를 하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 애를 발견하고는 울적한 기분이 몽땅 다 사라지고 어느샌가 신이 나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야! 강의진! 공 저기 있는데 어디가?
-안녕! 나 기억나?
-…….
-난 알파룸 강의진이야!
가만 있어도 눈길을 끌 만큼 예뻐서인지, 아니면 생김새와는 다르게 뾰족한 성격 탓이었는지 그 애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작은 애를 괴롭히는 게 치사하고 보기 싫어서 안형태 같은 놈들이 그 애에게 시비 걸 때마다 배로 되갚아 줬다. 놈들과 매일같이 투닥투닥 싸우는 동안 그 애와도 많이 친해졌다. 이름이 ‘사나’인 걸 가장 먼저 들은 것도 나였다. 어느 순간부터 사나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야, 안형태. 내가 경고했지. 사나 좀 그만 건드리라고!
-썅, 저 새끼가 먼저 내 팔 물었다고! 그리고 나 화장실 갔을 때 문도 잠가서 하루 종일 갇혀 있었다고!
-이젠 거짓말도 하냐? 사나가 잘도 그랬겠다.
작은 괴롭힘이 결국 각 반끼리의 싸움으로 번졌고 각 반의 주동자들은 죄다 원장실에 불려가기까지 했다. 잘못한 것은 안형태 무리였기에 놈들이 혼나는 동안 무섭지만 유독 내 말은 잘 들어줬던 원장 선생님에게 사나를 알파룸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알파룸으로? 그건 어렵지 않지. 대신 주말에 원장실로 좀 올래? 도련님께서 오시는데 의진이가 도와주면 좋아하실 거야.
-엇, 다음에 가면 안 돼요? 주말에 베타룸이랑 축구 하기로 했는데…….
-축구는 그다음 날 하렴. 관리 아저씨에게 말해서 일요일에 운동장 개방해 줄게. 도련님이 의진이 예뻐하잖아.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응?
-알았어요. ……그럼 사나 알파룸으로 바로 옮길게요!
베타룸에서 몇 없는 짐을 모두 챙겨 나왔고 사나는 당연하게 내 옷자락을 잡고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태제헌이 날 데려가는 바람에 일 년이 채 지나기 전 사나와는 떨어져야 했지만…….
엄지로 사진 속 사나의 얼굴을 쓸며 매만졌다. 지금은 어떻게 컸을까? 어릴 때부터 예뻤으니까 지금도 엄청 예쁘겠지. 날 기억하고 있을까?
창식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나도 신관으로 갔어? 지금 뭐 하는지 알아?”
“응. 신관으로 가긴 했는데…. 사실 신관으로 가면 그 후에 연락이 잘 안돼서. 나도 가끔 선생님 통해서 가현이만 만나 본 거거든.”
“아쉽네……. 야, 사진 같은 거 더 있냐?”
“사진? 아마 창고 찾아보면 더 있긴 할 텐데. 지금 찾으러 갈까?”
위를 가리키며 말하는 한창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포션에 혼동 효과를 조금 넣긴 했지만 시간 차이가 너무 극명하면 속지 않을 테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이만 가 봐야 해. 내일 또 올게.”
“그래. 내가 오늘 일 끝나고 창고 한번 뒤져 볼게.”
한창식과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아 축 늘어져 자고 있는 놈들을 발로 차며 깨웠다.
“야, 일어나. 자러 왔냐? 집 가서 자.”
갓 일어나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모두 쫓아내고 침대에 편히 드러누웠다.
“녹스에서 일하고 있을까? 아, 별일 없으면 성인이 될 때까진 보육원에 있는다고 했지. 사나는 그럼…….”
그러고 보니 사나가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물어본 적도 없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릴 때 나보다 키도 작고 그렇게 귀여웠는데 당연히 내 동생이었겠지. 그렇다면 더 애매하다. 딱 걸쳐 버린 나이잖아.
‘녹스 아니면 아직 보육원에 있을 테니……. 내일 창식이한테 사나 인적 사항이 적힌 파일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나의 존재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직 구름이도 찾지 못한 데다 퀘스트나 내 공방까지, 해결해야 해 할 일이 많았기에 사나를 찾는다 해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헛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어수선한 기분이 밖으로까지 새어 나가 태제헌이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였다.
“오늘 뭐 했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별로요. 그냥 방에서 포션이나 만들었지 뭘 해요.”
“그래?”
태제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혹시 보육원에 간 사실을 들키는 건 아니겠지, 조금 긴장한 채 태제헌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별말 없이 다시 고기를 써는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구름이는 어디서 찾지. 정말 태제헌이 지니고 있는 건가.’
며칠간 돌아다니며 어떤 실마리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민하며 조금 남은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고, 썰고, 또 썰다 결국 타박을 들었다.
“음식으로 장난치지 마.”
“……네.”
뚱하니 대답하며 식기를 손에서 내려놓다 태제헌에게 물었다.
“청이도 여기 있어요?”
“그건 왜.”
태제헌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빤히 바라보는 얼굴에 떠보던 걸 그만두고 속내를 말했다.
“치료는 잘해 준 거 맞아요? 아니, 살아 있는 건 맞죠? 그날 개팼잖아요.”
“살아는 있어.”
“청이, 나랑 한 전결서약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그냥 풀어 주면 안 돼요?”
“전결서약은 오직 비밀 유지에 관해서만 영향을 끼칠 텐데. 여기까지 온 건 그의 의지지.”
남의 계약서는 언제 또 확인한 거야. 아주 제멋대로지. 입을 삐죽대자 비웃은 태제헌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임청 외에 다른 용병은 왜 계약한 거지? 네 기준 미달이었을 텐데.”
“다른 용병이요?”
태제헌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제로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S급 헌터인 데다 내가 원하던 용병상보다는 덩치가 조금 작긴 했지만 그건 청이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제헌의 신랄한 비난이 이어졌다.
“등급도 별 볼 일 없는 데다 스펙, 하물며 외모까지 형편없더군. 대체 어느 면을 보고 고용했는지 궁금할 정도였어. 이름이 양, 수철이었나.”
“……수철이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놀라 되물었다. 태제헌의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혹시 제로에 대해 모르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태제헌이 뿌렸던 프로필에도 제로에 대해선 적혀 있지 않았다. 굳이 태제헌이 목숨 가지고 협박할 만한 사람을 하나 더 늘려 줄 필요는 없어 고개를 저었다.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려면 평범한 놈도 필요하니까. 그리고 등급 높은 애들은 다 마음에 안 들었어요. 등급 좀 높다고 건방지게 굴잖아요. 내가 사장인데.”
“그래, 건방지게 굴면 안 되지. 네가 누군데.”
나직이 웃은 태제헌이 손가락으로 가만히 테이블을 두드리다 말했다.
“임청은 네가 다루기엔 너무 고집이 강해. 자존심도 세고.”
“누가 뭐래요? 그냥 풀어 달라니까.”
“완전히 길들여지면 네 개로 주지. 조금 기다려.”
“그럼 지금 만나면 안 되나? 내가 잘 설득할 수 있는데. 청이도 내 말 잘 들어요.”
“안 돼.”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사실 청이를 만나면 같이 도망갈 생각뿐이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 투덜대다 침대 옆 서랍에 넣어 뒀던 종이 가방을 태제헌의 옆에 내려놨다.
“그럼 이거라도 줘요.”
오늘 재료를 받자마자 대강 만들었던 회복 포션들이었다. 가방을 흘깃 내려다본 태제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 후에 전해 주지. 내일은 사람이 올 거야. 따라가서 사진 찍어 둬.”
“무슨 사진이요?”
“여권 사진. 슬슬 나갈 준비 해야지.”
“아…….”
내게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더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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