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118화 (118/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18.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럼 네 정보는? 너만 사라진 데다 태제헌도 찾지 못했잖아.”

“사장님이 재밌는 거랑은 별개로 녹스 길드장과는 그다지 엮이고 싶진 않아서요. 어딜 가나 안전이 최우선이지 않겠습니까? 후후.”

“그럼 여긴 왜 온 건데.”

“사장님께서 이미 예상하고 계신 것처럼, 용병 의뢰를 받아서요.”

“너 내 용병이잖아. 태제헌 의뢰받지 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은 제로가 흐음 하며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글쎄요. 지금 일도 못 주시는 상황 아니신가요? 아 참, 사장님은 지금 공방이 어떤 꼴인지 모르시죠. 거의 폐업 직전이랍니다.”

폐, 폐……! 내 공방에 그런 끔찍한 표현을 쓰다니! 이게 다 태제헌 때문이다. 이를 부득 갈며 제로를 바라봤다. 실실 웃으며 느물대는 꼴이 못 미더웠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천랑과 센터가 녹스를 견제하느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내부에서 도움받을 사람이라곤 제로뿐이다.

“일을 왜 못 줘. 지금 주잖아. 나랑 청이 탈출 좀 도와줘.”

“이런. 길드장님 무섭던데 그냥 녹스에서 새 인생 시작하는 건 어떤가요?”

헛소리는 한 귀로 흘려버리고 닫힌 문 쪽을 살피며 속삭였다.

“왜. 어떤 임문데 그래. 태제헌이 얼마 준대.”

“글쎄요. 아무리 사장님이래도 그걸 말씀드릴 수는 없죠. 용병은 신의가 생명이라.”

“무슨 임무인지는 알고 있단 소리네?”

묘한 미소를 지은 제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

“뭔지 말해.”

“어떤 아이템 호송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터 한 명이 지닐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물건이요. 듣기로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봉인되어 있어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제로의 말에 머리를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제로가 의뭉스럽게 처웃었다.

“후후. 뭔지 예상이 가시나 봅니다?”

“응. 내 거야. 되찾아야 해.”

“흐음…. 이거 곤란한데요. 만약 제가 맡게 된다면 사장님과 척을 지게 되는 건가요?”

“네가 맡게 된다면 나한테 갖다 줘야지. 내게 필요한 물건을 구해다 주는 것, 그게 계약 내용이잖아.”

안경알 너머 웃음기를 담고 지켜보는 가느스름한 두 눈. 지금쯤 머릿속으로 나와 태제헌을 비교해 가며 재고 있을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제로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재밌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마침 사장님께서 도움 주실 만한 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어떤 건데?”

제로가 허공에 손을 뒤적대더니 까맣고 동그란 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폰의 알입니다.”

“그리폰이라면……. 몬스터잖아?”

“그리폰은 두 개가 짝을 이뤄 부화하는데 이건 그중 밤의 알이죠. 부화시키기 위해선 낮의 알이 필요합니다. 마침 녹스의 실험실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죠.”

“녹스의 실험실이 어딘데?”

“여기요. 이 부지 전체가 녹스의 종합 연구 단지입니다.”

처음 듣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뭘 묻기도 전에 밖에서 용병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로가 내 손에 작은 기구를 쥐여 주며 말했다.

“그리폰의 마나 데이터가 입력된 추적 아이템입니다. 그리폰의 알에 반응할 거예요. 찾은 후에는 폐기해서 버려 주세요.”

“알았어. 그거랑 똑같이 생겼지?”

“네. 같은 모양에 색만 하얗습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다음에 만날 땐 서로 필요한 걸 가진 채로 만나길 바랍니다. 삼 일 후예요.”

삼 일이라니? 생각보다 촉박한 시간에 당황한 사이 뒤돌아 나가려는 제로에게 급히 소리쳤다.

“청이도! 청이도 구해 줘야 해!”

추적기를 꼭 쥔 채 말하자 제로는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청 헌터가 반길 것 같진 않지만, 네. 알겠습니다.”

***

삼 일 중 태제헌이 자리를 비우는 날은 오늘 하루뿐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매일 같이 수면제를 먹은 가드들도 슬슬 내성이 생기고 이상하단 걸 눈치챈 것 같아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의진 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별 건 아니고, 새로 포션을 만들었는데 어떤지 봐 달라고.”

“저…희가 말입니까? 대체 어떤 포션이기에.”

“거의 다 했어. 이것만 넣으면 완성이니까 집중해서 잘 봐.”

다들 당황하면서도 어떤 포션일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가드들과 비서까지 모두 모인 걸 확인한 후 끓고 있던 냄비에 들고 있던 포션을 쏟아부었다. 액체가 끓는 소리와 함께 뭉게뭉게 피어오른 새하얀 연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어라? 연기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의진 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냥 수증기인가 봐. 별 냄새는 없는…….”

하나둘씩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가로질렀다. 바닥에 드러누운 덩치들을 발로 툭툭 걷어 내다 개중 나와 가장 체구가 비슷한 가드 앞에 멈춰서 놈의 겉옷을 벗겼다. 대충 팔을 꿰어 입고는 문에 기대 쓰러진 비서의 품에서 출입 카드를 빼냈다.

“쉽다. 쉬워…….”

당연하다. 수면 향 계통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실패해 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그 한 번은 태제헌에게 사용했을 때였다.

그땐 어리기도 했고 태제헌에 대해 너무 몰랐다. 단순히 나가서 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연기를 가르고 나타난 태제헌을 보고 심장이 땅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지. 덕분에 태제헌 새끼가 나 모르게 S급 해독 아이템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 비쌌다.

과거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고 밖으로 나갔다. 인벤토리에서 추적기를 꺼내 들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자 가운데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바늘이 어느 순간 특정 방향을 가리킨 채 고정됐다. 바늘이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복잡하기도 하네.”

이쪽은 건물이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터라 제로가 준 추적기가 없었다면 알을 찾긴커녕 도중에 길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건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른 나는 어느 방 앞에 선 채 미동도 없는 추적기의 바늘을 내려다봤다.

“여긴가…….”

잠금장치에 비서의 카드를 대자 초록 불이 들어오며 안쪽에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부는 커다란 자료실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수십 개의 캐비닛이 줄지어 이어졌고 칸마다 온갖 파일들과 서류, 상자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추적기를 따라 캐비닛 사이를 지나가며 흥미로운 눈으로 내부의 서류들을 훑어봤다. 종합 연구 단지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자료들의 범주도 다양했다. 던전에 대한 자료부터 세계 길드 모음, 내가 개발한 포션에 대한 연구자료들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헌터에게 치명적인 생식 불구를 일으키는 던전 독초 보감 - 고통편」이나 「포션 마스터 강의진의 명성과 해외에서의 인지도 현황」에는 굉장히 흥미가 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추적기는 구석의 한 유리 상자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 안에는 주먹만 한 하얀 알이 하나 보관되어 있었다. 조심히 상자를 들어 살피자 역시나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지.”

인벤토리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자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하고 태제헌 몰래 제작한 독약이었다. 위험한 재료를 요구했다간 눈에 띌 게 분명해 가진 재료들로 제작하느라 아주 조금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덕에 독성도 약해져 누굴 죽일 만한 세기는 아니었지만 굳이 가져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상자를 돌려 뒤쪽의 경첩에 포션을 천천히 부으니 연기와 함께 경첩 부분이 보글보글 끓으며 녹아내렸다. 케이스 뚜껑을 따고 조심스럽게 알을 꺼냈다. 알의 반질반질한 표면은 내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쓰다듬다 깨질까 봐 무서워 서둘러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난 임무에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여유로웠다. 적어도 자료 하나 정도는 빠르게 훑을 시간이 있었다.

‘자료실 구경 좀 더 해 봐도 되겠는데?’

「헌터에게 치명적인 생식 불구를 일으키는 던전 독초 보감 - 고통편」을 볼지, 아니면「포션 마스터 강의진의 명성과 해외에서의 인지도 현황」을 먼저 볼지 고민이었다. 다른 자료들을 훑으며 아까 봤던 구역으로 걸어가는데 시선 끝에 뭔가가 걸렸다.

「PROJECT : D - 월영 보육원 23기 실험 결과」

“응? 월영 보육원?”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자료가 많은지 한 칸 전체가 같은 내용이었다. 1기부터 23기까지. 각각의 파일들은 꽤 두터웠고 앞으로 갈수록 파일이 낡아 바래 있었다. 다른 자료들에 대한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은 자연스럽게 ‘17기’의 파일로 향했다.

파일을 열었을 때, 가장 처음 보인 건 감마룸이었다. 흰 배경에 정면을 바라보는 앳된 얼굴들,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니 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에 찍은 사진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들의 얼굴 위로 ‘FAIL’이라는 붉은 글씨가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몇몇을 빼고 모두의 사진이 그랬다.

“얼굴에 실패라고 써 놓는 건 어느 나라 매너냐. 기분 좆같게.”

치워 버리듯 다음 장을 넘기니 아이들의 이름 옆으로 이어진 글자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누군가 옆에 메모를 했는지 휘갈겨 쓴 첨언이 함께 적혀 있었다.

{감마룸 테스트 결과}

- 생존 4, 사망 37

신유리 : 1차 실험 중 사망. 몬스터에게 납치 후 실종

안 현 : 1차 실험 중 사망. 절벽에서 추락사

송현우 : 1차 생존, 2차 생존, 3차 실험 중 사망. 마나 폭주. 아쉬운 개체. 약물 주입은 꼭 용량 맞춰서!

한영화 : 1차 생존, 2차 실험 중 사망.

김인문 : 1차 생존, 2차 생존, 3차 생존, 4차 생존. 테스트 통과.

.

.

안형태 : 1차 생존, 2차 생존, 3차 실험 중 낙제. 정신이상. 멘탈 약한 개체는 세뇌가 선행되어야 함. 앞으로도 주의!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