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19.
“이게… 뭐냐?”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겨 냈다. 실험, 사망, 던전, 생존. 그것들이 왜 내가 아는 이름들 옆에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부정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친 듯이 종이를 넘겼다. 약물 투약, 마정석 합성, 정신 조작. 끝없이 이어지는 실험, 수십 번의 던전 투입. 강한 각성자를 만들어 낸다는 목적 그 하나를 위해 좆같은 생체 실험이 거행됐다. 내가 알던 이름들은 파일에서 그저 실험체로만 존재했다. 극소수의 각성자가 살아남을 때까지 아이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기억 속에 상처로 남은 이름들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제헌에게 끌려와 내 각성을 위해 이용당하다 죽었던, 매일 꿈에 나와 되뇌던 이름들. 내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그들의 사인에도 다른 이들처럼 실험 중 사망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태제헌 이 씨발 새끼가!”
어차피 죽일 거라는 것도 모르고 제발 친구들 좀 살려 달라고, 더 열심히 연습하겠다고 빌었던 내가 멍청해 견딜 수 없었다. 보육원 신관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손 아래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베타룸 아이들의 사진이 펼쳐져 있는 파일을 내려다봤다. 이제 한 장만, 딱 한 장만 뒤로 넘기면 알파룸이 나온다. 하지만 손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젠장.”
이미 오래전에 결론 난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무서워서 넘길 수가 없었다. 다른 반들처럼 살아남은 애들은 극소수겠지. 그래도…….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씹었다. 언뜻 피 맛이 스칠 때쯤 눈을 질끈 감고 아이들의 사진이 있을 첫 페이지를 펼쳤다. 천천히 뜬 시야가 온통 붉었다.
FAIL, FAIL, FAIL, FAIL, FAIL, FAIL.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찍힌 붉은 낙인. 알파룸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다.
“뭐? 씨발, 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혹한 결과를 멍하니 쳐다보다 힘겹게 숨을 뱉었다. 정신을 차릴 수 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나’의 얼굴에 찍힌 도장 때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나의 사진을 더듬었다.
‘사나는, 성산하는 살아 있는데?’
겨우 마음을 다잡고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좆같게도 다른 반들에 비해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알파룸 테스트 결과}
- 생존 0, 사망 41
천지심연 던전. 알파룸 1차 실험 도중 전원 사망. 원인 불명, 던전 폐쇄
김선재 : 1차 실험 중 사망.
신하늘 : 1차 실험 중 사망.
정재준 : 1차 실험 중 사망.
정수진 : 1차 실험 중 사망.
임지원 : 1차 실험 중 사망.
산 하 : 1차 실험 중 사망.
양태오 : 1차 실험 중 사망.
.
.
뭔가 이상하다. 이제 와 다들 무사할 거란 멍청한 희망을 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체 알파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다. 녹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도. 그걸 알려 줄 사람은 성산하뿐이다.
파일을 덮어 다시 제자리에 꽂아 뒀다. 1기부터 23기까지 연이어 이어진 파일들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지심연 던전이라고…….”
방으로 돌아오자 비서와 가드들은 아직까지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까 놈들을 잠재운 포션이 들어 있는 냄비 앞으로 가 어느새 김이 빠진 포션을 한 모금 삼키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단순한 포션 사고인 척하기 위해선 놈들이 깼을 때 나도 자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머리가 복잡해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눈만 감고 있는데도 열이 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씨발 새끼들. 진짜 개같은… 새, 끼…들…….
***
“의진 님, 의진 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몸을 좌우로 흔드는 거센 손길에 흐릿했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눈살을 찌푸리고 앞을 바라보자 비서의 다급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뭔…데? 갑자기 왜…….”
“일어나세요!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의진 님을 모시라는 길드장님 명입니다!”
내가 의도한 포션 사태와는 다른 분위기에 잠이 달아났다. 벌떡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짐을 싸 들고 있는 비서나 창문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와 파열음이 심상치 않았다. 때마침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뭐야? 무슨 일 생겼어?”
“던전 브레이크입니다! 여기까지 피해를 입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꼭 챙겨야 하실 거 있습니까?”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라니! 잠깐, 청이! 청이 데려가야 해!”
“임청 헌터는 이곳에 없습니다. 며칠 전 녹스 본사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 외에 달리 챙기실 물건 있습니까?”
“내 휴대폰!”
“휴대폰이요? 그게 어디 있더…….”
제정신 아닌 것 같아 일부러 다급하게 소리쳤더니 서둘러 찾으려 엉덩이를 들썩이던 비서가 겨우 정신 줄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앗, 안 됩니다! 길드장님께서 소지품 반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쳇.”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나가셔야 합니다. 차로 가시죠.”
비서와 가드들과 함께 밖으로 달려 나갔다.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지만 혼비백산해 달리는 직원들과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워낙 많아 차의 움직임이 더뎠다. 그 틈을 타 밖을 내다봤다. 산과 가까운 구역에서 굉음과 스킬 이펙트들이 터지고 있었다. 언뜻언뜻 몬스터들의 모습도 보이는 게 정말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구나 싶었다.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라니. 여긴 던전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게이트가 열리는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는 워낙에 흔치 않은 일이라 녹스가 드디어 천벌을 받은 건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슬슬 속력을 내려는 차창 밖으로 멍청한 얼굴이 보였다. 몬스터들쪽으로 달려가는 길드원들 사이에서 품에 상자를 안은 한창식이 꼬질꼬질한 개 한 마리와 함께 갈 곳 잃은 눈을 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창식!”
창문을 열고 소리치자 놈이 내 쪽을 돌아봤다. 눈이 커다래져 반가운 얼굴로 한쪽 손을 흔드는 한창식의 뒤로 멀리서 날아오는 비행형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의진아!”
지금 반가워할 때냐고! 답답함에 머리를 짚었다.
“잠깐 차 좀 세워 봐!”
급히 기사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으나 이쪽으로 날아오는 몬스터를 발견한 비서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길드장님께서 의진 님을 녹스로 모시는 것을 최우선으로 실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잠깐이면 돼! 멈추라니까?”
“출발하세요.”
망설이던 운전기사가 기어이 앞을 보고 엑셀을 밟았다. 결국 (막무가내로) 차 문을 힘껏 열자 몸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의진 님!!”
“아, 아야야. 씹…팔, 존나 아프네.”
속도 내기 전에 뛰어내리려고 한 건데 이렇게 빨리 출발할 줄이야. 욱씬거리는 어깨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한창식이 놀라 달려왔다.
“야, 강의진! 너 괜찮아? 놀랐잖아!”
“어. 괜찮으니까 빨리 차에 타.”
“뭐? 아니, 난…. 우리 진돌이 때문에 차는 괜찮……. 일단 너 먼저 일어나 봐.”
“멍! 멍멍!”
진돌이가 하늘을 향해 짖었다. 마수가 우리 머리 위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급히 방향을 바꿔 돌아온 차에서 비서와 가드들이 내리는 걸 보며 턱짓했다.
“빨리 안 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난 각성자야! 그 개 새끼 데리고 먼저 타라고! 바로 따라 탈 테니까!”
진돌이와 날 번갈아 보던 한창식이 다급히 진돌이를 안고 차로 달렸다. 가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몬스터가 한창식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가드의 허리에 꽂혀 있는 총이 보여 그것을 빼내 몬스터를 향해 쐈다.
“흐아아악!”
큰 소리가 들리자 겁먹은 한창식이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일반 총이라 공격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이목을 끄는 데엔 충분했는지 몬스터가 발광하며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드들이 놓치지 않고 몬스터를 공격하는 사이 한창식은 안전히 차에 다다랐다.
비서가 날 부축하며 나직이 질책했다.
“무모하셨습니다. 굳이 나서실 필요는 없었어요.”
“일반인이잖아.”
“의진 님께선 제작계시죠. 게다가 다치기까지 하셨잖습니까.”
“원래 일반인 앞에선 없던 폼도 생기는 거야.”
“……길드장님께서 많이 화내실 겁니다.”
“괜찮아. 그 새끼는 항상 화나 있어. 화 안 내면 그게 더 무서워.”
비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겨우 올라탄 차가 출발했다.
“태제헌은 어딨대? 여기 던전 브레이크 일어난 거 알아?”
“길드장님께서도 복귀 중이십니다. 자세한 건 녹스로 간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재난이었기에 더 묻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스 본사로 가는 거라면, 제로와는 어떻게 만나야 할지 그 걱정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단지에서 빠져나온 차가 숲을 지나 도심에 들어서기까지 던전 브레이크를 두 번이나 더 발견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위를 가리고 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뻥 뚫린 하늘을 마주했을 땐 차 안의 모두가 놀란 신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게 뭐냐?”
저 멀리 창공에는 검은빛의 기둥이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다. 웜홀 같기도, 언뜻 아주 높은 탑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기둥 위쪽을 두르고 있던 하얀 물체가 구름이 아닌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73:15:59>
가장 뒤부터 숫자가 시시각각 줄어들었다. 가드 하나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카운트다운… 같습니다.”
“카운트다운? 말도 안 돼.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소름에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퀘스트창을 열었다.
{ 돌발 퀘스트 }
성좌 쟁탈에서 승리해 조디악 시스템 파괴를 막아라.
조건 : 2개 이상의 성좌 보호
*남은 성좌의 수 : 12
*보호 중인 성좌의 수 : 0
제한 시간 : 3일 1시간 15분
보상 : 메인 퀘스트 #5.5, 성좌 지도 활성화
“……씨발.”
저 이상한 기둥의 좆같은 카운트다운은 내 퀘스트의 남은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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