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120화 (120/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20.

[긴급 상황입니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예고 없는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각성자들은 각성법에 따라 가장 가까운 길드와 공공기관으로 결집해 주시고 일반인들은 위험구역 내에서 즉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현재 도로의 정체가 극심하니 차가 아닌…….]

라디오를 들으며 질린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갑작스러운 던전 브레이크는 전 세계적으로 발생 중이었다. 심지어 이상 현상인 저 거대한 기둥마저도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심심찮게 보고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울이나 대도시들은 헌터와 길드가 많아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녹스 본사 근처에 도착할 때 즈음엔 서울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는 대부분 수습이 끝나고 헌터가 적은 취약 지역으로 길드들이 지원을 가고 있었다.

실로 일사불란한 빠른 대응이었지만 그럼에도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서진 건물이나 쉼 없이 이어지는 구급차들을 볼 때마다 강박적으로 퀘스트창을 들어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3일 0시간 3분]

[2일 23시간 47분]

[2일 22시간 59분]

‘씨발 좆 됐다…….’

그동안 퀘스트창이 멸망이니 뭐니 하며 겁을 줬어도 내심 경고를 가볍게 여긴 게 사실이다. 내가 실패한다고 당장 세상이 멸망할 것 같지도 않았고 실감도 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퀘스트 보상이 간절하고 실패하면 안 된다니 퀘스트를 위해 노력하긴 했다만,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고 공방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그런 상상까지는 해 본 적 없단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강을 제집처럼 활보하며 헤엄치는 거대한 몬스터 떼들을 보자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싸늘한 감각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녹스에 도착하기 전, 임시 대피소에 멈춰서 창식과 진돌이를 내려 줬다.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상황 정리될 때까진 대피소에 있어. 바로 움직이지 말고.”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진짜 고맙다 의진아. 보육원에 남아 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너도 조심하고. 미안하다. 나 때문에…….”

창식이가 내 다친 어깨를 보며 웅얼거렸다. 뒤통수가 따가워 더 길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대충 인사하며 차 문을 닫았다.

진돌이와 함께 손을 흔드는 창식이가 멀어졌다. 창밖으로 내밀고 있던 고개를 들이다 나를 빤히 응시한 채 토독토독 손가락을 움직이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구긴 채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노려보자 비서가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변명했다.

“길드장님 명이시라 어쩔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말했는데.”

“아직 다친 경위까진 모르십니다.”

“말하지 마.”

“……나중에라도 모두 보고는 해야 합니다.”

“어련하시겠어.”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태제헌 지랄병에 머리가 다 아팠다.

녹스에 도착해 가드들을 대동한 채 로비를 가로질렀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드들의 경계에 다들 슬슬 자리를 피했다.

로비를 걷는 것은 오랜만이다. 전에도 혼자 바깥을 돌아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는 태제헌 탓에 본사에 오더라도 내 연구실과 허락된 층들만 다닐 수 있었다. 비상구 등을 살피려 눈을 굴리는데 역시나 보안이 강했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로와 만나기로 한 날이 당장 내일인데 하필……!’

차라리 연구 단지가 나았다. 여기서 제로를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청이는 이 넓은 건물 중 어느 층에 데려다 놨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임원진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고민하는데 비서가 애매한 60층을 눌렀다.

“왜 거기 눌러? 태제헌 방 제일 위층이잖아.”

“의진 님은 앞으로 육십 층에 머무르게 되실 겁니다.”

“그것도 태제헌 명령이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엔 꼭대기 층에만 풀어놓더니 이제 와서 웬 60층인지. 또 벌주는 건가. 투덜대다 투명한 엘리베이터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위로 올라가니 하늘과 이어진 기둥이 더 잘 보였다. 기둥 아래는 남산 꼭대기와 닿아 있어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같기도 했다. 창공을 가른 검은 선 뒤로 두 개의 행성까지 보이니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게 뭘까.”

“글쎄요.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와 함께 모습을 보였으니…. 분명히 위험한 것이겠죠.”

60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비서는 그대로 안에 남은 채 말했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저는 힐러를 데려오겠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힐 안 받아. 나중에 포션이나 갖다 줘.”

비서가 급히 어딘가로 연락을 넣는 사이 가드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영 익숙하지 않은 방을 둘러보며 투덜댔다.

“왜 본가가 아니라 여기로 온 거야?”

“본가요? 거기 천랑이 점거했잖습니까. 미친놈들……. 본때를 보여 줘야 정신 차릴 텐데요.”

“천랑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비서의 시선에 입을 꾹 다물고 방 한쪽에 놓인 티브이를 틀었다. 역시나 모든 채널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하는 중이었다.

[……세계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 기이하고 신비로운 검은 기둥.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 예로부터 전해진 세상의 종말을 나타내는 신호라고 말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동시에, 그것도 한국에는 두 개나 모습을 보인 수상한 기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뉴질랜드에서는 기둥을 아더타워라고 칭하며 새로운 형태의 게이트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대로 기둥의 구역에 잠식되었다 빠져나온 소수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기둥 내부를 일부 파악할 수 있었는데요, 겉보기에는 그저 음영으로 된 장막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는 놀랍게도 던전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카디프 출신의 헌터 A씨는 EPU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곧 외국 뉴스가 참고 자료로 띄워졌다. 각지에서 제보되는 영상인지 화면에 보이는 기둥의 크기는 제각각이었으나 몬스터로부터 도망다니거나 멍하니 기둥을 올려다보는 모습들은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자유의 여신상 뒤로 얇게 보이는 기둥을 배경으로 카디프 출신 헌터 A씨가 흥분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It's bigger on the inside!]

던전이라니. 정말 개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부는 존나게 넓은 데다 몬스터들로 꽉꽉 찼다는 말 아닌가. 아무 이유 없이 내부가 던전화가 되었을 것 같진 않고, 왜인지 안으로 들어갈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 그래 봤자 나랑은 상관없겠지. 난 제작계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는데 앉아 있던 가드가 갑자기 오! 하며 옆의 빡빡이를 툭툭 쳤다. 그러곤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자 빡빡이도 오오…. 하고 감탄하며 주위 가드들을 불러 모았다.

“오!”

“오오……. 우와.”

“오오오!”

“뭐 하냐?”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들처럼 오오거리는 게 짜증 나 툭 치며 묻자 놈들이 나와 비서의 눈치를 봤다. 비서도 내심 궁금했는지 그게 뭐냐고 묻자 가장 처음 발견했던 놈이 입을 열었다.

“헌트로폴리스에 올라온 글인데요. 오 분만에 추천이 천 개가 넘고 명전 간 글이 하나 있는데 그거 봤습니다.”

“어떤 글인데?”

“한 시민이 이번에 기둥, 그러니까 탑이 생겨난 이유를 추측해서 글을 썼는데 꽤나 그럴듯해서요. 탑이 일종의 비석이라는 가설입니다. 탑이 생겨난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총 열한 곳인데 그중 여덟 곳의 공통점이 최근 3년 안에 S급 헌터나 그에 준하는 각성자가 죽었다는 겁니다. 미국, 인도, 이탈리아, 영국, 이집트…….”

비석이라는 추측은 웃음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재미없었지만 그 근거로 들은 이유만은 비슷하게 짚었다. 성좌에 대응하는 각성자가 죽었고 그래서 기둥이 생긴 거라면…….

“지금 헌폴은 한국에서 죽은 각성자들 추측으로 난리입니다. 저 말이 진짜라면 한국에서 S급이 둘이나 죽었다는 말이니까요. 사실 그중 하나는 거의 밝혀졌는데, 에스퍼·가이드 센터에서 일하는 시민들이 나와서 3년 내에 죽은 S급 가이드가 있다고…….”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들 파뜩 놀라 돌아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방을 훑으며 들어오는 태제헌에 가드들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르게 섰다. 황급히 티브이를 끈 비서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손 하나 까딱 않고 태제헌을 꼬나보는데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훑던 놈은 더럽혀진 옷을 보고는 결국 혀를 찼다. 비서가 눈치 빠르게 가드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의진 님께서 포션을 드시길 원하셔서 따로 힐러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포션을 가져오겠…….”

“왜 다쳤지?”

“의진 님께서 일반인을 구하려다…….”

태제헌이 손을 들어 비서의 말을 막았다. 나보고 답하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발끝을 까딱이다 별거 아닌 척 툭 내뱉었다.

“일반인인데 개까지 데리고 있어서 놓고 가기 싫었어요.”

“그게 네가 다칠 이유가 돼?”

‘안 될 건 뭔데. 개새끼야.’

지는 꼴리면 패면서. 입을 씰룩대다 하고 싶은 말은 어른스럽게 꾹 삼켰다. 또라이 머리는 이해하려 해 봤자 나만 손해다.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요. 포션 먹으면 낫는 거 왜 유난인데요.”

태제헌이 한창식에 대해 관심 가질까 불안해 괜히 더 비뚤게 말하자 태제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침 나갔던 가드가 포션을 들고 돌아왔다. 빨리 마시고 잔소리를 피할 생각으로 가드가 내미는 포션을 받으려는데 태제헌이 성큼 다가와 내 손에서 포션을 낚아챘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눈은 내게 고정한 채로 비서에게 말했다.

“의사 불러서 기본적인 처치만 해 둬.”

“하지만 심하게 구르셔서 뼈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힐러를….”

“아니. 의진이도 이만 배워야지. 가치 없는 곳에 힘 써 봤자 손해만 볼 거라는 거.”

“씨이…. 치사하게 이러기예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