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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21화 (121/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21.

소독약으로 상처를 입은 곳을 닦으며 쇄골이 어쩌고 인대가 어떻고 하는 의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뼈와 인대가 ‘자-연-회복’을 할 때까지 붕대로 감싸 놔야 한다나.

자연 회복이라니, 그런 게 왜 필요하지? 각성자에게 내려진 축복인 포션을 놔두고 왜 이런 비효율적인 처치를 이용해야 하냐고! 심지어 내가 바로 포션 마스터 강의진인데!

“…숨 막혀.”

한동안 움직임을 조심해야 한다며 깁스까지 감으려는 걸 겨우 막아 그나마 팔의 자유는 지켰지만 어깨와 가슴팍을 칭칭 동여맨 붕대 탓에 답답하고 불편했다. 사실 정말 불편한 건 붕대가 아니라 태제헌 자체였지만. 아직 저 새끼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리 누워도 결리고 저리 누워도 짜증 나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시위하자 소파에 앉아 비서의 보고를 듣던 태제헌이 나직이 경고했다.

“어디 묶어 둬야 말을 들을까.”

“……아프고 심심하다고요.”

‘네 새끼한테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좆같다고.’

괜히 성질을 긁어 갇히기라도 하면 안 되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까지 숨기진 못했는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덮은 태제헌이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쯧. 그사이 어리광만 늘어선. 놀아 줄 시간 없으니 가만히 있어.”

“어리광은 씹……. 일을 왜 내 방에서 하는데요.”

“네 방?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여기 네 게 어디 있어.”

“원래 가장 위층 방 썼잖아요. 여기로 왜 옮겼어요?”

“그쪽은 폐쇄했으니 들어갈 생각 하지 마.”

태제헌이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등을 돌려 버렸다. 그 뒷모습을 향해 허공에 주먹질하자 나와 마주 보고 앉은 비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꼭대기 층이면 도망칠 구석이 좀 더 있었을 텐데.’

하는 수 없이 다시 드러누워 낮에 들어올 때 봤던 길이나 복기했다. 비상구는 여덟 개, 계단은 여섯. 엘리베이터는 카드키가 있어야 하고…….

***

다음날 태제헌이 자리를 비운 사이 부지런히 본사 내부를 돌아다녔다. 내가 갈 수 있는 60층부터 70층까지의 비상구와 계단들을 모두 살펴봤지만 허락된 구역 이상은 갈 수 없도록 잠긴 데다 뒤에 감시역까지 따라붙어 골치였다.

결국 마지막 층인 70층까지 막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70층과 연결된 하늘공원으로 나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쉽게도 월계나루는 보이지 않았으나 저 멀리 남산의 검은 기둥만큼은 선명했다.

헬기가 기둥 주위를 날아다니며 정찰하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하는지 번쩍이는 스킬 이펙트들이 아주 작게 보이기도 했다. 하루가 지나 크게 줄어 버린 카운트다운을 제외하고는 기둥은 처음 나타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폭풍 전의 고요일 뿐, 행성이 등장하며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아는 이상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코앞에 닥친 퀘스트 실패에 마음이 초조했다.

‘걸릴 거 감수하고 휴대폰 훔쳐서 연락을 해 봐야 하나?’

손가락으로 툭툭 난간을 두드리는데 뒤에서 숨 가쁘게 헥헥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헉, 헉…. 대체 언제까지 돌아다닐 생각입니까. 난…. 허억. 난간에서 떨어지십시오! 위험합니다.”

놈은 태제헌을 따라간 비서 대신 새로 내게 붙은 길드원이었다. 이름이 도영이었나……. 65층에서 따돌린 걸 이제야 따라오다니. 조금 멍청한 놈이었다. 뭐, 그래도 놈 덕에 마음 놓고 내부 조사를 마쳤다. 통로가 모두 막혀 있어 별 소득은 없었지만.

“그만 따라다녀. 태제헌 오면 들어간다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충분히 돌아다녔습니다. 그만하고 방으로 가시죠.”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버리자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은 도영이 다가와 내 팔을 잡아챘다.

“멋대로 길드 내부를 쏘다니시게 둘 순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은 녹스 소속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잡힌 팔을 빤히 내려다봤다. 인벤토리에 긴급용으로 수면 향을 하나 넣어 두긴 했는데. 확 써 버리고 눕혀서 좀 팰까?

하지만 포션 제작도 금지당한 지금, 수면 향을 썼다간 어디서 났냐며 인벤토리를 탈탈 털릴 게 분명했다. 지금은 S급 아이템인 라이라프스의 목줄과 그리폰의 알을 가지고 있으니……. 인벤토리 수색만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이만 돌아가려는데 하늘공원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도영이 당황해 무리에게로 달려갔다.

“이봐요! 이쪽 하늘공원은 통제입니다!”

“잠깐이면 돼요. 한 대만 피고 갈게.”

“길드 공고 못 받으셨습니까? 한동안 60층부터 70층까지는 일반 길드원들의 출입이 금지라고요.”

“아이, 알겠어, 알겠는데- 우리 71층이야. 그런데 담배 한 대 피우자고 80층까지 가라고? 그냥 오 분만 있을게요. 뭐 공사도 안 하는구만.”

실실 웃으며 담배를 무는 사람들의 모습에 빡친 도영이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나가시라니까요? 위쪽에 보고해야겠습니까?”

“어어? 이 사람 봐라. 너 어디 소속이야.”

“저 길드장님 비서실 특별 소집령 받고 일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는 그쪽은 어디 소속인데 길드 공문도 무시하고 멋대로 구십니까?”

재밌는 구경이 벌어질 것 같아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댔다.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욕을 들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결국 대표 격인 놈과 도영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일행들이 달려가 둘을 잡아 말리는 사이 난리 통에 한 여자가 내 쪽으로까지 밀려났다. 대수롭지 않게 한 발 옆으로 비켜 주는데 등을 보인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나한테 한 말이야?”

“그럼요. 여기 사장님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후후.”

“제로? 너 설마….”

흠칫 굳어 여자의 등을 바라봤다. 특색 없는 체구에 평범한 얼굴. 잠시 상황을 파악하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여장했냐……?”

“제 잡기 중 하납니다. 잠시 몸을 빌린 거니 저와 대화 나누는 티 내지 마시고 앞을 보세요. 물건은 가지고 계십니까?”

“응. 가지고 있어.”

“다행이네요. 연구 단지에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요. 그럼 이틀 후 이 시간, 20층 라운지에서 만나면 되겠습니다.”

“너야말로 우리 구름이는? 찾았어? 잠깐, 이틀 후……? 내일은 안 돼?”

이틀 후 이 시간이라면 카운트다운이 겨우 몇 분 밖에 남지 않는다. 너무 촉박해 다급히 다가가며 묻자 그만큼 한 발짝 떨어져 거리를 벌린 여자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더 빨리는 안 돼요. 길드장이 용병에게 인도하는 시간이 이틀 후입니다. 이틀 후 이 시간입니다.”

“나 20층까지 못 내려간다고!”

“그것까진 제가 도와드리기 힘들죠.”

“……알았어. 그럼 청이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봤어? 본사에 있는데 나랑 같이 나가야 해.”

“임청 헌터 역시 계획의 일부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에 곧바로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지만 더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벌써 도영과 놈들의 싸움도 진정된 상태였다.

어느새 나와 멀찍이 떨어진 여자가 제 일행들의 동태를 살피고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하나 더. 누군가 사장님께 전하란 말이 있었는데요.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무서우면 부르라고 했잖아. 멍멍아.”

“뭐? 너……!”

“라던데요?”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당황해 얼굴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지나간 여자의 등을 황당히 바라보며 입을 뻐끔대는데 앞서가던 여자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곧 졸다가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맑은 눈을 보자 지금은 제로가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한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저를 부르는 일행들에게로 다시 달려갔다.

머지않아 전보다 옷이 구겨진 도영이 퉤 침을 뱉으며 다가왔다.

“별 재수가 없으려니, 제가 그러게 빨리 들어가자고 했잖습니까.”

“어……. 내려가자.”

***

어두운 방 안 혼자 남은 채로 손안에 빛나는 목줄을 내려다봤다.

“아이템 정보.”

<라이라프스의 목줄>

세상에서 가장 빠른 개인 라이라프스마저 길들였다는 견고한 목줄

목줄을 착용한 대상이 사망 및 사망에 준하는 위험에 빠지면 주인이 알 수 있다.

목줄을 착용한 대상이 주인의 반경 1km 내에 들어왔을 때만 이동·대기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키워드 : 미정

사용 기간 : □□□일

씨발. 이걸 내 손으로 차게 될 줄이야. 아직 내 머릿속에선 사나와 성산하는 물과 기름처럼 합쳐지지 않고 따로 놀고 있었다. ‘사나’가 준 목줄을 보고 있자니 묘한 소름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욕감마저 들었다. 차라리 제멋대로 굴던 천랑 길드장일 때가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그래도 성산하가 채워 줬을 때는 얇은 은빛 목걸이라 부담이 덜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개 목줄같이 생겼다. 기억을 더듬어 성산하가 했던 대로 흔들어 봐도 전처럼 목걸이로 변화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꺼운 목줄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건 아이템이다, 존나 멋지고 비싼 S급 아이템이다.’

좋은 장비를 차는 거라고 나를 세뇌하며 목줄을 찼다. 목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라이라프스의 목줄을 착용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주인님이 근처에 있다거나 하는 알람음은 뜨지 않았다. 혹시 성산하가 없다고 투명화가 안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것도 잠시 목줄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목에서 느껴지던 무게감도 사라졌다. 낮과 같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목을 떨떠름하게 매만지는데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비서가 들어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께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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