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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23화 (123/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23.

‘내가 포션 마스터가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의구심에 가득 차 쳐다보는데 태제헌의 시선이 깊어졌다. 가까워진 태제헌이 내 턱을 들어 올려 감상하듯 찬찬히 훑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지. 더럽고 거칠더라도 내 손길이 닿으면 그 무엇보다 빛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 내가 널 선택한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지?”

“…….”

“완벽하지 않아?”

힘주어 잡은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태제헌에게 잡힌 채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한 내 모습이.

“……날 네 소유물 취급하지 마.”

“아니. 의진아. 네가 가진 건, 사소한 버릇부터 네가 죽고 못 사는 포션까지. 모두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던 거란다.”

“웃기지 마! 씨발, 놔!”

태제헌의 몸을 온 힘 다해 밀쳤다. 태제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네 모든 건 나로부터 기인해. 인정할 때도 됐지 않나?”

“웃기지 마. 누가 그딴 거 필요하대? 씨발, 나 혼자 보육원에서 빼내 줬다고 내가…….”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보육원’이란 말을 듣자마자 느긋하던 태제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젠장, 실언했다. 입술을 깨물자 태제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이러나 했더니……. 쯧. 뭔가 들었나 보군.”

“……아니, 난.”

“놀랍지도 않지. 그러잖아도 구하려던 일반인이 보육원 출신이라던데.”

“창시…, 걔가 말해 준 거 아니야! 내가 찾은 거예요.”

혹시 한창식에게 해코지를 할까 다급히 팔을 붙잡고 변명했다. 다행히 태제헌은 날 빤히 보다 등을 돌렸다.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뒤를 따라가자 태제헌이 앞서 나가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버릇없는 것도 이쯤 해 둬. 오늘은 정리가 목적이었으니 그냥 넘어가지. 내일 떠날 때는…….”

“떠나다니, 어딜요?”

“어디겠어. 오전 중 출발해야 하니까 늦잠 자지 마.”

태제헌의 말에 우뚝 발을 멈췄다.

해외를 말하는 거다. 저 새끼가 외국이니 여권이니 하긴 했지만 그게 내일일 줄이야! 당장 내일이면 제로가 오는 날인데 하필…….

가면 안 된다. 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내일까지, 적어도 정오까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비행기를 미뤄야, 아니 단순히 시간을 미루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떠나는 날이니 태제헌은 별다른 일정이 없을 테고, 내 옆에 태제헌이 남아 있다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순간, 전에 가드 한 놈이 스치듯 흘렸던 말이 머리에 스쳤다

-본가요? 거기 천랑이 점거했잖습니까. 미친놈들…….

‘그럼, 그러면……. 천랑 정도면.’

태제헌을 우리 집으로 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대로 멈춘 채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내가 따라오지 않자 돌아본 태제헌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아랫입술을 벌려 빼내며 놈은 붉어진 입술에 엄지를 꾹 눌렀다 뗐다.

“고쳐.”

멀어지는 손목을 잡아채자 태제헌의 눈썹이 꿈틀했다. 맞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일 못 가요.”

“또 가지 않겠다 반항하는 거라면…….”

“본가로, 우리 집으로 가야 해요.”

“뭐?”

태제헌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거짓말하는 게 들킬까 봐 마주한 눈에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내가 바본 줄 알아요?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요. 어떻게 이 상태로 바로 가요. 내 연구실도 집에 있고 예전에 쓰던 내 물건들도 다 거기 있는데, 설마 버린 건 아니죠?”

“……안 버렸어.”

“그러니까요. 나 이대론 못 가요. 외국 가더라도 집 들러서 내 거 가지고 갈래.”

고집스러운 말투로 버티고 서자 갑자기 변한 태도를 가늠하던 눈빛이 허물어졌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태제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장 가기는 힘들어. 사람 보내서 바로 배송하라 할 테니까.”

“남이 손대면 안 돼요.”

“강의진.”

“왜요. 그것도 형이 가르쳤잖아. 내 거에 함부로 손대게 하지 말라고.”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옛날, 그 이후로 써 본 적 없던 호칭을 꺼내 든 건 반쯤은 도박이었다. 태제헌을 구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하필 생각난 게 왜 형이었는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굳은 태제헌의 표정에 황급히 시선을 깔았다.

‘씨발, 좆됐다. 한 대 맞는 거 아니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날아오지 않는 손찌검에 슬며시 눈을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태제헌은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떠한 확신에 잡은 손목을 더 세게 쥐며 말했다.

“나 포션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제발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태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

태제헌이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다. 어딜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집에 갔겠지.

70층 하늘 공원으로 올라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봤다.

‘오늘 실패하면 진짜 죽는다…….’

태제헌 새끼한테 잡혀 해외로 간다면 다시는 도망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외국은 처음이라 미약한 두려움마저 있었다. 정말 마지막 기회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시간이 거의 다한 저 좆같은 기둥이다. 남은 시간은 30분. 아무도 저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하늘이 무너질지도.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문 쪽을 지키고 선 도영을 봤다. 기둥에 기대 꾸벅꾸벅 조는 게, 제로와의 만남 이후 계속 잠잠히 있었더니 놈도 해이해진 듯했다.

‘제발 끝까지 편하게 좀 가자.’

슬슬 제로가 말한 시간이 다가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시네요?”

졸다 화들짝 놀라 깬 도영이 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방으로 돌아가 가드들에게 나를 넘기면 그땐 저도 자유니 신나겠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저놈을 어떻게 구슬려 자연스럽게 20층 라운지로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정 안 되면 기절시킬 용의도 있었기에 인벤토리에서 빼 둔 포션병을 굴리며 놈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밖에서 터진 커다란 폭음에 나와 도영은 놀라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기둥과 닿은 위쪽에서 까만 구름이 퍼지고 있었다.

“뭐, 뭡니까! 대체!!”

“……기둥이다.”

“기, 기둥이라니 왜 무슨…….”

“아마 시간이 다 돼서겠지.”

지금까지 있었던, 운석이 떨어지거나 동시에 발발하던 수백 수천 개의 던전 브레이크 같은 이상 현상으로 보아 저 기둥도 시간이 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그러나 마냥 놀랄 시간이 없었다. 사색이 된 도영이 벽에 바짝 붙어 밖의 동태를 살피는 사이, 놈의 바지 뒷주머니에 빼꼼 고개를 내민 카드를 슬며시 빼내 60층을 취소하고 20층을 눌렀다.

카드를 바닥에 버리고 딴청을 피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젠장, 진짜 무슨 일 나는 건 아니겠죠? 씨…. 일단 내립시다.”

겨우 정신을 차린 도영이 내리려 등을 돌리다 발아래 떨어진 자신의 카드를 보고 몸을 숙였다. 그사이 나를 잡지 못하도록 서둘러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 이게 왜 떨어졌……. 잠깐, 여긴 60층이 아닌데? 의진 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20층 라운지는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어떨 것이다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일단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제로가 말한 게 이곳이 맞나……. 여기가 라운지 같긴 한데.’

줄줄이 이어진 통창이 탁 트여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소파나 안락의자, 테이블들이 아주 많았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로 혼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운지의 대다수가 중앙의 커다란 화면에서 송출되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먼저 나가시면 어떡합니까!”

주변을 훑으며 제로를 찾는데 뒤늦게 따라 나온 도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도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 멀뚱히 주위를 둘러봤다. 휴대폰을 든 사람마저도 같은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다들 기둥 일을 아직 모르나? 왜 티브이만 보고 있는 거죠?”

“잠깐 보고 가자. 뉴스에 기둥이 나오고 있는데.”

빨간 라이브 표시가 떠오른 뉴스에는 실시간으로 속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에 놓인 마이크 뒤로 보이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그 위로 꽂힌 검은 기둥이 눈을 사로잡았다. 라운지의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자연스레 귀에 들어왔다.

“와, 진짜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

“먼저 탑에 들어간 이탈리아 팀 전멸했다잖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에게 물으려던 때 티브이에서 한 여자가 단상에 오르며 마이크를 잡았다.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와 함께 아래 자막이 함께 지나가기 시작했다.

「저 탑은 재앙 그 자체다. 약속된 시간이 다하는 그 즉시 돌이킬 수 없는 혼돈과 함께 종말의 날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들의 방해로 인해 별들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아직 무사하다면 지금 당장 그곳에서 도망쳐라. 그들의 목적은 멸망 그 자체.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안전한 곳은 없다.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그대들이 무사해야만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어딘가에 있을 나와 같은 임무를 지닌 자여. 그대에게 내 말이 닿길 바란다. 레굴루스가 전한다.」

알쏭달쏭한 자막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나만은 마지막에 스친 익숙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뭐? 레굴루스라고?”

별이니 뭐니 하던 게 설마 성좌를 말한 거였나? 전에 지나가듯이 보긴 했지만 레굴루스는 분명…….

‘하말, 알데바란, 카스토르, 아쿠벤스…. 레굴루스!’

맞아, 사자자리였어!

손을 꼽으며 이름을 외다 레굴루스가 사자자리의 알파성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드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수상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레굴루스가 방금 전까지 있던 단상을 공격했다. 난무하는 스킬들에 난장판이 된 곳을 비추던 카메라는 결국 빗나간 스킬을 맞고 까맣게 변했다.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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