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25.
붕 뜨는 느낌은 찰나였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추락하는 몸이 세찬 바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사정없이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빛나는 것을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제발 좀!!’
손가락 끝을 스치며 미끄러지던 봉이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드디어 잡혔다. 봉을 낚아채자마자 곧바로 문양에 가져다 댔다.
「00:00:00」
「손을 떼지 마세요. 해금 100% 완료.」
카운트다운의 숫자가 0이 되기 무섭게 해금 역시 100%를 찍었다.
「퀘스트 ▒▒!」
‘씨발……. 성공이라는 거야, 실패라는 거야?’
눈앞에 뜬 퀘스트창은 실패와 성공이 겹쳐져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자세히 보려 했지만 그 뒤로 줄줄이 떠오르는 온갖 알아보기 힘든 오류 메시지들에 가려 금세 사라졌다.
뭐가 됐든 이젠 끝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에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나마 하나 다행이라면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개며 다시 햇빛이 비치고 있다는 거였다. 이제는 떨어지는 일밖엔…….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은 순간 갑자기 두꺼운 뭔가에 의해 목이 죄어 왔다.
“커헉!”
나도 모르게 목을 부여잡았다. 급히 더듬는 손에 만져지는 건 분명 목줄이었다. 투명화되었어야 할 것이 갑자기 왜…!
숨이 막혀 버둥대는데 목줄로부터 빛이 나는 사슬이 뻗어졌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은 사슬에 난 그대로 공중에 멈췄다.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혼란스럽게 중첩되는 오류들 위로 깨끗한 시스템창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주인님이 ‘이리 온’을 하셨습니다. 서둘러 주인님께 달려갑니다.」
이게 갑자기 왜 뜨는 거지? 혹시 성산하가 온 건가 싶어 죄이는 목줄을 짜증스레 잡아 늘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바짝 가까워진 지면에서 날 올려다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성산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중간에 멀뚱히 떠 있으려니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길 지경이다. 자아를 가진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슬을 잡고 몸부림치는데 지지할 곳 없던 몸이 한순간 아늑한 품에 안겼다.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반가운 얼굴이 비쳤다.
“성산하.”
주위를 살피던 매서운 시선이 날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습관적으로 휘던 눈매가 이마의 밴드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더 속상한데.”
“뭐라고?”
성산하가 내 얼굴 위로 손을 내렸다. 가까워지던 흰 장갑이 시야를 가렸을 때 이마에 따듯한 기운과 함께 찢어진 살이 아무는 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으로 뛰어내린 거야. 내가 못 잡았으면 어쩌려고.”
“그야 당연히…….”
답지 않게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에 말끝을 흐렸다. 성산하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눈을 가린 장갑 탓에 그러지 못했다.
성산하가 오고 있는 걸 알았고, 성산하는 그 누가 얼마나 다치든 목숨 줄만 붙어 있다면 충분히 살려 낼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니 이건 결국 확률의 문제였다. 뛰어내렸을 때 운이 나쁘면 죽는 거지만 뛰어내리지 않으면 100% 확률로 망하는 거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않을 이유가 있어?
‘물론 공중에서 구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만…….’
대수롭지 않게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며 답했다.
“널 믿고 있었으니까.”
손을 치우고 마주한 성산하의 얼굴은 화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내 눈을 피하더니 달싹이던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알고 이러는 건지.”
나직하게 한숨을 뱉은 성산하가 공중에서 발돋움했다. 어깨 너머 보이는 녹스 본사가 빠르게 멀어졌다.
‘비행 스킬 개좋네. 부럽다.’
작아지는 건물을 멍하니 쳐다보다 퍼뜩 성산하의 옷깃을 붙잡았다.
“잠깐! 저기에 청이랑 제로가 있어, 둘 다 데려가야 해.”
내가 말함과 동시에 녹스 본사 아래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는 곳까지 차가운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처, 청아…, 제로…….”
넋을 잃은 채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을 바라보는데 근처 옥상에 내려선 성산하가 천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임단이 갔으니 둘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보다 너.”
성산하가 아직도 녹스가 있는 쪽을 힐끔대는 내 볼을 감싸 저를 보게 만들었다.
“돌아가기 전에 치료부터 해야겠어. 힐할 거야. 싫어도 참아.”
“크게 다친 거 아니야. 그냥 포션 먹으면 괜찮…. 야!”
내 몸에 둘러진 붕대 위로 은빛 단도가 닿았다. 서늘한 감각에 몸을 바짝 굳혔다. 뾰족한 끝이 천천히 가슴 사이를 갈랐다. 그 길을 따라 단단히 매어져 있던 붕대가 잘려 나가며 희멀건 살이 보였다.
‘원래 힐할 때 벗어야 했나?’
빛나는 단도 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이는데 어느새 드러난 맨가슴 위로 성산하의 손끝이 닿았다.
“어딜 다쳤어? 여기? 아니면…….”
명치에 닿은 손가락이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간지러운 감각에 다급히 성산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거, 거기 아니야! 씨발 어깨…라고.”
“그렇군, 어깨.”
큰 손이 한 번에 왼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어깨를 살피는 성산하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그늘진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완벽한 자리에 위치한 예쁜 입술까지.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닮았어.’
“태제헌이야?”
홀린 듯 보던 입술이 움직이는 것에 화들짝 놀라 눈을 뗐다.
“어?”
“됐어, 구태여 들을 필요도 없지.”
성산하가 잡은 곳으로부터 따듯한 기운이 전해졌다. 포근한 감각에 점점 몸이 나른해졌다.
‘힐을 받는 건 기분 나빠야 맞는 건데, 그래야 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 좋지?’
힘이 빠져서 온몸이 늘어졌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감기는 눈에 겨우 힘을 줬다. 단순히 지쳐서가 아니다. 이건 정말 전과는 달랐다.
흐물거리는 팔을 들어 성산하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성산하. 이거 이상해. 몸에 힘이…….”
“응. 이상한 거 아니야. 버티지 말고 눈 감아.”
“아니, 난 자고 싶지, 않은…….”
누가 마음대로 스킬을 쓰래, 욕이 턱 끝까지 치솟았지만 온몸에 힘이 풀려 눈을 길게 깜빡이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잘 자. 강의진.”
다정한 손길이 가슴팍을 토닥였다.
***
폭신한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적당히 부드럽고 사락거리는 감촉이 마음에 들어 기분 좋은 신음이 샐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이불…….’
한참 동안 늑장을 부리다 서서히 잠기운이 개고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맞다. 나 녹스에서 탈출했지. 그럼 여긴 어디지?’
꿈뻑꿈뻑 눈을 깜빡이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긴 호텔 방 안이었다. 자리서 일어나 침실을 나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한서진…?”
“형! 일어났어요?”
한서진이 단숨에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여긴 어디야? 성산하는?”
“호텔이에요. 형 여기 온 지 벌써 이틀 지났어요. 좀 더 쉬어요.”
“이틀이라고? 잠깐…, 이틀이나?”
생각보다 많이 흐른 시간에 서둘러 두 손을 펼쳐봤다. 양손에 카스토르의 문양이 선명했다. 곧바로 무릎을 굽혀 구름이를 불렀다.
“구름아! 구름아…?”
발목을 톡톡 두드리며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구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점점 부르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구름아…….”
흔들리는 목소리로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구름이가 튀어나왔다.
“구름아!”
“메에에에!!”
나를 보고 반갑게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던 구름이가 옆의 한서진을 보더니 한서진의 다리에 콩콩 머리를 박으며 위협했다. 결국 한서진이 못 이긴 척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당당하게 턱을 치켜올린 채 승리를 만끽하더니 내 품에 달려와 안겼다.
“응. 응, 그래. 구름아. 괜찮아? 내가 미안해. 아팠어?”
“미에에!”
“아프진 않았어? 다행이네. 이젠 절대 안 뺏길게. 그 새끼 내가 완전 혼쭐내 줬어.”
그 말엔 구름이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콧김을 뱉었다.
봉인된 상태에서도 밖을 볼 수 있었나? 머쓱하게 웃고 마는데 한 발 뒤에 빠져 있던 한서진이 물었다.
“배는 안 고파요? 룸서비스 시킬까?”
“아니. 방금 일어나서 별로 입맛 없어.”
고개를 젓고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호텔로 와서 옷을 갈아입힌 건지 지금은 헐렁한 잠옷만 입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나갈 수가 없어 옷장을 기웃대며 물었다.
“그보다도, 내 옷은? 나 공방 가 봐야겠어.”
“어딜 나가요. 태제헌이 형 납치해 가려고 혈안이 된 상태인데.”
“……그래?”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지금 태제헌이 얼마나 빡쳤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공방에 가야 하는데 어쩐다…….
나를 찾느라 혈안이 된 상태라면 다른 사람들이 더 위험해졌다는 말일지도 몰랐다. 고민하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입을 열려던 차에 한서진이 먼저 선수 쳐 말했다.
“다들 여기 있어요.”
“뭐?”
“원승원 씨나 형 거래처들. 모두 여기서 지내는 중이니 괜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여긴 센터랑 천랑이 함께 보호하는 구역이니까 안전해요.”
그 말대로라면 확실히 믿을 만하긴 했다. 한서진이 내 어깨를 잡아 다시 침실로 이끌며 말했다.
“제가 연락할 테니까 더 누워 있어요. 다들 쉬는 중이라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어……. 고마워. 부탁한다.”
한서진이 어딘가로 연락하는 사이 침대에 누워 구름이와 함께 뒹굴며 그간 떨어져 있던 만큼 마구 쓰다듬어 줬다.
“나중에 공방 가서 맛있는 거 많이 줄게.”
“메에에에!”
“상달그라스의 열매랑, 졸린 가지랑……. 비싸고 좋은 것들 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