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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28화 (128/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28.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성산하의 얼굴이 있었다. 임단을 향해 방긋 웃고 있던 성산하가 슬쩍 눈길을 돌려 나를 봤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옅은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성산…….”

멍하니 중얼거리던 이름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시선이 거둬졌다. 무언가 낯선 기분에 멈칫했다.

‘뭐지? 오늘따라 꼭…….’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내 시선을 피한 것처럼 느껴졌다. 부드럽게 접힌 눈꼬리나 여유로운 웃음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대로인데도.

옅은 의문은 임단의 퉁명스러운 말에 사라졌다.

“이집트 갔다면서 벌써 와도 되는 거야? 아예 눌러앉아 버리지.”

“서운한 소릴. 보는 눈도 많은데 들어가서 얘기할까?”

“하아, 불청객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삐딱한 태도였지만 밖의 스토커들이 신경 쓰이긴 했는지 임단이 막고 있던 문을 열어 줬다. 승연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산하와 함께 온 건지 오랜만에 보는 이초가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호…. 큼큼, 사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초! 오랜만이다. 나야 멀쩡하지.”

“다행이네요. 오래 주무시는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산하 님이 안 계셔서 저라도 자주 들리려고 했는데 눈치가 보여서…….”

“눈치? 왜, 서진이가 쫓아냈냐?”

“하핫. 아닙니다. 과일 바구니 두고 나왔는데 한서진 에스퍼가 전달했나요?”

“아니. 보진 못했는데 아마 방에 있을 거야. 고마워.”

예의상 감사를 전하며 앞서가는 성산하를 바라봤다. 임단의 말로 보아 또 외국에 다녀온 모양이던데…….

‘이집트는 레굴루스가 있던 곳이잖아.’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뉴스 송신이 끊겨 그렇잖아도 걱정이 됐는데 성산하가 이집트에 다녀왔다니 분명 성좌에 관련된 일이다.

“이초, 성산하 말이야 이집트엔 무슨 일로 간…….”

“그걸 지금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이초에게 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임단에 내 목소리가 묻혔다. 번쩍 고개를 들자 그저 태연한 성산하 앞에서 임단이 씩씩대며 열을 내고 있었다.

“우리 순진한 청이 꼬셔서 데려가더니 피떡을 만들어서 데려왔잖아. 애초에 심부름과 경호 정도라고 소개했으면서 사이비에 녹스까지 엮인 일에 끌어들여? 사기꾼 자식아!”

“초는 임청에게만 연락했을 텐데 내부 사정을 아주 꿰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수상쩍은 계약을 한다는데 확인하지 않는 건 언니로서 직무 유기라고 생각해.”

“보통은 그걸 뒷조사 내지 과보호라고 하는 것 같던데. 임청도 자길 향한 언니의 관심이 이렇게 지대한 줄은 알고 있나? 왜 그렇게 연고 없는 헌터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는지 이제야 알겠군.”

“뭐? 너 말 다했어? 지금 청이가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거야?”

위화감이 느껴지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는데 안쪽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임단이 기겁한 표정으로 문으로 다가갔다.

“……너 나간 거 아니었어?”

“아까 돌아왔어.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그때까지도 성산하와 임단의 대화를 파악하느라 정신없던 나는 드디어 내려진 결론에 옆에 서 있던 이초에게 뚱하니 물었다.

“야. 청이 성산하가 보낸 거냐?”

“그게…….”

“자유 용병이 아니라 천랑 소속이었어?”

“사, 사장님? 설마 여기 계셔?”

임단의 뒤에서 청이가 뛰쳐나왔다. 막 씻고 나온 건지 젖은 머리에 어깨엔 수건이 걸쳐진 모습이었다.

“사장님…….”

“어! 청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청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제야 청이를 발견한 나도 놀라 다가갔다. 평소와 달리 경계심을 잃은 청이의 얼굴에 태제헌에게 맞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날의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고 다가가 청이를 살폈다.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너 몸은 괜찮아?”

“멀쩡합니다. 사장님, 그, 제가 드릴 말씀이…….”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단 좀 해 보자.”

‘의신의 손길’을 사용하기 위해 청이에게 손을 뻗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막았다. 성산하에게 손목을 잡힌 채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은 임단의 싸늘한 눈초리를 황당하게 받아 냈다.

“뭐야, 청이한테 뭐 하려는 거야?”

“잠깐 진단 좀 해 보게.”

“내가 힐해 뒀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성산하 네가? 아, 맞다. 청이 네 프락치랬지…….”

새삼스러운 사실에 혼잣말하자 청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사장님. 아닙니다. 권유를 받고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제 모든 것을 걸고 결단코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청이의 고개가 점점 숙어졌다. 땅을 파고 들어가는 청이의 목소리에 임단이 한숨을 쉬며 거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를 턱짓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해.”

임단이 머무는 2709호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으니 거실이 꽉 찼다. 소파 상석에 앉아 이 상황에서도 태연한 성산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데? 원래 알던 사이였어?”

“고급 인력이 놀고 있기에 슬쩍 언질해 주긴 했지. 엄청난 실력자가 운영하는 재야의 공방에서 용병을 구한다고.”

틀린 소리 하나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뭐. 깨끗하게 풀리는 의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난 또, 청이가 천랑의 첩자라도 되는 줄 알고 놀랐네.”

“저는 천랑 길드장의 첩자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청이가 절박하게 변명했다.

“용병 구인에 대한 사실은 전해 들었으나 계약하기로 한 것은 오롯한 제 의지였습니다. 공방에서 일하며 받은 임무나 내부 시스템 그 어떤 것도 밖으로 누설한 적 없습니다.”

“뭐? 당연하지. 우리 전결서약까지 맺었잖아. 그리고 넌 날 구하러 녹스까지 왔는데. 나는 내 용병 믿어.”

“사장님…!”

“청아!!”

무릎 위 주먹을 꾹 쥔 청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와 청이를 번갈아 보던 임단이 황당한 얼굴로 날 손가락질했다.

“웃기네! 내 용병은 무슨 용병? 위약금은 내가 물어 줄 테니까 지금 당장 계약 해지해. 임청, 너도 정신 차려. 이번에 그딴 꼴 당하고도 아직 저기에 정이 남아 있니?”

“…….”

청이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임단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단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너 정말…!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손님 하나 없이 다 쓰러져 가는 구멍가게에 있어야 해? 게다가 녹스 출신을 뭘 믿고!”

끔찍한 수식어와 구멍가게라는 멸칭에 목뒤를 붙잡고 쓰려질 뻔했다.

“구, 구멍……. 뭐?”

“이런, 화풀이를 애먼 사람에게 하면 안 되지.”

성산하가 휘청이는 내 등을 받쳐 줬다. 청이가 그런 날 돌아보더니 화난 표정으로 임단을 노려봤다.

“그만해. 내가 몸담은 공방이고 내가 모시기로 한 사장님이야. 더 이상 모욕한다면 너라도 참지 않겠어.”

“임청! 너…, 너……!”

단호한 청이의 말에 임단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뻐끔댔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세계 제일의 용병다운 맹세에 감격에 겨워 청이를 바라보다 구석에서 킥킥대는 제로를 발견했다. 음흉한 웃음에 눈이 가느다래졌다.

‘수상한 걸로 치면 청이보다 몇 배는 더 수상한 게 제로인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를 본 제로가 웃음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죠?”

“넌 어디 사주받고 온 거야?”

“사주라니요. 그런 서운한 소리를. 저는 남의 명령이나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용병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는 아니다. 믿기지 않아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쳐다보자 제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와 말하지만, 사실 투명하리만치 무해하고 아주 소소한 목적이 하나 있긴 했습니다.”

제로가 굉장히 수상하고 음험한 얼굴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수배…. 구해 보려는 희귀한 아이템이 있었는데 소유자 중 유일하게 밝혀진 사람이 임청 헌터라서요. 하지만 임단 헌터의 과보호에 영 틈이 안 나왔거든요. 그런데 임청 헌터가 뜬금없이 공방 용병으로 지원을 한다지 뭡니까.”

“그래서 청이를 따라온 거라고?”

“처음이야 그랬죠. 하지만 이후는 전에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아이템보다 더 흥미가 가는 게 생겨서.”

나를 보는 제로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옆에 앉아 있던 승연이가 질겁한 눈으로 슬쩍 제로에게서 멀어졌다.

내 공고문 보고 온 줄 알았는데 둘 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니. 용병들의 비밀에 승연이와 내가 머리를 짚는 사이 제로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임단이 들으라는 듯 청이에게 중얼거렸다.

“저런 데에 널 다니게 하라고?”

“…….”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잔소리를 모두 무시하는 청이에게 지쳤는지 한숨을 쉰 임단이 성산하에게 말했다.

“됐고,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하기로 한 것도 지금 모두 정하는 게 어때? 더 이상 사적으로 엮이는 일은 없었으면 하거든.”

“여기 계속 머무르는 거 아니었나?”

“내 집 놔두고 왜? 청이랑 내일 돌아갈 거야. 퀘스트 때문에 남아 있던 것뿐이야.”

임단의 쌀쌀맞은 통보에도 청이는 가만히 시선을 떨군 채 제 앞의 컵만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고집스러운 태도에 불똥이 내게 튀었다.

“들어가도 어쩌다 하필 저런 이상한 사람 밑에 들어가선……!”

청이가 나 때문에 다친 건 사실이기에 날 향한 적개심에도 차마 뭐라 말도 못하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 내며 사장의 무게를 견뎠다.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가는 임단에게 제로가 실실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그래도 정 좀 붙이셔야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그뿐인가요? 소중하게 보호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퀘스트를 하는 의미가 있어? 고생만 하다 실패할 게 뻔한데.”

“사장님 욕하면 참지 않는다고 말했어. 난 사장님 곁에 남을 거니까 너 혼자 돌아가.”

“임청 너 정말……!”

상황상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이상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화에 머리를 긁적이다 승연이에게 물었다.

“왜. 뭔데? 나랑 관련된 일이야?”

“저, 저도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

기죽어 말하는 승연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단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네가 성좌를 가지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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