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30.
어쩐지 아직 비활성화된 메인 퀘스트와 달리 지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니! 씨발, S급들한테 내 위치 추적기를 뿌리면 어떻게 해?
머리를 부여잡고 형체 없는 시스템창을 마구 욕하는데 성산하가 머리를 쥐어뜯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태제헌도 그렇지만 그 외의 S급들도 위험해. 알다시피 사이비가 워낙 깊이 침투해 있어서 말이야.”
손이 잡혀 천천히 팔을 내렸다. 한층 더 가까워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벽에 가로막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작게 웃은 성산하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차라리 드러내서, 사람들의 시선 속에 숨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데. 어때.”
“……안 될 것 없지.”
“좋아.”
코앞에 있던 성산하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제 볼일은 다 끝냈다는 듯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까딱이는 놈을 불만스레 바라봤다.
‘저거 말하려고 불렀단 말이지.’
일이야 대충 결론 났는데도 왜 이렇게 불만 가득하게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원래 사나를 만나면, 성산하를 만나면…….
“강의진? 더 할 말 있어?”
“…….”
저렇게 부르는 것도 싫다. 전엔 작은 목소리로 귀엽게 ‘형…….’ 하고 불렀었는데. 아니면 차라리 주호현 부를 때처럼 의진아, 하던가.
이유 모를 화풀이에 점점 유치해져 가는 감정이 느껴져 고개를 저어 털어 버렸다.
‘됐어. 뭐 이건 나중에 얘기해도 되는 거니까. 당장 퀘스트가 바쁘니 어쩔 수 없지.’
“너 왜…….”
“아니야. 나가자.”
“강의진!”
“놔라, 이 미노타우로스야.”
“뭐……?”
황당함에 멈춰 버린 성산하를 피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히끅!”
“여기서 뭐 하냐?”
비상구 앞에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연승연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호, 호현 님…. 아니, 그게 아니라 의지, 의, 사장님…….”
다 들었구나.
연승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나’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디서부터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내가 강의진이라는 건 말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상관없고.
성산하는 바짝 얼어붙은 연승연을 흘깃 내려보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먼저 가지.”
“어. 나중에 연락하……. 아, 성산하! 나 휴대폰 하나만 사다 줘!”
성산하가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히끅! 끕!”
입을 틀어막은 채 딸꾹질을 삭이느라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승연을 내려다봤다.
이젠 이게 문제네…….
“……왁!”
“흐아아악!! 호현 님!!”
갑자기 놀래키자 펄쩍 뛴 연승연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부터 튀어나왔다. 곧 엿들어서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승연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딸꾹질은 멈췄네. 방 옮길 준비 다 했어? 아까 짐 안 들고 왔잖아.”
“조금 싸 놓긴 했는데 호, 혹시 마음 바뀌셨을까 봐 허락받고 들고 오려고…….”
“마음이 왜 바껴. 그럼 네 방부터 들렀다 가야겠다. 몇 층이야?”
“11층….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턱을 괸 채 우당탕탕 헤집으며 짐을 싸는 연승연을 빤히 구경했다. 여기서 몇 주간 지냈다더니, 확실히 짐이 꽤나 많았다.
지나갈 때마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고 한 번에 옮기면 될 것을 몇 번 걸쳐서 옮기는 꼴을 보다못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났다.
“도와줄게. 어디부터 하면 돼?”
“아, 아닙니다! 거의 다 했습니다! 호혀, …의…. 호…. 사장님께선 그냥 앉아 계세요!”
“둘만 있을 땐 그냥 편하게 불러. 어차피 나중에 다 밝히기로 했어.”
연승연이 안고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유리로 된 플라스크까지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치우면 됩니다! …진 님은 그냥…….”
“다쳐. 움직이지 마. 빗자루 같은 거 어디……. 안 되겠다.”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거리는 꼴이 곧 피를 볼 것 같아 고민 없이 승연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공중에 뜬 몸이 바짝 굳어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소파에 내려놓으려는데 귓가에 벌레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슨 헛소리지? 많이 놀랐나?
소파에 내려놓고 얼굴을 살피자 연승연이 손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포션 마스터님은 제가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센터고 포션 마스터님은 녹스에서 잘 나오시질 않으니까 평생 만나는 일은 없겠다 여겼는데……. 호현 님을 만나고 정말 놀랐습니다. 처음으로 포션 마스터 강의진에 대적할 만한,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연승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태제헌이 사장님을 데려갔을 때, 코앞에서 강의진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 정말 놀랐지만, 의심하면서도 정말 의진 님일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산하 씨 말을 듣고도 마찬가지예요. 백 퍼센트 믿기지가 않아요. 왜냐면…, 왜냐면 사장님은 가이드셨으니까요.”
“…….”
“어떻게 된 일인지…. 어, 어쩌다 의진 님이 센터에서 가이드로 계셨던 건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도 용기를 내 끝까지 말을 잇는 연승연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됐다…….란 답 외에는 해 줄 말이 없는데. 사실 네가 아는 강의진이 나긴 한데, 자살했다가 눈 떠 보니 주호현 몸에 들어온 상태다. 근데 우리 둘이 쌍둥이인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냐고.
‘맞다. 우리 유전자 검사 해야 하는데.’
급히 챙긴 머리카락이 전에 입고 온 옷에 들어 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마 빨다가 사라지진 않았겠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민하느라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있어. 그것까진 말하기 어려워.”
“아, 넵. 당연합니다…….”
또 순식간에 풀 죽어 쭈그러드는 연승연을 달래 일으키며 물었다.
“승연아. 너 공방에서 제작 도구들도 챙겨 온 거야? 재료들도 있어?”
“네. 연구하느라 숙성 중인 재료가 아까워서 간이로라도 연구 진행하려고……. 재료도 몇 개는 있습니다.”
“아 그러면 버들솜털이랑 플라로리라니안 말린 거, 슬라임의 진액, 우왕의 뿔, 믿음의 눈물, 졸린 가지 가지고 있어?”
“어어…. 버들 솜털이랑 슬라임의 진액, 졸린 가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왕의 뿔은 없고 대신 유니콘의 뿔 가루는 있는데 이걸로는 안 될까요?”
골똘히 고민하며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세던 연승연이 고민하며 물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내가 원하는 효과는 낼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자. 그럼 말린 플라로리라니안이랑 믿음의 눈물만 없는 거지. 말린 플라로리라니안은 흔한 재료라 몇 개 다른 거 넣어 보면 대체품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믿음의 눈물이 문제네. 이건 대체하기 어려운데……. 승연아 너 휴대폰 있지.”
“네? 네. 있습니다.”
“제로한테 구해 달라고 해. 최대한 빨리.”
“네……!”
***
챙긴 짐들은 직원이 옮겨 준다기에 방문 앞에 쌓아 두고는 일단 몸만 먼저 올라갔다. 승연이와 함께 걸으며 공방의 어두운 미래와 내 정체를 밝혔을 때 따라올 이득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데 누군가 내 방문 앞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어? 한서진!”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한서진의 서늘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지금까지 어디 있다 왔어요?”
“어디 있긴. 내가 호텔 말고 갈 데가 있냐? 잠깐 애들 좀 만나고 왔어.”
“누구요. 헌터들?”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 평소보다도 예민한 반응에 의아하게 물었다.
“응. 성산하랑 청이랑…….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딱딱하고 평소보다 싸가지가 없는 게 어디 아픈가 싶어 열을 재는 척 ‘의신의 손길’을 사용할 셈이었는데 이마에 손이 닿자마자 한서진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무슨, 아무 일 없어요. 그냥, 밤 되도록 연락도 안 되고 그러니까.”
“웃기는 새끼…. 휴대폰 안 사 준 건 저면서 무슨 연락 타령이야? 일단 들어가자. 밥 먹었어?”
“……아니요.”
“잘됐네. 같이 먹으면 되겠다. 아까 하얀 누나가 여기 룸서비스 맛있다고 그랬어.”
주춤주춤 내 뒤를 따라오는 연승연을 노려본 한서진이 연승연을 작은 방으로 몰아넣더니 큰 키로 문간을 막아섰다.
“이쪽 방 쓰시면 되겠네요. 한번 둘러보시죠.”
“제, 제가 알아서 하면 될…….”
“편히 쉬세요.”
결국 문까지 닫아 버린 한서진이 상쾌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다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떨었으면서 아닌 척하고 다가오는 한서진의 팔을 아프지 않게 쳤다.
“왜 애를 괴롭혀.”
“……전 사람 있으면 못 자요. 우리 방에 먼저 다른 사람 데려온 건 형이잖아.”
“왜 우리 방이냐? 나도 큰 방 혼자 쓸 거다.”
“헛소리 마요.”
투덜대면서 연승연 몫까지 삼 인분의 음식을 주문한 한서진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웬만하면 헌터들이랑 깊이 어울리지 마요.”
“너희 천랑이랑 손잡은 거 아니었어? 어차피 여기도 같이 지킨다면서.”
“그중 또 누가 녹스의 사주를 받았을지 모르잖아요. 헌터는 우리랑은 달라요. 언제든 자기 이득따라 소속 옮기는 가벼운 족속들이니까.”
까놓고 보면 나는 에스퍼·가이드 센터보다는 헌터 협회 쪽에 더 가까운데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서진의 말은 대충 흘려 버렸다.
연승연의 이사까지 안전히 끝내고, 편히 잠에 들던 첫날. 잠결에 한서진이 누군가와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다고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이 밤중에 누구랑 전화를 하는 거야.’
일어날까 싶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불에 폭 감싸인 상태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이불 더미에 귀를 파묻고 다시 잠을 청했다.
“……지금은 상세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해도 센터에는 이득인 일입니다. ……네. 이해했으면 신원 부활 절차 서둘러 진행시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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