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31.
“제로는 어디 있대?”
“방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주차장이라고 합니다.”
호텔 지배인에게 허락을 맡고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식당에 간이 작업실을 차렸다. 호텔 전체를 천랑과 센터가 임대해 일반 손님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 보이지 않는 한서진 대신 승연이와 함께 로비로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추더니 성산하가 올라탔다.
“성산하!”
“좋은 아침.”
살짝 눈웃음친 성산하가 그대로 등을 돌려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본 채 서 있는 게 아닌가!
여태껏 날 놀리려 작정한 것처럼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어 대거나 하다못해 실없는 소리라도 뱉던 놈인데 오늘은 모르는 사람처럼 과묵한 체 인사만 하고 끝내다니.
‘뭐 잘못 먹었나.’
그러고 보니 어제도 좀 이상했던 것 같고…….
내게 등진 모습을 낯설게 보다 반질반질한 성산하의 구두 뒤축을 발로 툭툭 찼다.
“야, 야. 성산하.”
“음? 왜 그러지. 무슨 할 말 있어?”
“꼭 할 말이 있어야 하냐? 우리 사이에?”
의진 님……. 연승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 옷자락을 잡았다. 피식 웃은 성산하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손을 뻗다 멈칫하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거둬들이며 물었다.
“어디 가?”
“제로가 재료 구해 왔대서. 작업실 갈 거야.”
“아아, 그 레스토랑에 차렸다던. 이번엔 또 어떤 포션을 만드려고?”
“링션.”
짤막한 답에 성산하와 연승연이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의진 님, 만드시는 게 링션이었나요?”
“링션이라면…….”
둘 다 그걸 굳이 왜 만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귀찮은 조건이 달린 데다 뚜렷하게 좋은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라 대중적으로 쓰이는 포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아침에 챙겨 나온 머리카락이 들어 있을 주머니 위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로비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버튼을 눌러 문을 잡은 성산하가 잘 가라며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에 나가려던 발을 멈추고 성산하를 빤히 쳐다봤다.
“……너 요즘 존나 이상하다?”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할 말 없냐?”
웃음을 담은 두 눈이 반으로 접혔다. 성산하가 애를 달래는 것처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나 했더니. 휴대폰은 이초에게 있으니 1414호 가서 주세요- 해.”
‘씨발 장난하나……. 누굴 애새끼 취급이야.’
누군 궁금해 묻고 싶고 답답해도 하고 싶은 말 꾹 참고 있는데 제멋대로 이상하게 굴면서 혼자만 저딴 여유라니, 부아가 치밀었다. 놈을 노려보다 울컥해 도발하듯 말했다.
“휴대폰 받으면 매일 전화할 거니까 받아.”
“뭐?”
“위치 보고하기로 했잖아. 주인님.”
목을 톡톡 치며 말하자 성산하의 여유롭던 표정이 무너졌다.
“강의진, 너……!”
얼마나 당황했는지 옅게 홍조까지 띤 성산하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통쾌했다. 신이 나 씨익 웃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성산하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 나가.”
“뭐?”
나도 모르게 발이 한 발 뒷걸음질 쳐졌다. 당황해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찰싹 붙었다.
「주인님이 ‘기다려’를 하셨습니다. 착하게 기다리며 주인님께 집중합니다.」
“야! 성산하!”
「주인님이 ‘조용히’를 하셨습니다. 입을 꼭 다뭅니다.」
“읍, 우웁. 으으읍!!”
“하아, 뭘 알고 이러는 건지…….”
착잡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던 연승연이 헐레벌떡 내게 달려왔다.
“의, 의진 님! 괜찮으세요?”
“으읍!”
‘저 개새끼가!!’
***
“링션을 만드신다고요.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별로 쓸모없는 것 아닌가요?”
가스레인지에 찰싹 붙어 냄비의 불 조절을 하는 연승연을 감시하는데 제로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링-션. 일시적으로 마나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포션, 단 혈연관계여야 가능하며 마나가 적은 쪽을 따른다.”
“거기서 계속 구경하게? 오늘은 일 없나 봐?”
“네. 이상하게 한가하네요. 제 유일한 직장이 요즘 무기한 휴업 중이라 그런가 봅니다.”
“…….”
“아, 혹시 나가라고 눈치 주신 건 아니겠죠? 후후, 하긴. 제가 믿음의 눈물을 구하러 양양까지 다녀왔다는 것을 빤히 아시는 사장님께서 절대 그럴 리가 없죠.”
“씨발, 원하는 만큼 평생 구경해라.”
제로가 방긋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네. 기꺼이.”
눈치도 빠른 새끼. 오늘은 웬만하면 보는 눈 없이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때 연승연이 나를 황급히 불렀다.
“의진 님! 색이 투명해졌습니다!”
“불 끄고 내용물만 서둘러 옮겨!”
승연이가 미리 준비해 둔 유리병에 약물을 퍼 담았다. 투명한 액체를 반쯤 퍼 올렸을 때에는 이미 잔열로 남은 액체들은 못 쓰게 된 상태였다. 승연이가 딱 눈금까지 찬 액체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정말 저 많은 것들 중 이만큼만 건질 수 있군요. 완벽한 계량입니다!”
“당연하지. 이런 건 눈 감고도 한다고.”
이제 남은 건 딱 하나. 이 과정에 링션의 정체성이 다 담겨 있었다. 주머니 속 깊은 곳에 있는 머리카락을 꺼내자 제로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원래 링션엔 의뢰인들의 피를 넣지 않나요?”
“피는 무슨……. 그거 프랑수아 새끼가 신비로운 척 이미지 메이킹한 거야. 유전 정보만 담겨 있으면 돼.”
머리카락을 유리병에 넣었다. 몇 가닥의 까만 머리카락이 투명한 액체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호오, 흥미롭네요. 그건 누구의 머리카락인가요?”
“의뢰인에 대한 정보는 비밀이야.”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다음은…….
“의, 진 님?”
“……설마.”
주호현의 머리카락을 넣어야 했으니까. 머리를 몇 가닥 뽑아 그대로 유리병 안으로 집어넣었다. 얼빠진 연승연과 제로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머리카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전처럼 머리카락을 녹여 버린 액체가 표면부터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연승연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아, 세상에. 이렇게 순도 높은 링션은 처음 봐요…….”
“제가 알기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 정도로 짙을 순 없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진하다는 것은…….”
중얼거리던 제로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장님 혹시….”
“쓸데없는 소리 마.”
링션을 들어 그대로 개수구에 흘려 보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처분에 뒤에서 연승연의 식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건 어차피 쓸 일 없는 포션이었다.
‘마나를 공유할 반쪽이 이미 죽어 버렸는데 순도가 높아 봤자지.’
콸콸 쏟아지는 푸른 액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걸로 증명되었다. 주호현과 내가 쌍둥이라는 사실이.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받은 순간, 우습게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예전에 시스템이 보여 줬던 ‘주호현’의 과거, 그 안에서 언뜻 보았던 부모님의 뒷모습이었다.
‘……그 사람들이 내 부모님이었나.’
가족의 부재에 슬퍼하거나 없는 그들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알게 되니 왜인지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주호현의 결말까지 알고 있으니.
‘바보 같은 자식…….’
내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서인지 제로와 승연이도 별말 않고 뒷정리를 도왔다.
“저……. 의진 님. 방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
“의진 님!”
“어? 어……? 미안, 뭐라고?”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다 뒤늦게 돌아보자 승연이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바로 방으로 돌아가실 건지…. 그렇다면 미리 점심 식사 주문해 놓으려고요.”
“아니, 오늘은 애들이랑 다 같이 먹자. 제로 너도 먹고 가. 한가하다며.”
“좋습니다.”
“승연아. 애들한테 연락 안 왔어?”
“받긴 했는데 의진 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 일단 보류해 뒀습니다……. 곧 점심시간이니 바로 라운지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아, 그 전에 들릴 데가 있어.”
승연이와 함께 간 곳은 14층이었다. 생각난 김에 이초에게 휴대폰을 받아 갈 생각이었다.
“14……. 1414호! 여기다.”
이초가 있다는 1414호 앞에 서서 벨을 누르려는 순간 안쪽에서 소음이 들리는 듯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나온 여자와 마주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그쪽.”
“어어? 당신은…….”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분명 본 얼굴인데!
여자 역시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재빨리 머릿속 기억을 뒤졌다. 녹스는 아니야, 우리 공방 손님도 아니고. 그럼 남은 건 센터?
“나연아. 왜? 무슨 일 있…….”
안쪽에서 이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크게 열림과 동시에 여자와 나는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맞아! 잘생긴 손님!”
“서울 센터 기사님!”
이제야 기억났다. 오나연. 서울센터에서 만났던 사람 좋은 버스 기사!
날 향해 접힌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 반지까지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천랑에 있지?’
“무슨 소란이……. 호, 호현 님?”
오나연의 다이아 반지랑 친밀하게 붙어 있는 이초를 번갈아 봤다.
“어라. 둘이 왜 같은 방에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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