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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34화 (134/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34.

“예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건 다 거짓이잖아. 나보고 연기를 하라는 거야?”

“하지만 다들 이렇게 합니다. 매체에 나오는 이상 어쩔 수 없어요. 유명 헌터들도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다 따로 있는걸요. 산하 님도 마찬가지고요.”

이초의 말에 예전에 던전에서 목격했던 임단과 성산하의 공익 광고가 다시금 떠올랐다.

[산하야, 너는 헌터의 덕목이 뭐라고 생각해?]

[세상에, 정말 위험하겠는걸?]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임단의 실제 성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성산하 역시 마찬가지고.

‘그게 다 연기였다는 거잖아.’

다들 그런다고 나까지 꾸며 낸 모습으로 모습을 비추고 싶진 않았다. 난 그저 내가 강의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연기를 해야 한다면 죄다 의미 없는 일이잖아.

영 달갑지 않은 표정을 눈치챘는지 이초와 홍보팀이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나는 승연이 옆에 앉아 간식을 주워 먹으며 안쪽으로 회의를 하러 간 직원들을 기다렸다.

“심심하진 않았어?”

“아, 아니요! 재미있었습니다. 유명한 헌터들은 이미지까지 다 따로 관리한다는 걸 듣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사실 전부 의진 님께 자,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잘 어울리긴, 네가 몰라서 그래.”

“하지만 정말인데…….”

승연이가 아쉬운 얼굴로 아까 앉아 있던 자리를 힐끔댔다. 그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승연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직원이 펼치다 시에라가 슬쩍 제지하는 바람에 곧바로 닫힌 책자가 있었다. 그때 똑똑히 봤다. 거기 적혀 있는 「콘셉트 별 행동 수칙」이라는 글자를. 그 아래엔 이를 보이고 웃지 않는다, 목소리는 일정 데시벨 이상을 넘지 않는다 등의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적혀 있었다고.

다시금 절대 저 콘셉트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단단히 다짐하며 음료에 있는 얼음을 아작아작 씹었다.

머지않아 초와 직원들이 나왔다. 홍보팀 직원들이 펼쳐 놨던 콘셉트 자료들을 정리하는 사이 이초가 시에라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일단 의진 님이 바라지 않으시니 콘셉트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 두기로 했습니다. 산하 님도 의진 님의 뜻을 가장 우선하라 말하셨고요.”

“정확히는 시킨다고 들을 애도 아니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라고 하셨지만요.”

시에라가 웃으며 속삭였다.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기도 잠시, 이초가 태블릿을 꺼내 들고 말했다.

“콘셉트는 최대한 의진 님 본연의 모습을 살리는 쪽으로 재회의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다만 본 촬영과 인터뷰가 문젠데, 반말 투는 S급 각성자이니만큼 고유한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굳이 교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다만 공식 석상에서 욕설은 절대, 절대 삼가셔야 합니다. 또한 의진 님에 대해 보도 자료로 공개될 정보와 아닌 정보는 여기 준비해 두었으니 내일 인터뷰 전까지 꼭 숙지하시고요.”

이초가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를 꺼내 내게 안겼다. 착잡한 얼굴로 품 안의 서류를 내려다봤다.

“의진 님. 탑 보유국 회의는 전 세계의 수장과 그에 준하는 헌터들이 자리하는 곳입니다. 그런 자리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다는 것은, 경외와 더불어 시기 질투 역시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아무리 의진 님이라 하더라도 보수적인 시선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탑 위의 왕자님 하기 싫다고 했다가 숙제만 떠안았다. 차라리 이게 다 포션 레시피북이었다면 신나게 봤을 텐데.

***

몸이 뜨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코앞에 한서진의 얼굴이 있었다. 침실문을 발로 밀어 열던 한서진이 시선을 느꼈는지 날 내려다봤다.

“왜 불편하게 밖에서 자고 있어요.”

“…몰라, 잠깐 졸았나 봐.”

“더 자요.”

당장 인터뷰가 내일이라 소파에서 이초가 준 종이를 읽어 보고 있었는데…….

고갤 돌려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소파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구겨진 이불 하나를 제외하면 간식을 먹고 놀았던 테이블은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다.

‘승연이가 덮어 준 건가.’

침대에 날 내려놓은 한서진이 이불을 덮어 주다 내 얼굴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서진이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뭐가?”

거둬진 놈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집게 핀이었다. 아까 콘셉트니 뭐니 하면서 머리 모양을 잡아 볼 때 핀 여러 개를 꽂았었는데 미처 발견 못한 하나가 아직까지 남아 있던 듯했다.

“아, 그거. 오늘…….”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던 중 오늘 이초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진 님께서 탑 보유국 회의에 참여해 정체를 밝히기로 했단 사실은 당일까지 함구 부탁드립니다. 특히 센터…. 그러니까 한서진 에스퍼에겐 더욱이요.

-서진이가 왜?

의아하게 물었으나 고민하던 이초는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게……. 아니, 아닙니다. 일단 기우일 뿐이니 며칠만 주의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겨우 나흘인데 뭐.

왜인지 찜찜하던 이초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나도 얼버무리고 말았다.

“별거 아니야. 애들이 장난쳤나 봐. …그런데 너 옷이 왜 그래? 어디 가냐?”

겉옷까지 다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묻자 한서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이 좀 늦어져서 제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 밤중에? 그냥 내일 가지. 중요한 일이야?”

“……네. 중요한 일이에요.”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심각해 보여 어서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한서진이 더 자라며 불도 끄고 떠났지만 한번 자다 깨 그런지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혼자 남자마자 튀어나왔을 구름이도 잠잠한 걸 보니 잠든 것 같고……. 이참에 이초가 숙지하라 했던 자료나 더 볼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학교 다녔으면 모범생이었을 게 분명해.’

그러나 서류는 방과 소파, 테이블 근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승연이가 가져갔나?”

승연이 방문을 슬쩍 열자 어둠 속에서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닫고 테라스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저 멀리 우뚝 선 탑을 응시했다. 달빛을 받은 탑은 밤인데도 스산한 기운을 내뿜으며 저 혼자 빛이 나고 있었다. 머릿속을 채우는 복잡한 생각들에 한참 동안이나 탑만 멍하니 바라는데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작은 잡음들에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성산하만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한서진이나 성산하나, 다들 이 시간까지 잠도 못 자고 일할 정도로 바쁜가 보다. 나도 내 공방만 있다면 밤새도록 포션을 만드느라 바빴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내 공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강의진인 것을 밝히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경호를 받으며 지낼 거고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수록 안전하다고 했으니 오히려 공방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이 기발한 생각을 어서 성산하에게 전해야 했다. 다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이미 호텔로 들어간 건지 정문 쪽은 텅 비어 있었다.

‘방금 들어왔으니까 자진 않겠지?’

하도 바쁜 놈이라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내일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슬리퍼를 신은 채 황급히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일부 사소한 문제가 있다는 건 등 뒤에서 내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알았다.

“맞다, 성산하 방 어딘지 모르는데.”

휴대폰도 방 안에 두고 나온 데다-우리는 서로 ‘차단’했기 때문에 어차피 연락하지 못했을 테지만- 호텔 방 키도 안 들고 나와 다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쩌지……. 머리를 긁적이다 슬리퍼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직원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로비에 도착했다. 그러나 늦은 밤이라 그런지 리셉션은 텅 비어 있었다. 직원이 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리며 호텔 밖에서 경계를 서는 헌터들을 구경했다. 새하얀 천랑 유니폼을 보자 자연히 성산하 생각이 났다.

이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피곤한 얼굴을 한 채 커피를 들고 돌아온 직원이 날 보고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방에 키를 두고 나왔어. 그리고 성산하 방 어딘지 좀 알려 줘.”

“네, 네?”

***

예상외로 성산하의 방은 나와 같은 층이었다. 서로 복도 끝과 끝이었지만.

33층에 머무는 고객은 성산하와 나뿐이라는 말에 자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신난 발걸음으로 성산하의 방으로 향했다.

‘방 키도 얻었고, 이제 성산하를 찾아가 공방만 되찾으면 된다-!’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성산하는 답이 없었다. 방에 없나 싶어 다시 벨을 누르곤 문까지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성산하. 야! 성산하! 문 좀 열어 줘!”

‘이 방이 아닌가? 아니면 그새 나갔나?’

다시 로비로 내려가 직원에게 호수를 확인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씨발 놀래라.”

“강의진? 무슨 일이야. 너 괜찮아?”

씻다 나온 건지 문틈 사이로 후끈한 공기가 풍겼다. 대충 걸친 가운의 벌어진 틈으로 훤히 보이는 상체의 근육들과 선명한 굴곡에 속으로 감탄이 흘렀다.

‘와, 씨. 장난 아니네. 따로 운동하나?’

멍하니 젖은 가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큼, 씻고 있으면 말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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