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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35화 (135/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35.

괜히 머쓱해 말하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밖을 살피던 성산하가 내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일이라니? 무슨 일?”

갸웃하며 나 역시 복도를 돌아보자 성산하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난 또, 너무 다급하게 부르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성산하의 얼굴에 드리웠던 긴장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다시금 평소의 여유를 찾은 놈이 장난스레 물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형 보고 싶어서 왔어?”

“개소리.”

막상 성산하의 얼굴을 마주하니 공방 외에도 하고 싶은 말들이 수없이 생각났다. 그러나 성산하의 얼굴에선 진지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그저 가벼운 눈빛에서 대충 놀아 주다 보내야지 하는 생각이 빤히 읽혔다.

나만 목매는 것 같아 부아가 치밀어 성산하를 노려봤다. 하지만 매서운 눈빛을 받고도 피식 웃은 성산하는 벌어진 제 가운의 한쪽 깃을 잡으며 수줍은 척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씨발.”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온 이유는?”

‘그래, 오늘은 온 목적이 따로 있으니까. 나중에 말하자, 나중에.’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몇 번이나 되새기며 또다시 꾸깃꾸깃 불만을 억눌렀다.

“별 건 아니고, 나 언제까지 여기서 지내나 해서.”

“불편한 점이라도 있어? 다 모여 있어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편해. 그런데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순 없잖아. 게다가 내가 누군지도 밝히니까……. 공방으로 가도 되는 거 아니야?”

눈을 빛내며 묻자 성산하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음, 서프라이즈 선물로 말해 주려고 했지만.”

“선물? 왜, 뭔데?”

이 상황에서 나올 선물이라면 뻔했다. 기대감에 가득 차 바라보자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중이야. 네 공방 주변 부지도 거의 다 정리했고 천랑을 포함한 대형 길드들의 생산 라인과 큰 공방들의 분점들도 하나둘씩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어. 모두 체급이 크니 녹스나 사이비가 그곳까지 와서 함부로 공격할 수 없을 거야.”

“그런…….”

“월계나루만큼 커다란 공방 거리가 생기는 거야. 그 중심엔 네 공방이 있을 테고.”

말만 들어도 떨리는 상상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발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럼 손님도 엄청 많이 오겠네?”

“물론이지, 너무 많이 와서 문제일걸?”

“미쳤다!”

공방에서 끝이 아니라 한발 더 앞서 나가 그런 기특한 짓을 하다니! 신이 나 놈을 덥석 끌어안았다.

품 안의 몸이 움찔 떠는 게 느껴졌지만 설레는 마음에 그것까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좋아하니 다행이네.”

얼마 후 성산하가 세지 않게 어깨를 잡아 나를 밀어 냈다. 내 어깨 위에 놓인 새카만 손을 바라봤다. 씻다 나와 그런지 장갑을 끼지 않아 맨손이 드러나 있었다. 까맣게 죽어 괴사된 피부는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때 그 저주…….’

어깨 위의 손을 잡아 내렸다. 두 손으로 잡은 채 슬슬 쓰다듬다 꾹꾹 눌러 보기도 했다.

“아파?”

성산하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반듯한 손끝과 손마디, 엄지와 그 아래 도톰한 살이나 이어진 손목까지. 피부만 아니었더라면 곧고 단단한 예쁜 손이었다.

‘손 기능엔 문제가 없어. 표면적으로 흉측하게 보일 뿐.’

이리저리 조몰락대며 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치료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르는 맛이 덜해 힘 좀 빼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성산하의 손이 내게서 쑥 빠져나갔다.

“잠깐, 손 좀 다시…….”

“그만. 궁금한 거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벌써? 잠깐만 있다 가자. 나 안에 들어갈래.”

“안 돼요. 잘 자야 키도 크지.”

“뭐? 아니, 야. 잠깐!”

여유 없는 한 자락의 웃음만 남긴 채 문이 코앞에서 쾅 닫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황당히 뻐끔대다 문을 두드렸다.

“야! 성산하!!”

벨을 몇 번이나 누르고 이름을 불러 봐도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잠깐 괜찮나 했더니 또 지랄이다. 누가 봐도 날 피하는 모습에 차라리 느물대며 사람을 놀리던 예전이 낫다 싶을 지경이었다.

“존나 또라이 새끼. 순 제멋대로지.”

하는 수 없이 복도 반대편의 내 방으로 가면서도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 답답함과 짜증을 누르려면 술뿐이다. 오랜만에 술이나 마시고 잘 생각으로 씩씩대며 방문 앞까지 다다른 나는 짜증스레 문에 카드키를 댔다. 그러나 빨간 불만 들어오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뭐지?”

고장 났나 싶어 카드키를 돌려 보니 내 방이 아니라 성산하의 방 호수가 적혀 있었다. 성산하의 방을 물어보며 키도 달라고 했더니 잘못 알아들은 듯했다.

카드키에 적힌 네 자리의 숫자를 빤히 쳐다봤다. 다시 로비로 내려가서 바꿔 달라고 해도 되지만…….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다시 성산하의 방 앞으로 향했다. 벨도 누르지 않은 채 카드키를 열고 들어가자 황당한 얼굴을 한 성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강의진, 어떻게…….”

“너 왜 나 피하는데?”

멋대로 튀어나온 말에 성산하의 입이 다물렸다. 침묵은 결국 나를 피한 게 사실이란 말이었다. 부정하지 않는 표정에 그동안 참아 왔던 서운함과 섭섭함이 터졌다.

“내가 말했지. 너 존나 이상하다고.”

“…….”

“내가 뭐 잘못했냐? 그럼 말로 해, 씨발. 기분 좆같게 슬슬 피하지 말고.”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토로에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쓸어 넘긴 성산하가 작은 한숨을 뱉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 아니야. 문제라면 내게 있겠지.”

“무슨 문젠데.”

성산하가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지 않겠다는 몸짓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왜 말 안 하는데. 나랑 관련 있는 문제 맞잖아.”

“늦었어. 나중에 얘기하자. 응?”

“모를 줄 알아? 내가 강의진이라는 거 알고 나서부터 이러는 거잖아!”

달래 보내려 하던 성산하가 입을 다물었다. 성산하도 나도 아무 말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내가 강의진이라는 사실이, 네게 무슨 문제라도 돼?”

가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실험 기록을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돌아보지 않았지만 무시할 순 없었던 생각. 성산하가 어쩌면 나를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알파룸이, 보육원 아이들이 모두 죽는 사이 태제헌 아래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미약하게 고개를 들었다.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성산하였다.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야.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씨발 뭐냐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듯 버텨 서자 결국 성산하가 한숨 쉬며 말했다.

“……너와 주호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서 그래.”

“하, 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성산하가 이 상황을 벗어나려 아무 말이나 한 거라면 모를까.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 달라진 건 겨우 이름뿐이잖아!”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

“내가 누군지가 뭐가 중요해? 어차피 둘 다 나인데.”

답답해 소리친 말에 성산하가 얼어붙었다.

“뭐?”

“처음 만나자마자 얼굴 갈아 버린다고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두 나였는데! 씨발, 혼동될 게 뭐 있냐고!”

날 멍하니 쳐다보는 모습이 멍청했다. 성산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같다고…. 너도, 주호현도.”

시선을 떨군 채 중얼거리던 성산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래. 처음부터 너였지. 그것도 모르고, 바보 같네.”

“아까부터 말 돌리려고 헛소리하는데, 네가 이런다고 내가 안 물어볼 줄….”

성산하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에 홀린 듯 나를 샅샅이 훑는 집요한 눈빛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놈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곧 성산하가 내게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모두 한 사람인데. 그렇지 의진아?”

“……그걸 지금 알았냐? 멍청아.”

성산하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나다 보니 등이 창에 닿았다. 불을 등지고 선 성산하의 몸이 괜스레 더 거대해 보였다. 날 보며 사르르 웃는 얼굴은 감탄 나올 정도로 예뻤으나 섬뜩했다.

“왜 피했는지 물어봐.”

“야, 너 왜 이래?”

“응? 궁금하다며.”

‘…말 안 해 주더니 갑자기 씨발 무슨 변덕인데.’

하지만 궁금하긴 했기에 의심스럽게 흘겨보며 겨우 입을 뗐다.

“왜, 피했는데?”

“미안해서.”

“누구, 나한테?”

의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성산하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어느새 놈의 손이 내 볼을 감쌌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봤다.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런데도 주호현에게 끌린 게 미안해서.”

“……뭐?”

“내가 끌리는 게 강의진인지 주호현인지 혼란스러워서. 그래서 피했어.”

“야, 성산하. 너…….”

당황해 말도 잘 나오질 않았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굳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성산하의 뒤로 보이는 문을 향했다. 그러나 몸을 바짝 붙이는 성산하에 의해 그마저도 가려졌다. 뒷걸음질 쳐 봤자 뒤는 유리창이었다.

코앞의 얼굴이 집중하라는 듯 볼을 감싼 손을 들어 저를 보게 했다.

“의진아. 어떡하지? 이젠 나 못 참겠는데.”

“차, 참아. 씨발.”

“예전에 약속했던 그거, 지금 받아 갈게.”

“무슨 말을 하는……, 읍!”

성산하의 얼굴이 가까워지나 싶더니 한순간 시야를 가득 채웠다. 머리에 경고음이 울렸다. 입술에 뭔가가 닿자마자 세게 성산하를 밀쳤지만 전혀 밀리지 않은 몸은 오히려 날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른하게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감기며 맞닿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씨발!!’

눈을 부릅떴다. 내 몸 전체를 끌어안은 팔보다도 입술에 닿는,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던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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