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38.
“짭의진은 어떻게 잡은 거야?”
“노바리온을 습격했지. 널 공개하기 전에 잡아야 했거든.”
“주동자가 누군지는……. 아직 못 찾았겠지?”
별 기대 없는 물음에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멀었지. 하지만 소득이 아주 없진 않아. 노바리온은 사이비 중에서도 ‘남익’이라는 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
“남익?”
“참고로 스피카와 알게디를 추적하며 실마리를 잡은 단체의 이름은 ‘웨스트 윙’이야.”
“뭐야, 그럼 동쪽이랑 북쪽도 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그때 방 한쪽에 놓인 금고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이초가 내게 다가와 상자를 건넸다.
“이건…….”
“사칭범이 쓰고 있던 안경입니다. A급 혼란 효과가 깃든 아이템이죠.”
그러고 보니 항상 안경을 쓰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짭의진은 맨얼굴이었다. 얄팍한 안경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 아이템 하나로 그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는 거야? 너무 닮아서 처음엔 나까지 속을 뻔했어.”
“닮아 보였던 건 사칭범이 가지고 있던 흉내 내기 스킬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닮아질 순 없었고, 그 간극을 아이템으로 메운 거죠.”
“처음 봤을 땐 존나 잘생겨서 내가 하나 더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르게 보였거든. 그건 내가 놈이 강의진이 아님을 인지해서 혼란이 통하지 않은 건가?”
“아마도요. 안경의 혼란 효과가 그 사람이 기억하는 얼굴로 보이게 만들거든요. 처음 마주했을 때 보였던 형상이 의진 님이 생각하는 본인의 얼굴일 겁니다.”
“아하.”
다시 내 손에서 안경을 받아 간 이초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덮으며 말했다.
“안경 자체는 특별히 위험한 아이템이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이 써 봤자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일 테니까요. 문제는, 의진 님이 누구나 아는 포션 마스터였고 놈들이 그런 의진 님을 사칭했다는 겁니다. 일부러 세계 아틀리에 엑스포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등장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의진 님의 얼굴은 공개된 적 없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 얼굴이 나라고 믿게 된다는 거네.”
“네. 맞습니다.”
……왜 하필 날 따라 한 거지? 내가 S급 포션 마스터라서? 그도 아니면 혹시 내가 성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고민하며 유리창 너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어깨에 손이 닿았다. 옆을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짭의진을 보던 성산하가 말했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움직임의 방향은 뚜렷해. 성좌를 죽이는 일.”
“……놈들도 내가 지금 성좌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물론이지. 성좌 지도가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뿐인걸.”
젠장. 좆같은 성좌 지도. 안전한 호텔 내부에 있다 보니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폐쇄적인 센터 내에서조차 류수윤을 살해한 놈들이다. 호텔을 떠난다면 더 이상 안전할 수 없겠지.
‘이러다 나 죽이겠다고 평생 따라다니는 거 아니야?’
소름 끼치는 가정을 부정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도 언젠간 정리되겠지? 나쁜 놈들이니까 처리하려는 사람들도 많을 것 아냐.”
“최대한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해야지. 더군다나 파티 퀘스트 발생 이후로 놈들의 행적이 사라졌어. 아마도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그런 거겠지. 그러나 탑이 열리면 분명 다시 모습을 보일 거야.”
“탑이 언제 열리는데?”
“곧. 파동이 안정화되며 게이트의 형태가 드러나고 있어. 빠른 곳은 당장 내일 열린대도 놀랍지 않을 정도야.”
살면서 개같은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실체 없는 놈들에게 쫓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 적은 태제헌으로 명확했으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쫓기다 못해 죽을 걱정까지 해야 한다니.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 좆같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유리창 너머의 짭의진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다짐했다. 피할 수 없다면, 먼저 없애 버려야지.
‘누구든 내 공방을 건드리는 놈들은 가만 안 둔다.’
짭의진에게서 시선을 떼 등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자.”
앞으로 피곤해질 미래가 뻔해서 그런가, 마음이 착잡했다. 처음 천랑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주위를 둘러볼 여력도 없었다.
‘용병을 더 고용해야 하나? 장비 아이템도 더 사야 하는데 우리 공방 자금이 얼마나 남았더라…….’
멍하니 손끝만 쳐다보며 머리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옆자리에 앉아 빤히 바라보던 성산하가 내 앞머리 중 유독 끝이 둥글게 말린 것을 톡톡 건드리다 물었다.
“또 왜 이렇게 시무룩해. 나온 김에 형이랑 데이트나 하러 갈까?”
“꺼져.”
“귀여워서 그냥 들어가기 아쉬운데.”
“산하 님. 회의가 코앞입니다. 그때까진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반대하고 나서는 이초에 말할 타이밍을 빼앗겼다. 그저 한심한 눈으로 성산하를 바라보며 이초의 잔소리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성산하가 아쉬운 척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 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미리 공방 좀 보여 주고 싶었는데.”
“뭐? 갈래!”
공방이란 소리에 눈을 빛내며 돌아보자 성산하가 실실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갈까?”
“응! 공방 갈 생각이라고 먼저 말을 했어야지. 빨리 월계나루로 가자!”
“산하 님! 의진 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월계나루로 차 돌려.”
이초의 비명에도 차는 경로를 바꿔 월계나루로 향했다.
***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적하던 공방 주변은 어느새 각양각색의 가게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공방 거리 바깥에는 미리 구경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살짝 연 창문 사이로 사람들의 잡담이 새어 들어왔다.
“여기 언제 오픈해요?”
“삼일 후래요!”
“여기 석청 분점이랑 프랑수아 포션 상점도 들어온대!”
“와, 씨. 대장간이 몇 개야? 미리 알았으면 땅 좀 살걸!”
“저기 커다랗게 보이는 하얀 건물이 천랑 꺼라는데, 우리가 살 수 있었겠냐?”
갑자기 멈춰 선 차에 앞을 내다보자 이초가 창문을 열고 차단봉을 지키는 여자한테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잠시 후, 출입을 막던 차단봉이 올라가고 차가 거리로 진입했다. 곧 뒤에서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
“저희도 열어 주세요!”
“저쪽은 뭔데 먼저 들어가요?”
“관계자입니다. 다들 라인에서 물러나 주세요.”
거리로 들어가니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많은 공방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흔치 않은 몬스터 테이밍 샵이나 보석 상점,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대장장이 빛이나의 대장간 분점과 고등급 의복 제작으로 유명한 석청 의상실을 봤을 땐 절로 성산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걸 다 어떻게 데려온 거야?”
“미리 정보만 전해 줬을 뿐이야. 들어오기로 한 것은 그들 선택이지.”
“어떤 정보?”
“뭐겠어, 포션 마스터 강의진의 공방이 있단 소리지.”
입이 벌어졌다. 그럼 다 날 보고 왔다는 소리잖아?
참지 못할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발을 까딱이며 목을 길게 뺐다.
“빨리 가자, 내 공방으로.”
외곽에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데 반해 오히려 내 공방 주위는 건물의 높이가 낮고 서로의 간격 역시 넓었다. 통행 제한이 풀리면 복잡해질 게 뻔해 내심 습격이 걱정되던 차에 다행인 일이었다.
차가 공방 앞에 멈춰 서자 이초가 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이르지만, 복귀 축하드립니다. 의진 님.”
공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보다 이파리가 무성해진 엘프목이 나를 반기듯 파르르 흔들리며 나뭇잎 스치는 소리를 냈다. 움직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잔디 위로 반짝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 멋진 공방을 놔두고 태제헌한테 잡혀 살 뻔했다니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씨발, 태제헌 개새끼.’
킁, 코를 씰룩이고 공방 안으로 달려갔다.
작업실을 확인하고, 창고에서 썩고 있는 재료들도 급한 대로 정리했다. 사장실과 내 침실까지 모두 둘러보니 그냥 이대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폭신한 내 이불 위에 엎드려 뒤를 돌아봤다. 성산하가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안될 걸 알았지만 아쉬운 마음에 넌지시 물었다.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성산하의 눈썹이 올라갔다. 곧 짓궂은 웃음을 그린 성산하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안 될 거 없지.”
“뭐? 진짜?”
“물론.”
예상외의 허락에 벌떡 몸을 일으켜 앉는데 이상하게 멈추지 않고 다가온 성산하가 저도 침대에 무릎을 올리며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제 키스했는데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닌가? 나야 좋지만.”
그제야 성산하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알아채 얼굴에 시뻘겋게 열이 올랐다.
“뭐, 뭐? 이 미친, 또라이 새끼가. 무슨 개소리야!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허리를 감싸 아래로 죽 당긴 성산하가 내 위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침대에 누워서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묻는 게 유혹 아니면 뭔데?”
“와, 와. 씨발. 너 같은 변태 새끼나 그런 생각 하지.”
내 얼굴 위로 떨어진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성산하가 나른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둘 다 말을 않고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에 꿀꺽 침을 삼켰다.
‘또, 또 하는 건가?’
남자랑 키스 따위 더 이상 하면 안 되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성산하의 얼굴만 쳐다보며 고민 중이던 때,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웬 고함이…….”
이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초인적인 힘으로 성산하를 밀치고 삼 미터가량 떨어진 곳으로 몸을 던졌을 때 이초가 열린 문 앞에 멈춰 섰다.
“뭐…하십니까?”
이초가 바닥에 앉아 있는 날 이상하게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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