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파업 선언 140.
피가 차게 식었다. 드디어 강의진으로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신원 부활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저, 그럼 일단 지문 스캔부터…….”
“씨발, 손대지 마!”
기계를 들고 다가오는 놈의 손을 내쳤다. 날카로운 반응에 놈들이 어떻게 하냐는 듯 한서진을 바라봤다. 그때 뒤에서 소란이 일더니 입구를 막고 있던 에스퍼들 사이에 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초와 청이가 날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의진 님!! 거기 지금 뭐 하는 짓들입니까!”
“어어, 끼어들지 마시죠. 물러나세요.”
박무일이 이초 앞을 막아서며 말하자 청이가 곧바로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장검에 한 발 뒤로 물러난 박무일의 손에 어느새 길쭉한 봉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비켜.”
청이와 박무일의 대치에 카페 바깥을 지키고 있던 에스퍼와 천랑 길드원들 사이에도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이초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울 시내 한복판입니다. 던전 내부도 아닌 곳에서 센터와 천랑이 이능으로 싸웠다고 뉴스에 나오고 싶은 것 아니라면 두 분 다 무기 집어넣으십쇼.”
“난 천랑이 아니야.”
봉을 거두는 척이라도 하는 박무일에 반해 청이는 칼을 겨눈 상태 그대로 꼼짝도 않았다.
“그럼 더욱 문제죠. 의진 님 이름으로 뉴스에 날 텐데!”
그제야 슬쩍 칼을 치운 청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초가 에스퍼들을 돌아보며 황당하게 물었다.
“탑 회의가 코앞인데 대체 지금 무슨 짓들입니까. 센터 측 대표로 한서현 지부장도 참가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식으로 훼방 놓아도 되는 겁니까?”
“회의만 참여하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 먼저 강의진의 복귀로 언플 준비해서 뒤통수치려던 건 천랑이잖아. 성좌를 독점하려는데 가만 있을 줄 알았어?”
한 에스퍼의 말에 이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 의진 님의 보호를 위한 조치입니다. 게다가 센터랑 관련 있는 일도 아닐 텐데요. 의진 님은 S급, 그중에서도 서약에 동의한 헌터들로만…….”
“하하하, 웃기는 아저씨네. 왜 상관이 없어. 우리도 퀘스트 진행해야 할 거 아니야.”
“퀘스트라니 무슨…….”
“우리 눈에도 보이거든. 반짝반짝 빛나는 게. 설마 성좌 보호가 헌터들만의 특권인 줄 알았어?”
에스퍼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지? 나를 보호하는 거라면 S급들에게만…. 잠깐, S급이라면!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한서진과 그 옆에 선 얼굴들이 보였다.
-센터에선 그렇게 부르나 보지? 박무일 에스퍼가 있는 곳은 센터에서 가장 공격적이기로 유명한 팀 중 하나다. 순혈주의에 엘리트들이라 우리 강아지가 엮일 만한 곳은 아닐 텐데.
언젠가 성산하가 했던 말과 함께 생각지도 못한 가설이 떠올랐다. 나와 눈이 마주친 박무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성좌를 보호하라’는 퀘스트는 저희에게도 떴거든요. 그게 형님일 줄은 몰랐지만.”
“그럴 리가. 에스퍼들은 일반적인 퀘스트를 받았다고…….”
분명 한서진이 내게 몬스터 사냥이라고 했는데!
동의를 구하려 한서진을 바라봤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속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냥 파티 퀘스트라며!!”
“……외부인에겐 발설 금지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한서진 너!!”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다른 에스퍼가 눈을 빛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진 천랑에 협조했지만 가이드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때부턴 센터 소속이야. 가이드는 센터가. 헌터는 헌협이. 당연한 진리 아닌가?”
“저희 측에서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 검사를 진행하려는 겁니다. 정말 당당하다면 피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한번 해 보자고요.”
에스퍼들이 점점 거리는 좁히자 청이가 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칼에 닿은 대리석이 무 잘리듯 수욱 갈라졌다. 청이가 칼자루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두말하지 않지. 넘어오면 죽인다.”
그 사이 이초가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곧 길드장님께서도 도착하실 겁니다. 의진 님, 어떻게……. 지금 회의까지 시간이 없어서.”
이초는 갈등하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대치할 바에야 그냥 한번 검사를 해 주고 말자는 생각인 게 빤히 보였다. 내가 강의진이라고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 하면 안 돼.’
저 측정기가 어떤 원린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서진의 말에 따르면 내 손만 잡고 있어도 가이딩이 느껴진다고 했다. 결국 내가 가이딩을 하지 않는다 해도 소용없단 소리였다.
“만약 가이딩이 일치한다고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럴 리가 없…….”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고개를 젓던 이초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지 날 보던 눈을 부릅뜬 채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이초가 잠시 후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문제가 굉장히 커집니다. 이능력자 협약에 의해 가이드의 관리는 센터가 맡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퍼와 가이드에 한해선 치외 법권이나 다름없어 그 어떤 법보다도 센터의 뜻이 우선시되거든요. 센터 측의 단합도 견고해 손쓸 수 있는 범위가 적기 때문에 만약 의진 님께서 동일인으로 나온다면……. 불법을 저지르는 수밖에요.”
“씨발 좆같네.”
내 낯을 살피던 이초가 고민하다 뭔가를 결심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일단, 검사는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거부하더라도 결과가 나온 것과 아닌 것은 천지 차이니까요. 산하 님도 이쪽으로 오고 계시니 어떻게든 합류만 하면 됩니다. 퇴로는 세 루트 정도로 보이니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일단 의진 님만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죠.”
“도망친다고 다가 아니잖아. 회의는? 내 공방도 못 가는 거지.”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천랑에 계셔야 하겠죠.”
이초의 말에 빡침과 동시에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끓어올랐다.
방법이라는 게 없다면, 또 며칠, 몇 달이고 천랑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씨발 그렇겐 못 해.
청이의 듬직한 어깨 너머로 팔짱을 낀 채 기다려 준다는 것처럼 서 있는 한서진을 노려보다 발을 뗐다.
갈라져 있는 금을 넘어 한서진에게로 가자 청이가 놀라 손을 뻗었다.
“사장님!”
“……형.”
“나랑 얘기 좀 하자. 따라와.”
한서진의 팔을 붙잡아 한구석에 있는 문으로 이끌었다. 조금 당황해 움찔대던 한서진이 순순히 발을 옮겼다.
문 안쪽은 창고였다. 흐릿한 불빛 사이로 보이는 한서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툭 물었다.
“좆같다는 사람 이렇게까지 해서 잡아 놓으려는 이유가 뭔데.”
“…….”
“내가 가이딩 포션까지 만들 줄 아는 유능한 인재라서, 그것 때문에 그래?”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한서진이 그 말에 울컥해 소리쳤다.
“무슨 그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어. 진짜 모르겠거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하자 한서진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울분을 참는 듯 목울대가 크게 꿀렁이더니 한참 후에서야 목멘 소리로 겨우 한 문장을 뱉어 냈다.
“저 형 좋아해요.”
“내가 그럴 줄 알……. 뭐?”
가이딩 포션이 탐났다 솔직히 고백할 줄로만 알았는데 들려온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황해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 형 좋아한다고요.”
뭐야 씨발.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나도 너 좋아한다고 하고 말았을 텐데 한서진의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다. 한마디라도 장난식으로 뱉었다간 좆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온 피부로 느껴졌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티가 났는지 한껏 굳은 얼굴을 본 한서진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알아요. 제 욕심이고 강요인 거. 형이 센터에 얼마나 넌더리 내는지 알면서도, 죽은 척하면서까지 도망치려고 한 곳인 거 아는데도… 그래서 참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포기 못하겠어요. 형.”
“너 내가 가이드라서,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원래 착각을…….”
“제가 그거 하나 구분 못할 것 같아요?”
참지 못하고 흘려 버린 본심에 발끈한 한서진이 내 양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어떤 미친놈이 C급한테 헷갈리는데. 난 그냥 형이 좋다고요.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떠나보내기 싫다고!”
“그건 네 사정이고. 난 좆같은 센터로는 죽어도 못 돌아가. 그냥 여기서 죽여라. 새끼야.”
팔을 잡은 손을 뿌리치며 말하자 한서진이 상처받은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딴 소리 쉽게 하지 마요. 형은, 내가 형이 죽은 줄 알았을 때 무슨 기분으로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르잖아.”
“…….”
“의무 복무 끝나서 센터로 돌아갈 일 없어요. 전이랑은 다를 거야. 그러니까 형…….”
“몇 번 말해. 나 가이드 같은 거 못한다고.”
“형이 하고 말고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평생 가이드로 살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씨발, 내가 주호현이 아니니까!!”
참지 못해 소리친 말에 정적이 흘렀다. 한서진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형이 강의진이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앞에서까지……. 그런 변명 한다고 그냥 지나갈 줄 알았어요? 형은 내 말이, 내 마음이 장난으로 들려요?”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한서진의 태도에 답답해 머리를 쥐어뜯었다.
‘존나 고집 센 새끼. 몇 번을 말해야…….’
그때 내 눈에 까만 장갑을 낀 한서진의 손이 보였다. 홧김에 놈의 손을 잡아채 장갑을 벗기자 당황한 한서진이 손을 빼내려 했다. 결국 벗겨 낸 장갑을 바닥에 버리듯 던지고 드러난 한서진의 손을 내 볼에 가져다 댔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네가 직접 읽어. 진짠지 아닌지.”
“……뭐라고?”
“내가 누군지, 왜 내가 가이드일 수 없는지. 네가 직접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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