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41.
한서진의 능력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억을 내어 준 건 반쯤 도박이었다. S급 정신계 에스퍼의 이능이 얼마나 강할지, 어디까지 읽힐지 가늠도 되지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전처럼 헛발질 할지도 모르고.
‘뭐가 됐든 성산하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해.’
볼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 의중을 읽으려던 한서진이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후회 안 해요? 멈춰 달라고 해도 안 멈출 거예요. 형이 뭘 숨기고 있든 나는 절대…….”
“후회는 씨발, 시간 없어. 안 할 거면 꺼져.”
“…….”
빤히 쳐다보던 한서진이 남은 한 손마저 장갑을 벗고 내게 손을 뻗었다. 얼굴에 닿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움찔 눈을 감는데 살이 닿은 곳에서부터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 설마…….”
“빌릴게요.”
가이딩이 강제로 한서진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눈앞이 암전됐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한서진의 두 눈이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그려졌다. 언뜻언뜻 떠올랐다 금세 사라지고 마는 장면들은 나의 기억들이었다. 실수하지 않을까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뒤죽박죽한 시간 속에서 크고 작은 모습의 내가 뛰어노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게 한서진의 스킬인 건가?’
보육원에서 지내던 기억에 이어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할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까지 눈앞을 스쳤다. 그러다 드디어 내가 센터에서 눈을 떴다.
날 잡은 한서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 시선에서 본, 주호현을 향한 적의 가득한 시선들은 지금 봐도 적응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새삼 좆같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서진이 내가 정말 감추려 하는 기억까지는 읽지 못한단 걸 알아챘다. 성좌나 메인 퀘스트는 물론이고 보육원 실험 정보, 그리고 최근 성산하와 있었던 일까지. 내 기억에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일들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읽을 생각인 거야.’
불만이 고개를 들 무렵, 내가 태제헌 앞에서 자살하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귀신같이 손이 떨어졌다. 한서진에게 빨리던 기운 역시 멈춘 것이 느껴졌다.
사소한 기억들이었지만 내가 주호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긴 충분했겠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지랄하면 그땐 그냥…….
후련하게 눈을 뜬 순간, 바로 앞에 보이는 한서진의 얼굴을 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야, 한서진. 너 왜 울어?”
매끈한 얼굴이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당황해 손을 뻗었다. 축축이 젖은 볼에 손이 닿자 멍한 표정으로 눈물만 흘리던 한서진이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고 내 손을 내쳤다.
“나한테 왜 이래요. 형은 왜, 왜 항상…….”
“뭐? 내가 뭘…….”
“마지막은 뭐예요. 다 봤어요. 형이…….”
“뛰어내리는 거?”
“…….”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로 가득 차 흐릿한 눈동자에 가득 담긴 원망이 생소했다. 할 말이 없어 마른 입술만 적시는데 나를 노려보던 한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녹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으려 한 거예요?”
“응.”
한서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지 못하는 한서진의 모습에 에휴 한숨을 쉬고 끌어안아 등을 쓸어내렸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한서진이 울먹이면서도 짜증을 냈다.
“하지 마요.”
“너나 울지 마라. 울보 새끼야.”
“나 형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그거 못 무르나.
경고성 짙은 목소리에 움찔하고는 슬쩍 한서진을 다시 밀어 떼어 놨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린 한서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가다듬어 울지 않으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날 보자마자 다시 눈물이 샘솟았다.
계속 우는 게 민망했는지 한서진이 애써 말을 돌리려 했다.
“……센터로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그리고 주호현은 어디 있어요?”
주호현이 어디 갔냐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내가 강의진이라는 걸 증명하긴 했다만, 새로운 문제가 생겨 버렸다. 뭐라 둘러댈지 땀을 흘리며 고민하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 내가 S급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라는데?”
“중요하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꼴이 재수 없었다. 은근슬쩍 창고 손잡이를 잡았다.
“나 회의 가야 해! 너 때문에 늦었잖아!”
“형, 잠깐….”
“기억까지 읽게 해 줬는데 딴소리하면 죽는다.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까 너는 눈물 닦고 나와.”
한서진을 창고에 둔 채 먼저 밖으로 나왔다. 다른 에스퍼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서 있던 이초와 청이가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왔다.
“의, 의진 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자.”
홀로 나온 날 보고 놀란 건 에스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당황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박무일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놈이 창고를 힐끔대며 물었다.
“혀, 형님. 서진이랑 무슨…….”
“형님은 씹…, 가야 하니까 비켜.”
꺼지라 손짓했지만 버티고 선 에스퍼들을 노려봤다. 그때 에스퍼들의 시선이 내 뒤로 몰렸다. 뒤늦게 나온 한서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내 줘.”
“뭐? 야, 한서진!”
“얘기 끝났어. 검사는 없던 일로 하죠.”
한서진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박무일만은 이쪽으로 다가와 사색이 되어 속삭였다.
“한서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형님이 가이드인 거 뻔히 아는데 너 갑자기 무슨…….”
“내가 직접 읽었어. …강의진 맞아.”
하얗게 질린 박무일이 나를 돌아봤다. 콧방귀 뀌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고 길 열어.”
“혀,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의진 님이라고 불러라.”
박무일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답답한 표정이었지만 한서진의 입막음에 입을 꼭 다물었다. 초와 청이가 내 양옆을 지켜 서며 말했다.
“출발하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한서진과 눈을 맞췄다. 아직도 눈가가 붉었다. 입술을 깨문 한서진이 짓씹듯 짧은 말을 내뱉었다.
“약속, 지켜요.”
“약속이라니 무슨……. 아.”
나중으로 미룬 질문의 답을 요구하는 말이었다.
‘주호현의 몸으로 눈을 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로 들릴 것 같은데 말이지.’
어쨌든 나중에 해결하면 될 일이다. 복잡한 일은 뒤로 미뤄두고 등을 돌렸다.
아래로 내려가자 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다. 청이와 함께 뒷좌석에 타자마자 밝은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의진 씨. 오랜만.”
“누나!”
운전석에 앉은 건 오나연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조수석에 이초가 올라탔다.
“나연아! 우리 늦었어.”
“그러게. 벌써부터 뒤에 쥐새끼들 따라붙었어. 길드장님은?”
“산하 님은 회의장에서 만나기로 했어.”
“미안. 좀 더 빨리 끝내 볼걸.”
내 중얼거림에 오나연과 이초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이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회의에 참여했다면 이미지는 좀 더 좋았겠지만……. 일단 오늘은 의진 님의 얼굴을 비추고 알리는 게 목적인 자리니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방해꾼도 붙은 것 같던데.”
“후후, 그건 걱정 마. 나만 믿어.”
오나연이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지옥의 레이스가 펼쳐졌다.
***
“욱, 우에엑.”
“제 팔 잡으십시오.”
겨우 차에서 내리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청이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아 줬다.
아직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오나연의 운전실력에 비하면 뒤따라오는 미행은 별 문제도 아니었다. 앞뒤 좌우 4차선을 넘나드는 미친 질주. 분명 차인데 왜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던 건지는 뒤늦게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런 운전은 티브이에서나 봤지 내가 직접 타리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는데.
S급이라 그런지 멀쩡한 청이와 왜인지 익숙해 보이는 이초는 아무렇지도 않아 타격을 입은 건 나뿐이었다.
“너무 과격했나? 미안해. 오랜만에 버스 아닌 차를 모니까 신이 나서.”
“괜찮아,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 욱!”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원래는 입장부터 파파라치 사진이 찍힐 걸 예상하고 앞쪽 길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 공개되지 않은 입구를 이용하기로 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천랑의 호위를 받으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앉아 망가진 머리를 대충이나마 수습하던 중 성산하가 다급히 들어왔다.
“강의진!”
내 헝클어진 머리를 보더니 성산하의 눈이 가라앉았다.
“놈이 폭력이라도 쓴 건가?”
“무슨 헛소리야?”
“머리가 말이 아니야. 사진으로 받았을 땐 굉장히 귀여웠는데.”
“아아, 이건 내가 짜증 나서 만진 거야. 그런데 사진은 무슨 사진? 누가 보내 줬는데?”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성산하는 추궁하는 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한 채 내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여태껏 의심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암묵적인 룰을 믿고 너무 안일했지. 이번 회의 끝나고 센터와의 협력은 재고해 봐야겠어.”
“……그럴 필요 없을걸.”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한서진은 이제 헛소리 안 할 거야.”
물론 내가 어떻게 센터로 들어왔으며 진짜 주호현은 어디 있을지 해명하는 일이 남았지만. 내가 강의진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을 테니.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