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49.
이왕 탑에 관련된 의뢰를 맡기로 한 김에 창고 한편에 쌓여 있던 신재료를 꺼내 봤다. 여태껏 일부러 멀리했던 것이 무색하게 탑에서 나온 신재료들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강력한 마력과 생각지도 못한 효능까지 가지고 있어 이곳저곳에 사용해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다.
공방 영업이 끝난 후는 물론, 저녁 시간까지 반납하고 재료 파악에 몰두했다. 내가 집중하는 만큼 재료 역시 무섭게 소진되었다. 진명이가 시장에 풀린 신재료들을 최대한 모아 구해다 줬지만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작은 돌같이 생겨 은은한 빛을 내는 ‘플레링의 열매’가 독약에 녹아 사라졌다. 하나 더 넣어 보려 손을 뻗어 옆을 더듬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그제야 방금 내가 독에 녹여 버린 열매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벌써 다 썼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겨우 일곱 시밖에 안 됐는데 끝내야 한다니 아쉬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재료 수급을 늘릴까 싶었으나 지금도 겨우 구해 오는 진명이가 이 이상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인 누나한테 부탁해 볼까.’
자리를 정리하고 위로 올라갔다. 로비로 나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던 꼬맹이 둘이 내게 달려왔다.
“아저씨!!”
“뭐야, 언제 왔어?”
“저녁 먹고 바로 왔어요. 아저씨 저 스킬 배웠다요?”
“저기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 사장님 거예요.”
하정이의 작은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엉거주춤 일어나 웃는 정혁이 있었다.
최근 윤하얀과 백다인이 퀘스트를 위해 함께 탑에 진입했다. 그 덕에 정혁이 홀로 남아 다혜와 하정이를 맡더니 이젠 유치원 선생님이 다 됐다.
“왔으면 나 부르지.”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바쁘시다기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방해는 무슨. 공방 운영 시간만 아니면 와서 놀아도 돼.”
꼬맹이들에게 양손이 잡혀 소파에 앉혀지는데 막 그릇을 들고 오는 승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의진 님? 벌써 끝나셨나요?”
“재료가 다 떨어져서 일찍 나왔어. 진명이 언제 온대?”
“오늘은 여덟 시 전에 온댔으니……. 곧 도착하겠네요.”
승연이까지 한데 둘러앉아 정혁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었다. 슬라임 맛, 마나포션 맛, 엄마는 S급 맛……. 누가 골랐는지, 온갖 요상한 이름을 가진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첫 스킬을 배워 쥐를 날려 버렸다는 백다혜의 장황한 모험담을 들었다. 이야기를 끝낸 다혜가 품에서 손톱보다도 더 작은 돌 하나를 꺼내 우쭐댔다.
“이거 봐요. 제가 죽인 몬스터한테 나온 마정석이다요. 선생님이 그랬는데 연습 몬스터한테 마정석 나오기 힘들댔어요.”
“이야, 백다혜 대단하다. 이렇게 작고 빛도 안 나는 마정석 난생처음 봐.”
“씨이, 아저씨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몰라. 나 S급인데? 포션 마스터라서 맨날 재료 만지는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포션 줄 테니까 그거 나 줘. 포션이랑 바꾸자.”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린 백다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싫어요!”
“후회할 텐데-.”
실실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는데 씩씩대던 다혜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서진이 삼촌은 어디 있어요?”
“읏, 걔는 갑자기 왜.”
“삼촌한테 물어볼 거예요. 삼촌도 S급이니까.”
둘이 자주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친한 거지. 머리를 긁적이다 툭 답했다.
“걔 어디 갔어.”
“어디요?”
“몰라. 센터 일로 바쁜가 보지.”
사실 센터에서 징계받고 잠적 중이다.
그 난리를 쳐 놨는데 징계를 안 받는 게 이상하지.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센터가 직접 사과를 한답시고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서현이-심지어 한서진의 사촌이라고 했다- 찾아온 것이다. 나를 한참 쳐다보다 서진이가 왜 그랬는지 알겠네요, 하고 의심스러운 한마디를 내뱉고 떠났다.
왜 그랬는지 알기는, 제가 어떻게 안다고.
-저 형 좋아해요.
씨발. 성산하고 한서진이고, 다들 존나 이상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동시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아기 천사 같은 사나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내 머릿속에서 꺼져! 아니, …나가!’
“의진 님. 괜찮으세요?”
“어, 잠깐 머리가 아파서.”
“찬 걸 갑자기 먹어서 그런가 봐요.”
승연이의 걱정 뒤로 덜그럭대는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진명이가 도착했다.
잘됐다. 잡생각에는 연구가 딱이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승연아. 재료는 내가 받을게. 꼬맹이들. 놀다 가라.”
“아닙니다! 저도 같이…….”
“아냐. 정리하고 신재료들도 좀 살피려고 그래.”
내 만류에 승연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뒷문으로 나가려는데 백다혜가 내 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뭔데?”
“이거 아저씨 가져요. 이젠 관심 없어.”
손을 펼치자 그 위로 코딱지만 한 작은 마정석 하나가 떨어졌다. 피식 웃고 주머니에 마정석을 넣었다. 작은 머리통을 헝클이자 백다혜가 짜증스레 팔을 휘둘렀다.
“하지 마요!”
“응. 고맙다.”
***
정신을 차려보니 시곗바늘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한 시를 가리켰다. 산더미처럼 쌓인 포션들이 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텅 빈 마나 탓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가 핑 돌았다. 눈을 꿈뻑이는데 순간 눈앞이 까매지며 발을 헛디뎠다. 몸이 기울며 그대로 상자 더미 위로 쓰러졌다.
“씨…. 존나 아파.”
곧바로 일어날 힘이 없어 그대로 드러누운 채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조금 무리했다고 이렇게 쓰러지기냐…….
느른한 한숨과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몸은 고돼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실패작만 만들어 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언젠가 완성할 포션만 생각하면 먹지 않아도 힘이 났다.
몸에 힘을 뺀 채 늘어지니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침에 다람쥐가 보고 기절하겠지. 며칠간 따라올 잔소리는 덤이고…….
이대로 잘까, 일어날까 일대의 고민을 하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막상 일어나 보니 연구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빈 재료 상자들과 포션병들, 휘갈겨 쓴 종이들 위로 널브러진 기구들까지. 애써 못 본 척하며 등을 돌리는데 발에 작은 뭔가가 걸렸다. 백다혜의 마정석이었다. 주머니에 넣어 놨던 게 넘어지며 빠진 듯했다.
“이건 잃어버리면 안 되지.”
먼지를 털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작고 못생겼지만 백다혜가 처음 얻은 마정석이다. 꼬맹이에겐 의미가 클 테니 각성도 기념할 겸 장비나 장신구로 가공해 다시 선물할 작정이었다.
괜찮은 세공사가 있으려나. 근처 공방들에서 보낸 명함들을 카운터에 보관 중이었던 것 같은데…….
지하실에서 나와 로비에 발을 들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어두운 로비에 홀로 앉아 있는 성산하가 달빛을 받아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던전에 가 있어야 할 놈이 왜 내 공방에 앉아 있는 거지.
“문 닫았는데.”
내가 올 줄 알았는지 성산하는 가만히 고개만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늦게까지 열심이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성산하가 천랑을 도와 탑에 들어간 지 한 달이었다. 그런데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보듯 태연한 어조라니.
‘빨리도 왔네.’
미끈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카운터로 가며 뚱하니 물었다.
“중간에 못 나온다며. 설마 다 끝냈냐?”
“아니. 한동안 20층에서 지지부진하던 중에 함정을 잘못 건드렸어. 덕분에 탑에 들어가 있던 사람 모두 밖으로 튕겼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꼴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명함을 찾다 성산하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다.
“튕기다니? 탑 내부도 어차피 던전 아니야?”
“말 그대로야. 한순간에 모두가 탑 바깥으로 이동했어.”
사람들을 밖으로 튕겨 내는 던전이라니.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뭐, 애초에 탑의 존재 자체부터가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언제 다시 들어가?”
“전례 없던 일이라 협회 측에서 내부 안전 조사를 선행하기로 했어. 일주일 후에나 입장할 수 있을 거야.”
“준비 잘하고 가라. 또 멍청하게 워프 당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같이 가야 하는데.”
“뭐?”
당황해 손에 잡고 있던 명함 뭉치를 놓쳤다. 우수수 떨어진 명함들이 카운터 위로 흩뿌려졌다. 성산하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언젠간 들어가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
“이렇게 바로일 줄은 몰랐지! 나 못 가. 공방은 어쩌고? 나 보러 오는 손님들도 많단 말이야.”
다시 생각해도 무리였다.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데 눈썹을 치켜올린 성산하가 이리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꿈쩍도 않자 이번엔 놈이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나도 웬만해선 데려가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문에 하말의 문양이 새겨져 있더군.”
“……확실해?”
고개를 끄덕이는 성산하의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젠장……. 그런 상황이라면 가지 않을 수가 없잖아.’
포션은 미리 만들어 놓는 대도 공방은 어떡하지? 나를 보려고 험한 산과 강을 건너 온갖 위험 요소들을 뚫고 찾아오는 내 손님들은 또 어떡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내 앞에 멈춰 선 성산하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들어 올리는 손길에 당황해 놈의 팔을 붙잡았다.
“야, 성산하. 여기 CCTV…….”
“여긴 어쩌다 다친, ……응? 뭐라고?”
걱정스레 묻던 성산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바라보던 눈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웃음이 흘러넘치는 얼굴에 욕을 짓씹었다.
“씨발…….”
“갑자기 CCTV는 왜. 무슨 생각 했길래 그래 의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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