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50.
“개소리 마.”
팔을 내치던 손목이 잡혔다. 씩 웃는 얼굴이 재수 없었다.
성산하가 카메라가 있는 쪽을 흘깃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보안이 철저하네. 내부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걸.”
“당연하지.”
“CCTV 없는 곳은 어딘데?”
“연구실이랑 내 방.”
“갈까?”
“뭐? 거길 왜 가…….”
별생각 없이 되묻다 손목 안쪽을 은근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너 이 미친…….”
“바로 알아들어? 대견해라. 우리 의진이 다 컸네.”
“또라이 새끼야!”
“쉿, 조용해야지. 애 깰라.”
승연이의 방이 있는 곳을 눈짓하며 속삭이는 모습에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깨진 않았는지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너 이 새끼…….”
놀림당한 기분이 분해 입을 여는데 볼에 성산하의 손길이 닿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따스한 감각. 볼에 상처가 났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뭐야, 언제…….’
멍하니 쳐다보는데 성산하가 다 끝났다는 듯 검지로 톡톡 볼을 두드렸다.
“포션 신경 쓰는 것의 반만이라도 몸 생각 좀 해 주지?”
“겨우 생채기 가지고 유난은. 이래서 힐러들은 안 된다니까.”
귀찮게 놈의 손목을 잡아 내리다 흰 장갑을 보고 멈칫했다. 시선을 느낀 성산하가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보다 더 빨리 손목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에 손 좀 보자.”
“글쎄. 그럴 필요 있을까.”
“이제야 좀 연구할 시간이 생겼거든.”
“시간 낭비야. 정 벗기려거든 장갑 말고 다른 쪽은 어때?”
“지랄 말고 빨리 장갑 벗어. 이러니까 존나 수상한 거 알지.”
노려보며 말하자 결국 성산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곧바로 장갑을 벗겨 냈다.
새하얀 천 아래 숨겨져 있던 살갗을 보자마자 헛숨을 삼켰다. 역시나 숨기려 한 이유가 있었다. 성산하의 손은 전보다 훨씬 악화된 상태였다. 손끝만 물들였던 검은 빛이 이제는 손목 위까지 타고 올라 팔뚝 반절이 온통 새까맸다. 썩은 건 아닐지 의심스러운 피부 사이로 도드라진 핏줄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원래 이 정도 아니었잖아.”
“그러게. 덧났나?”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리는 성산하에 열이 뻗쳤다.
“씨발, 손이 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지금 농담이 나오냐?”
언젠가 치료제를 만들어 봐야겠다 막연히 생각만 했던 것이 후회됐다. 이렇게 전이가 빠를 줄 알았다면 곧바로 알아볼걸!
‘의신의 손길.’
손을 잡은 채로 스킬을 사용했다. 상태가 심각해진 만큼 무언가 실마리라도 뜨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성산하의 상태창은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 성산하 - 헌터 >
-속성 : 선/빛
-■■■■■■■■
-■■■■■■■■■■
-■■■■■■■■■■■■■■■■■■
<치료법>
►■■■■■■■■■
►■■■■■■■■■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까만 글자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그 형태가 변했다.
‘대체 이게 무슨 근본 없는 언어야.’
생전 본 적 없는 문자인 데다 계속 바뀌기까지 해 글자는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S급 스킬인 의신의 손길로도 진단이 되지 않다니. 결국 1부터 100까지 모두 다 직접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독에 중독된 게 아니라 해독제는 쓸모 없을 테고. 저주에 걸린 거라면 해금을 해야 한다는 건데……. 디버프 포션이라면 효과가 있으려나?’
“언제부터 심해졌어? 분명 각성 대전 전까진 멀쩡…. 멀쩡은 아니지. 여하튼 심하지 않았잖아. 맞다, 저주라는 걸 알면 언제 이렇게 됐는지도 기억한단 소리야? 어쩌다 저주에 걸리게 됐는지 좀 말해 봐. 아픈 건 아니라고 했지?”
“네에. 선생님. 아프진 않아요.”
실마리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둘러보며 묻는데 장난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있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눈썹을 뚝 떨어트린 성산하가 손을 깍지 껴 잡아 제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아픈 척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선생님, 이상해요. 선생님만 보면 심장이 뛰고 열이 나는데. 어떡하죠? 이거 먼저 치료해 주면 안 될까?”
“…뒤질래?”
“키스면 될 것 같은데.”
손등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감각에 넌더리 치며 손을 뿌리친 나는 손등이 빨개질 정도로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씨발, 개수작 부리지 마. 그땐 어쩔 수 없었지만 다신 너랑 키…, 그딴 짓 할 생각 없으니까.”
나는 게이가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며 카운터를 돌아 나갔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성산하는 의도적으로 저주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장난치는 척 질문을 무시하고 헛소리로 말을 돌리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단순히 불편해하는 감정을 넘어 뭔가를 숨기려 하는 게 느껴졌다.
‘……연구 전에 성산하 뒷조사부터 해 봐야 하나.’
뚱한 표정으로 성산하 앞에 멈춰 섰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조금 잡고 그대로 쥐어뜯었다.
“아.”
살짝 찌푸려진 눈과 항의하듯 부러 소리 내어 뱉은 짧은 신음. 내 손엔 옅은 빛의 머리카락 열댓 개가 집혀 있었다. 황당하단 표정으로 머리카락이 뽑힌 곳을 매만지는 놈을 본체만체하며 작은 봉투 안에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머리카락 좀 빌린다. 실험에 필요해.”
“소용없다니까.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소용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정해.”
성산하가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머니에 봉투를 넣으며 카운터 한편의 달력을 확인했다.
“던전 일주일 후에 열린댔지. 바로 들어가야 해?”
“응. 우리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체할 시간이 없어.”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의외였는지 성산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사방에 가득한 거울들과 화려한 조명, 새하얗게 넓은 공간의 중앙에는 소파 하나만 놓여 있었다. 하루에 오직 한 팀만 받는 VIP 쇼룸이었다.
화려한 내부에 기가 죽어 몸을 움츠린 승연이가 주위를 곁눈질하며 속삭였다.
“의, 의진 님. 여긴 왜 온 건가요?”
“장비 좀 보려고. 내일 모래 던전 가는데 맨몸으로 갈 순 없잖아.”
“아…. 장비를 이런 곳에서도 팔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확실히 일반적인 일은 아니긴 했다. 그래서 성산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머리로 어떤 장비가 필요할지 고민하며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향기로운 차들 사이에서 사과주스를 골라 입에 물었다.
‘역시 맛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장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똑같은 규격의 상자를 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줄지어 들어왔다.
“하하핫, 반갑습니다. 인타워 무기 섹션 관리자 우지완입니다. 천랑에서 오신다고 해서 좋은 무기로 골라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별로 안 기다렸어.”
“말씀하신 대로 가볍고 빠른, 기동성 좋은 무기들로 골라 왔습니다. 방어구 일체는 카탈로그에서 골라 주시면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완의 손짓에 테이블 위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겉의 화면에 대략의 정보들이 띄워져 있는데 가져온 것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 비, 에이, 씨, 비, 비, 비. 등급이 이게 다 뭐야.’
피라미드 가장 위로 마지막 상자가 놓이고 우지완이 뿌듯하게 나를 바라봤다.
“편하게 고르고 말씀해 주세요. 테스트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게 다야? 고를 게 없는데.”
“아, 그러시군요. 고를 게 없…. 네? 고를 게 없다고요?”
놀란 눈을 한 우지완에게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급이 너무 구려서 테스트 해 볼 마음도 사라졌어.”
“아, 그것이 고객님. 저희 인타운은 고유의 프리미엄 등급제를 통해 고객님들 개개인에 가장 알맞은 맞춤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알아. 등급제란 거잖아. 그래서 묻는 거야. 왜 B급을 가져왔느냐고. 물량이 없는 건 아니겠고 설마 걔가 B급이란 거야?”
장비가 필요하단 내 말에 성산하가 천랑 창고를 열어 줬지만 내가 원하는 크기와 기동성을 가진 S급 장비가 없어 굳이 아이템 쇼룸까지 찾아온 거다. 그런데 천랑 길드장의 이름을 대고 방문한 쇼룸에서 내놓는 게 겨우 B급이라니. B급 정도면 굳이 아이템 쇼룸까지 올 필요 없이 우리 공방 옆집 대장간 가서 사도 된다. 천랑 창고에도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태제헌과 쇼룸에 다닐 땐 S급 이하로는 본 적도 없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태제헌이 이상한 거야, 성산하가 이상한 거야?’
성산하가 아이템 쇼룸에서 B급이나 받는 신세였다니. 대체 길드 생태계가 어떻게 되먹은 거지? 속으로 심각하게 걱정 중일 때 누군가 급하게 룸 안으로 달려왔다.
“지, 지완 실장님! 골드 카드였어요! 천랑에서 온 게 아니라 천랑 길드장 소개로 직접 오신 고객님입니다!”
“뭐, 뭐? 그걸 혼동하다니 미쳤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텅 빈 공간인지라 소리가 반사되어 귀에 다 들어왔다. 옆에 앉아 있던 승연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봤다.
하얗게 질렸다 시뻘겋게 열이 올랐다 하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앞의 직원에게 열을 내던 우지완과 눈이 마주쳤다. 지완이 곧바로 허리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고객님. 예약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습니다. 천랑 길드장님 예약으로 오신 줄을 모르고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습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럼 B급 말고 위 등급도 볼 수 있단 소리지?”
“당연합니다. 저희 인타운에서 보유한 모든 장비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지완의 확답을 듣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실수라니 다행이다. 성산하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진 S급 다 내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