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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51화 (151/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51.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탑은 아직 밝혀진 게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내부의 사람들을 갑자기 튕겨낼 정도로 수상한 힘을 지닌 데다 스테이지형 던전이라 끝이 어딘 줄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단 소리였다. 운이 좋다면 20층의 막힌 문만 뚫어 주고 나오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지 말자.

‘장비 맞췄고, 포션은 내가 만든 원액을 가공해서 팔면 되고. 공지도 올렸고. 이 정도면 준비는 끝인가.’

공방에 온갖 이목이 쏠려 있는 지금, 다람쥐만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불안했다. 내가 없어도 길드들의 경호는 그대로일 거라 했지만 요새 손님들 사이에서 또라이가 보이는 일이 잦아졌는데.

내 장비를 구하는 김에 쇼룸에서 승연이가 쓸 만한 무기를 하나 사 줬다. 잘 사용할 수 있을지가 문젠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승연이의 뒷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승연아. 미친 새끼 와서 시비 걸면 참지 말고 장비 들어서 패.”

“네, 네? 하지만 의진 님. 던전이 아닌 곳에서 아이템을 사용하면 안 되는데요…….”

“그건 나중에 해결할 일이고. 일단 패. 무기가 그러라고 있는 거지. 공방에 혼자 있기 무서우면 진명이나 수철이, 자고 가라고 부르고.”

내 말에 승연이가 쑥스러운 얼굴로 양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제가 애도 아닌걸요……. 공방은 제가 안전히 지키면서 의진 님 기다리겠습니다.”

“응. 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만약 미적거린다면 헌터들 몰래 음식에 각성 포션을 탈 생각도 있었다.

내 곁으로 다가온 승연이가 가운 주머니에서 납작한 상자 하나를 꺼내 건넸다.

“저도 하나 준비한 게 있습니다. 이거…….”

“뭔데?”

“의진 님께서 주신 무기만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상자 안에는 작은 금속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포션병이나 제작기구 등 포션 메이커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작게 조각되어 있었다.

“하하, 이게 뭐야. …고마워.”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꽤나 귀여웠기에 고맙다 말하며 그것을 꺼내는데 내 손이 닿자마자 장신구가 몸을 부풀렸다.

몇 배로 커진 것은 더 이상 장신구가 아니었다.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제작도구들을 보고 황당히 눈을 깜빡였다.

“뭐, 뭐야. 그냥 배지 같은 거 아니었어?”

“저기 옆 골목에 솜씨 좋은 인챈터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의뢰했습니다. 던전은 아주 열악하다고 들었어요. 의진 님 제작 활동에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서, 선물이라기엔 너무 약소하지만 혹시 모르는 때를 대비해……. 아앗!”

덥썩 끌어안자 승연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탑 들어가면 갓 딴 신선한 신재료들 실험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동식 제작도구라니, 정말 최고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했어?”

“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SS급 제작 스킬 황금 솥을 가지고 있어 포션을 만드는 장소의 구애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순도 높고 정확한 포션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 역시 공식을 따라야 했다. 이 말은 즉, 던전에서 신선한 재료들을 얻더라도 포션을 만들기 위해선 던전 구석에 앉아 재료들을 다듬거나, 말리거나, 껍질을 까야 한단 소리였다. 존나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료를 다듬으려 인벤토리에 주머니 칼도 하나 챙겨 뒀었는데 겨우 이 작은 배지가 그런 문제점을 모두 해결해 준다니.

승연이가 준 배지를 벨트에 단단히 매달며 웃었다.

“이것만 있으면 던전에서 몇 주라도 버틸 수 있겠다.”

“하, 하지만 빨리 돌아와 주세요…….”

“당연하지.”

***

드디어 제주도로 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포션과 재료들을 넣어놓은 30칸짜리 인벤토리 기능이 있는 벨트를 차고, 이번에 새로 구한 단도까지 매다니 던전으로 떠날 준비가 끝났다. 아래서 멀뚱히 날 바라보는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준비됐어?”

“메에에-.”

“탑이 왜 널 부르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 보자. 들어와!”

왼쪽 발을 한 번 구르자 구름이가 머리를 콩 박고 문양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나와 로비로 내려가자 제로와 청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아 안녕, 제로도.”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밖에 천랑의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벌써? 빨리 가자.”

제주도로는 천랑의 전용기를 이용해서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성산하가 빨리 도착해 시간이 남으면 제주도 구경을 시켜 준다고 했다. 오후 비행기를 아예 오전으로 옮긴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의진 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손을 흔드는 승연이와 수철이를 뒤로 하고 사람들이 없는 큰 길에 대기하고 있던 하얀 리무진에 올라탔다. 먼저 타고 있던 성산하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좋은 아침.”

뻥 뚫린 도로를 달려 전용기가 있는 항공센터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활주로를 배경으로 대기하고 있는 커다란 비행기를 보자 던전에 가는 길이라는 것도 잊고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몇 번 타 본 적 없던 비행기인데 전용기라 우리만 탑승한다니!

“내가, 내가 첫 번째로 타 볼래.”

후다닥 계단을 올라 비행기에 탔다. 아무도 없는 내부를 상상하며 코너를 돈 순간 정 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태연히 앉아 팔랑팔랑 잡지를 넘겨 보고 있는 건 분명 임단이었다. 검은색 칼 단발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황당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퀘스트지 뭐겠어? 청이는?”

퀘스트라면…,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차가운 얼굴로 내 물음에 대충 답하던 임단은 내 뒤로 들어오는 청이를 보자마자 표정이 활짝 폈다. 제 옆자리를 손짓하며 말했다.

“청아. 여기 앉아.”

“……경호가 우선이라.”

내 주위에 앉겠다는 말에 임단이 나를 노려봤다. 머리를 긁적이는데 제로에 이어 성산하까지 비행기에 탑승했다. 곧바로 성산하를 잡아끌어 속삭였다.

“……야! 임단은 갑자기 왜 있어? 설마 탑에 같이 가?”

나를 창가 자리에 앉힌 성산하가 옆에 앉아 답했다.

“세계적으로 지정된 재난 특별법 탓에 성좌의 안위와 더불어 S급들의 퀘스트가 가장 우선시돼. 그들이 퀘스트를 빌어 성좌를 지킬 권리를 주장하면 막을 방법이 없지. 널 합법적으로 따라다닐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야. 공방은 특별법 제정 전에 손을 써 뒀지만 그 외의 지역에선 다른 방법이 없어.”

“뭐야, 누구 마음대로? 난 그딴 보호 필요 없어!”

“임단뿐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아마 탑에 같이 들어가려 대기 중일 거다.”

성좌 지도에 이어 그딴 걸 합법화라니? 씨발, 또라이들 아니야? 퀘스트 자체가 없어져야 할 폐단이다.

‘S급들은 저딴 퀘스트나 받아 왔는데 내 퀘스트는 뭘 하는 거야? 스킬이라도 돌려주든가.’

퀘스트가 이대로 비활성화되어 돌아오지 않길 빌었던 때가 무색하게 아직도 잠잠한 내 메인 퀘스트를 괜히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불만을 삼켰다.

그나마 비행기가 이륙하며 보인 하늘이 내 마음을 위로해 줬다. 뭉게뭉게 떠오른 구름을 보자 구름이에게도 이걸 보여 주고 싶었다. 몇 자리 건너 임단이 잠에 든 걸 확인하고 슬쩍 발목을 두드려 구름이를 불러 냈다. 손짓에 퐁 튀어나온 구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미-.”

“구름아, 쉿!”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구름이가 똑똑하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댔다. 옆에서 성산하의 어이없다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구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창문을 볼 수 있게 높여 줬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분홍빛 귀에 속삭였다.

“저게 구름이라는 거야. 너랑 똑같이 생겼지?”

메에- 소리 대신 귀가 팔락팔락 움직였다. 귀여운 모습에 킥킥 웃는데 흰 장갑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산하가 신기한 눈으로 구름이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내 손길이 아닌 걸 알아챘는지 힐끔 뒤돌아본 구름이가 푸르륵 콧김을 뿜고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열대 던전에서나 보이던 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높은 건물이 적어서 그런지 훨씬 넓은 하늘과 검은색 돌들을 보자 꼭 외국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저 행성들만 없었어도 더 멋졌을 텐데.’

하늘에 떠오른 두 개의 행성, 그리고 저 멀리 검은 기둥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와 성산하, 청이와 제로, 그리고 임단까지. S급 다섯 명으로 이뤄진 파티 아닌 파티가 결성됐다. 곧장 바닷가로 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구경하고 근처에 유명하다는 제주도 흑돼지를 100만 원어치 먹어 치웠다. 내가 전부터 탐내던 재료, 제주도 자생 독고사리를 채집하기 위해 한라산 중턱에 있는 수목원 속 던전에 잠시 들르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 뒤를 쫓는 미행을 몇 번 눈치채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신경 쓰면서도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나를 쫓아 온 S급인 듯했다.

신경에 거슬리는 것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다가오진 않아 다행히 내 첫 제주도 나들이를 망치는 일은 없었다.

호텔에서 마지막 편안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제주도 탑이 있다는 천지연 폭포에 도착했다.

중심부는 기둥 하단부에 모조리 먹혀 버린 상태라 남은 것은 폭포로 방향을 알려 주는 안내판뿐이었다.

탑 입구가 있는 곳은 재진입을 위해 대기하는 헌터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입구 가장 앞으로 갔다.

“게이트 다시 오픈하겠습니다!”

일렁이는 파장이 점점 커지며 게이트가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뒤에서 헌터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갑자기 청이가 칼을 소환했다.

‘뭐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이 씨발…….”

태제헌이 부하들을 이끌고 내 쪽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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