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52.
태제헌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리는 단도 손잡이를 쥐려던 때 성산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태제헌의 모습이 가려지고, 임단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애들이랑 뒤로 피해 있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한 발 뒤로 물러난 나는 청이와 제로의 옆에 서서 태제헌이 이끌고 온 녹스 놈들을 꺼림칙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 씨발 새끼가 여길 왜 온 거지?’
강의진이라는 것을 밝힌 후 내가 가진 성좌들로 인해 국가와 S급들의 공개적인 비호를 받게 되었다. 차라리 급습을 당하면 당했지 이렇게 당당하게 마주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태제헌이 남 눈치는 좆도 신경 안 쓰는 또라이라지만 S급이 한둘도 아닌 여기서 난리를 피울 리가 없…. 있나?
“……어려운 걸음 하셨군. 여긴 무슨 일이지.”
태제헌의 속내를 유추하려 온 신경을 놈에게 쏟고 있던 나는 성산하의 목소리에 놀라 녀석을 쳐다봤다. 평소와 별 차이 없는 느긋한 목소리였지만 그 사이에서 차마 숨겨지지 않는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이 아예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보육원 일 때문인가?’
“천랑과 같은 이유로, 친히 성좌를 보호하러 왔지.”
“하! 개소리. 그쪽이 언제부터 그딴 거 신경 썼다고?”
임단이 대놓고 비웃었다. 버릇없는 건 두고 보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아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는데 태제헌은 이상하게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내 옆에 서서 같은 곳을 구경 중이던 제로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흐음. 예상했던 것 중 가장 최악의 동행이네요.”
“동행은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씨가 될라.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치는데 제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잖습니까. S급 퀘스트를 빌미로 권리를 주장하면 마땅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녹스잖아! 그딴 권리를 왜 들어줘야 하는데.”
“법이 그러니까요?”
“씨발, 태제헌은 법 같은 거 신경 안 쓰는데……!”
억울한 마음에 답답해 발을 쾅 굴렀다.
나머지 길드들이 대치하듯 녹스를 둘러쌌다. 녹스와의 대치로 인해 던전 입장이 늦어지자 모인 헌터들 사이에서 우후죽순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나둘씩 무기를 빼 들거나 몸에 스킬을 두르는 등 분위기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불만 없다면 먼저 들어가지.”
태제헌이 그대로 녹스 놈들을 이끌고 성산하를 지나쳐 갔다.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는 것을 보니 제로의 말마따나 막을 명분이 없는 듯했다.
태제헌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무 말 없이 나를 훑고 지나간 시선에 그대로 얼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녹스가 먼저 탑 내부로 사라지고 난 뒤, 남은 헌터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수백 명의 헌터들이 게이트를 향해 앞다퉈 달렸다. 관리인이 입장을 막으려 했지만 흥분한 인파를 다루기란 쉽지 않았다.
“잠시 대기하세요! 아직 탑에 입장해서는 안 됩니다!”
“웃기지 마! 녹스는 먼저 들어갔잖아!”
“던전을 독점할 생각이지? 비켜!”
무너진 질서를 뒤로하고 성산하와 임단이 내게 돌아왔다.
“저 새끼 다 알고 온 게 분명해.”
흘깃 게이트를 돌아보며 말하는 임단 옆에서 청이가 단호한 얼굴로 검을 꾹 쥐었다.
“절대 함께 들어가선 안 됩니다. 사장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확실히 던전이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납치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죠.”
“납치뿐이겠어? 사이비랑 손잡았다면 강의진을 죽이려 들 텐데.”
다들 한마디씩 내뱉는 걸 가만히 듣고 있는데 성산하가 내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난….”
혼란스러운 틈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은 천랑과 그 동맹 길드들뿐이었다.
“당장 오늘 들어갈 필요는 없어. 남산이나, 다른 나라들의 상황을 조금 지켜봐도 되니까.”
“……20층은 막혔다고 했지.”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다 그대로 시선을 올려 하늘까지 이어진 거대한 검은 기둥을 응시했다.
내가 성좌를 가진 이상 언젠간 들어가긴 해야 한다. 게다가 상대가 태제헌이라면…….
“피할 필요 없어. 들어가자.”
“뭐? 너 제정신이야? 저딴 식으로 나오는데 함정일 게 분명하잖아. 호랑이 아가리 안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공방 오래 비우기 힘들어.”
태제헌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어떻게든 사냥하겠단 경고였다. 오늘을 피해서 다음에 온대도 무조건 마주칠 거다. 그럴 바에야 오늘 상대하는 게 낫다.
임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이었지만 성산하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들어가야지.”
“진심이야? 쟤야 아무것도 모른다고 쳐도 너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
“강의진을 노리는 자들은 태제헌 외에도 또 있지. 시간 끌어 봤자 놈들이 끼어들 기회만 줄 뿐이야.”
성산하의 명에 헌터들은 빠르게 재정비를 마쳤고 잠시 지체됐던 던전 진입이 시작되었다. 던전은 전에 뉴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푸르른 하늘에 우주처럼 천체가 뒤섞여 있었다. 그를 제외하면 탑의 생태계 자체는 전에 성산하와 가 봤던 스테이지 형 던전과 매우 흡사했다.
별거 없네-라고 생각하던 때 눈앞에 펼쳐진 내 상식을 벗어난 새로운 재료들의 향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저거 졸린 가지 아니야? 그런데 왜 빛이 나지?”
“저건 졸린 가지가 아니라 꿈꾸는 가지입니다. 탑 내의 생태계는 밖과 달라서요.”
후다닥 달려가서 꿈꾸는 가지를 채집해 왔다. 채집해 감정하는 동안 제로가 근처의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졸린 가지랑 효능이 아예 다르잖아!’
이걸로는 또 어떤 포션을 만들 수 있을지 기대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벤토리 안에 잘 집어넣고 고개를 드는데 앞에 분홍빛 늑대가 스쳐 지나갔다.
“라이칸스로프 색은 또 왜 저래?”
“쟤는 라이칸아카모프야.”
“발톱, 발톱 하나만 구해 가자!”
내가 단도에 손을 대기도 전에 청이가 칼을 휘둘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칸아카모프가 바닥에 쓰러졌다.
“청아. 고마워!”
달려가서 발톱과 털까지 한 줌 채집해 돌아오자 임단이 팔짱 낀 채 삐딱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보일 때마다 달려갈 생각이야?”
“난 포션 마스터라고. 새로운 재료가 보이면 채집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여기 채집하러 왔냐? 다들 기다리잖아.”
“기다리면 뭐 어때? 어차피 나 없으면 20층에서 평생 기다릴 놈들이.”
“하여간, 싸가지는 마스터 급이네…….”
“바쁘다며? 빨리 가자. 다음 층! 다음 층!”
임단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입장한 탓에 초반 층은 발에 사람이 치일 정도로 혼잡했다. 하지만 점점 본인의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몬스터 사냥, 아이템 채집 등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헌터들이 계속해서 이탈해 나갔고 던전 돌파가 목적인 헌터들만 남기 시작했다.
천랑이 무리의 중심이긴 했으나 지시를 내리는 건 아니었다. 여러 길드와 팀들이 각개로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사냥했는데 이미 한 번 뚫었던 층들이라 그런지 처치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층이 올라갈수록 먼저 앞을 휩쓸고 지나간 누군가에 의해 몬스터가 적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익숙한 스킬의 흔적을 못 본 체하며 내가 갖고 싶은 재료들을 쇼핑하듯 모두 쓸어 담았다. 큰마음 먹고 주문한 30칸짜리 인벤토리 기능이 있는 A급 벨트가 가득 차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안돼, 공간이…….”
“언제 다 차나 했더니. 드디어 다 찼네! 이젠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바로 직진만 하자고.”
이제 겨우 4층인데 벌써 이러면…! 속 시원하게 웃는 임단마저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 아이템을 든 채로 우왕좌왕하자 청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무 칸 정도의 여유는 있는데 제가 맡아 드릴까요.”
“정말? 그래 주면 고맙고. 그럼 좀 부탁할게.”
청이에게 재료를 내미려는데 뭔가가 휙 날아왔다. 낡고 얼룩진 갈색 주머니를 얼떨결에 받아 채자 주머니를 던진 장본인인 성산하가 말했다.
“탑에선 이거 쓰도록 해.”
“얼마나 들어가는데?”
“무제한.”
“뭐, 뭐?”
무제한이라니, 무제한 가방 아이템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아이템을 살폈다. 무제한이란 이름에 걸맞게 역시나 S급 아이템이었다.
<저주받은 탐욕자의 입>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영지민들의 원망을 산 영주. 결국 탐내서는 안 될 것을 탐하다 악마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믐달의 밤이 지난 후, 영주의 침대에는 사람 대신 이 주머니만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매우 탐욕적이라 그 어떤 아이템도 집어삼킨다. 하지만 악마의 저주로 인해 두 번째 담는 물건은 모두 소멸되어 버린다.
“종류는 무제한이지만 각 아이템은 단 하나씩만 보관할 수 있어. 심지어 한 번 들어갔던 아이템은 다시 넣지 못하지. 이 제한 때문에 밖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만.”
“최고다!”
같은 아이템을 넣지 못한다는 것은 가방 아이템으로는 실격이었다. 수시로 뺐다 넣었다 해야 하는 포션도 넣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신재료들이 넘쳐나는 탑에서는 무엇이든 집어넣을 수 있단 소리였다. 개수 제한 역시 샘플 용도로 채집 중인 내게는 큰 문제 없었고.
“고마워!”
옆에서 임단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저딴 아이템이 있었다니…….”
***
탑의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던전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S급들이 여럿 속한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 만에 여섯 개의 층을 주파하고 다음 층인 7층으로 가는 워프를 앞에 두고 잠시 멈췄다. 수백 명이 넘던 무리는 어느새 백 명도 안 되는 수로 줄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조금만 더 힘내서 다음 층에서 야영하도록 하지.”
“네!!”
헌터들을 다루는 성산하를 뒤로하고 인벤토리를 정리하는데 청이가 내 곁에서 미친 듯이 무기를 갈고 있었다.
“오늘 사냥 거의 다 끝났는데 뭐 하러 무기 갈아? 야영지 가서 좀 쉬다 수리하지.”
“쉴 수 없습니다.”
“응?”
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옆에 있던 제로가 웃으며 말했다.
“야영지에 선객이 있을 테니까요.”
“선객이라면…….”
“태제헌말이야. 함정 다 차려 놓고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걸.”
툴툴대는 임단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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