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53.
맞다, 우리 앞엔 태제헌이 있었지. 몇 층을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굳이 7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여기서 자자, 그냥.”
“말이 돼? 여기서 어떻게 자?”
“여기서… 말입니까?”
청이마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 말대로 주위는 발 디딜 틈 없는 온통 진흙뿐인 늪지대였다.
하긴, 성산하도 피할 수 있으면 피했겠지. 태제헌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7층으로 가자고 한 걸 보면 인접한 층 중에선 베이스캠프로 삼을 만한 곳이 없단 소리였다.
“헛소리는 됐고, 빨리 가자. 좋은 자리는 이미 차지했겠지만 둘러보다 보면 머물 만한 곳이 더 있겠지.”
작은 반항은 임단 선에서 정리되었고 끌려가듯 터덜터덜 워프로 향했다.
7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숲이 펼쳐졌다. 푸르른 초목과 단단한 대지. 정말 여기 말고는 다른 대안은 없었구나 싶어 입을 삐죽대며 성산하와 임단의 뒤를 따라갔다.
미처 회복되지 않은 지형들 사이로 태제헌이 지나간 흔적들이 점점 많아졌다. 새카맣게 변해 짐승에게 물어뜯기기까지 한 사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룬과 루트의 흔적이었다.
‘아주 제집처럼 날뛰었네.’
이 정도쯤은 조용히 처리할 수 있으면서 개새끼들을 풀어 이렇게 난리를 쳐 놓고 간 건 내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미친 새끼…….”
제게 욕을 하는 줄 알았는지 앞서 걷던 임단이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너 부른 거 아니거든.”
투덜대며 몬스터들의 사체에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전진하던 무리는 강 하나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강만 건너면 곧바로 베이스캠프입니다.”
“김여진 헌터는?”
“아직입니다. 멀지 않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아까 몇 명의 헌터들이 무리에서 이탈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봤는데 그들을 기다리나 보다. 역시나 잠시 대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커다란 바위에 털썩 주저앉는데 옆에 서 있던 제로가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사장님. 기다리는 김에 배 좀 채우시죠.”
“무슨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고맙다. 감동인데?”
마침 배가 고프던 차였다. 신선한 음식은 던전에 들어온 초기에나 먹을 수 있었기에 기쁘게 받아 덥썩 물었다. 둥글게 호선을 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제로는 내가 씹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뭘요. 이따 녹스 길드장을 만나면 입맛이 뚝 떨어질 것 아닙니까. 후후.”
“켁! 쿨럭, ……씹.”
나중으로 갈 것도 없다. 지금도 목이 콱 막혀 체할 것 같았으니까.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에 가득한 빵 쪼가리를 으적으적 씹어 삼키는데 아까 떠났던 헌터들이 돌아온 게 보였다. 곧 다시 출발하려나? 일어났지만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는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머물 만한 곳은 베이스캠프 한 곳뿐입니다.”
“그냥 저기, 분지 쪽에 자리 펴면 안되나?”
“그러기엔 너무 몬스터 서식지 정가운데인걸요.”
“조금 분산해서 머무는 건 어떻습니까?”
“아서라, 그러다 녹스 새끼들이 급습이라도 하면?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고.”
“왜, 무슨 문제 있어?”
말하던 놈들이 나를 돌아봤다. 의아한 표정으로 턱짓하자 청이가 가만히 말했다.
“원래 이 층에 베이스캠프 외에도 머물 만한 곳들이 몇 군데 있어 그곳에서 머물 예정이었는데 확인해 본 결과 모두 파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설마 태제헌?”
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성산하를 돌아봤다.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그다지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베이스캠프로 가는 수밖엔.”
강을 건너자 머지않아 숲 한가운데 천막들이 세워진 공간이 나타났다. 확실히 주위에 몬스터도 적고 주위를 둘러싼 절벽이 엄폐물이 되어 하룻밤 머물기 좋아 보였다. 녹스 놈들을 곧바로 마주칠 줄 알았는데 여기에는 빈 천막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혹시 8층으로 올라간 건 아닐까요?”
“밤을 보낼 곳을 찾으려면 10층까진 가야 해. 아무리 태제헌이라도 오늘 10층까지 갈 순 없어.”
“실수로 죽은 거였으면 좋겠다.”
태제헌 같은 괴물이 죽을 리 없었지만 작은 소망을 그리며 베이스캠프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탑에서 튕기기 전에 세운 듯한 천막들엔 헌터 협회 로고와 각종 기업들의 스폰서십 광고가 그려져 있었다. 그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광고를 이런 데에도 하네. 뭐, 내 공방은 이런 거 안 해도 잘나가니까.’
다들 마땅한 천막들을 골라 짐을 풀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도 이리저리 기웃대며 어디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천막 내부는 간단한 가구들이나 야전 침대뿐으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던전 안인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감지덕지지만.
구름이도 몰래 밖으로 꺼내 주려 조금 외떨어진 천막을 고르려는데 갑자기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주인님이 ‘이리 온’을 하셨습니다. 서둘러 주인님께 달려갑니다.」
“이 새끼가…….”
동시에 발이 저절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가장 안쪽의 천막에 가서야 멈춘 나는 짜증스레 입구를 가린 천을 거두고 들어갔다. 성산하가 놀란 척 나를 돌아봤다.
“형이랑 같이 자려고?”
“뒈질래? 네가 불렀잖아. 뭔데.”
왜 불렀냐며 빤히 쳐다보자 성산하가 베개 하나를 휙 던졌다.
“여기서 자.”
“싫은데. 널 뭘 믿고. ……구름아!”
성산하와 둘만 남았다는 걸 알아챘는지 말도 없이 튀어나온 구름이가 메- 하며 천막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성산하가 재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하말은 좋다는데.”
“웃기시네, 구름아. 이리 와. 어? 저 새끼 믿지 말랬지.”
성산하를 휙 돌아본 구름이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밥을 달라는 것 같아 인벤토리를 뒤지며 중얼거렸다.
“우리 구름이 원래 말 잘 알아듣는데…….”
“메에에에-”
“하말이 보는 눈이 있군.”
“나 포션 만들 거니까 방해나 하지 마.”
“식사 준비 중이니 적당히 하고 나와.”
결국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투덜대며 짐을 풀었다.
승연이가 준 휴대용 제작 도구들을 펼쳐 놓은 채 오면서 구한 재료들을 다듬었다. 재료 자체가 새로운 것과는 별개로 이상하게 몇몇 재료들에서는 독 속성이 없음에도 <정화>라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왜 이러지?”
성산하가 준 ‘탐욕자의 입’에는 아이템을 하나씩밖에 넣지 못해 이게 재료 자체의 특성인 건지 아니면 내가 구한 재료에 문제가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늘어놓은 재료들을 보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구름이한테 재료 줄 때도 조심해야겠네. 같은 재료들 더 구해 봐야지 안 되겠다.”
라이칸아카모프의 발톱처럼 특정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몬스터의 부산물은 당장 구할 수가 없었다.
채집할 만한 것들이 뭐가 있었지? 오는 길에 스치듯 봤던 기억들을 뒤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헌터들이 모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야 물을 끓이는 모습을 보니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한쪽에서 천랑 놈들과 대화를 하는 성산하와 베이스캠프 바로 뒤 절벽에 붙어 자라는 약초들을 번갈아 봤다.
무기도 있는 데다 애새끼처럼 쫄래쫄래 달려가 재료 구하러 같이 가 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뭐, 먼 곳도 아니고 별일 없겠지.
풀어놓은 무기를 다시 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어디선가 청이와 제로가 나타났다.
“엇, 뭐야.”
“태제헌이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위험하니 함께 가겠습니다.”
“미리부터 조심하자는 뜻에서. 탈출은 영 체질에 맞지가 않더군요. 후후.”
혼자 돌아다니려던 걸 들킨 마음에 괜히 머쓱해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여기 바로 뒤에 풀만 채집하고 금방 오려고 했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가깝긴 하네요. 그래도 임청 헌터와 둘만 보내긴 불안하답니다. 그닥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죽고 싶나.”
청이가 서늘한 눈으로 제로를 노려봤다.
데려가 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갔다 와서 저녁 먹자.”
***
절벽은 예상외로 노다지였다. 원했던 재료들은 물론이고 몇몇 새로운 광물까지 발견해 눈이 돌아갔다. 양손을 이용해 채집 스킬을 사용하자 내가 지나간 자리 위로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눈을 떼지 못하고 구경하던 제로가 황금빛 기운이 감도는 내 손을 보며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고밖엔 보이지 않는 속도입니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나 포션 마스터 강의진이야. 채집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채집도 당연히 잘한다고.”
떠들며 채집하는 사이 어느새 재료들이 한 아름 쌓였다. 가방 아이템에는 한 번 넣었다 빼면 다신 넣지 못하니 뭘 넣을지 계산을 잘해야 했고, 인벤토리는 이미 다 찬지 오래라 원시적인 방법으로 들고 가야 했기에 이쯤 하려는데 갑자기 청이가 내 앞을 막아서며 검을 빼 들었다.
“청아?”
“나와.”
청이가 검을 겨눈 곳에서 태제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태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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