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54.
놈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가진 포션들을 확인했다. 태제헌을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해 제작해 두었던, 오직 태제헌만을 위한 살상 포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정성 들여 만든 세기의 수작들이었지만 이걸로도 저 괴물 새끼를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포션 마스터라면 저 새끼는 미친 또라이 마스터. 태제헌에겐 죽는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룬과 루트를 부르면 마취독부터 뿌리고, 직접 무기를 꺼내면 암흑탄. 생포라도 당하면 그땐 어쩔 수 없이 저걸 써야…….’
머리를 굴리는데 태제헌의 시선이 채집하느라 흙투성이가 된 손과 무릎에 차례로 닿아 왔다.
“도망까지 쳐서는 하겠다는 게 겨우…….”
쯧, 혀를 차는 소리에 울컥해 소리쳤다.
“여긴 대체 왜 온 건데요?”
태제헌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존댓말에 청이와 제로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그 둘은 안중에도 없는지 태제헌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롭지. 안 그래.”
“새롭긴 씹…….”
“강의진.”
경고성 짙은 음성에 불만스레 입을 다물었다.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제헌이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주는 것도 이번뿐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꿉장난들 슬슬 정리해.”
“웃기지 마요. 다시 돌아갈 일 죽어도 없으니까.”
태제헌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당장이라도 잡아 끌고 가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말 들어.”
서늘하게 내리꽂힌 말에 움찔했다. 개빡친 듯한 목소리보다도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뭐지, 방금 태제헌과 존나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참-아? 참는다고? 세상 제멋대로 사는 새끼가 참는다니? 뭘?
내 귀를 의심하며 황당히 되물었다.
“뭐 잘못 먹었어요? 이상하다. 아직 독은 안탔는데.”
갑자기 개과천선했을 리도 없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태제헌이 내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곧바로 그를 겨누고 있던 청이의 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태제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사장님께 이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
흘깃 청이에게 닿았던 시선이 날 향했다. 아무 미동 없이 바라보는 눈빛이 위험해 침을 꿀꺽 삼키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청이한테 손대면 그땐 안 참아요. ……청아. 검 내려.”
“사장님.”
“괜찮아.”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새끼다. 그런 놈이 직접 ‘참고 있다’라고 말한 건 반드시 참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 소리였다.
‘당장 데려갈 수도 없는데 굳이 탑까지 따라왔다는 건…….’
존나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도와주러 온 거예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청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로마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태제헌에게선 부정의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의 정적 후, 태제헌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쁜 소리군. 네게 붙은 기생충을 떼어 내는 것.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어.”
“기생충이라니, 뭘 말하는……. 씨발! 우리 구름이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뒤늦게 깨닫곤 구름이가 듣기라도 했을까 화들짝 놀라 발목을 바라봤다. 태제헌이 코웃음 쳤다.
“그것 때문에 타깃이 되고 이제는 부름까지 받아 탑에 들어온 주제에 정까지 붙였나.”
“알 바야? 씨발.”
툴툴대면서도 태제헌의 눈치를 봤다. 어쨌거나 내 귀에는 저 싸가지 없는 말이 꼭 퀘스트를 하러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다른 S급들처럼 말이다.
아직까지 태제헌은 공격을 하지도, 룬과 루트를 소환하지도 않았다. 전과 다른 모습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하긴 당장 나를 녹스로 끌고 간다면 S급들과 사이비, 대중의 시선까지 따라올 텐데. 아무리 태제헌이라도 그걸 죄다 무시할 순 없었겠지. 원인이 되는 성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당연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당장 녹스로 끌려갈 위협이 사라졌다는 건 큰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성좌 문제가 해결되면 돌변하겠지만 그건 일단 안전한 공방에 들어가 생각해 볼 일이고…….
‘이렇게 된 이상, 철저히 이용해 주마.’
눈을 빛내며 태제헌을 응시하는데 태제헌이 비뚜룸하게 웃었다.
“눈 똑바로 떠.”
“…….”
저 개새끼. 존나 싫어.
***
태제헌은 언제든 돌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떠났다. 사라지는 뒷모습에 가운뎃손가락을 쳐드는데 옆에서 제로가 실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구경을 했네요. 존대하시는 것 처음 봤습니다. 태제헌은 다르다는 건가요?”
“그냥 습관일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저도 사장님보다 나이 많은데. 후후후.”
헛소리에 황당하게 옆을 돌아봤다. 기분 나쁘게 히죽대는 제로의 얼굴을 보자 괜히 짜증 나 다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거야? 꺼져. 가서 멧돼지나 잡아 와.”
애써 채집한 재료를 챙겨 다시 돌아온 베이스 캠프는 아주 가관이었다.
“이게 다 뭐야?”
녹스 새끼들이 우리 베이스캠프랑 딱 붙여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심지어 따로 아이템을 챙겨 온 건지 베이스캠프보다 천막 상태가 훨씬 좋았다.
다들 당황했는지 웅성거리는 헌터들 사이로 임단이 씩씩대며 달려왔다.
“야! 너 어디 갔다와?”
“잠깐 뒤에 절벽. 재료 좀 채집하려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태제헌이 바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혼자 다니면 어떻게 해!”
“안 그래도 만나고 왔다.”
“뭐?”
임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청이가 대신 나서 말했다.
“제로와 내가 호위했어. 태제헌 역시 별다른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고.”
“말이 돼? 강의진 납치하려고 그 짓을 벌인 놈인데…….”
“나 먼저 들어간다! 짐이 많아서.”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아 도망을 선택했다. 뒤에 남은 임단이 뭐라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후다닥 내 천막으로 달렸다.
“후…. 한참 잡혀 있을 뻔했네.”
품에 한 아름 안고 있던 재료들을 나무 테이블 위로 펼쳐 놓았다. 채집한 이후 빠르게 상하는 재료들이 있어 부지런히 다듬어 둬야 했다. 인벤토리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렇게 허덕인 것은 선산의 주인 스킬을 막 얻었을 때나 그랬는데.
자리에 앉아 승연이가 준 제작 도구들을 펼쳐 놓고 재료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하던 중 다리에서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름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아?”
“메-.”
구름이가 위로 올려 달라는 듯 내 다리에 대고 발을 굴렀다. 귀여운 모습에 속아 위로 올려 주자 구름이가 덥썩 재료를 물었다.
“안 돼! 아직 독성 있는지 검수 못 했단 말이야!”
“미에에!”
“구름아, 이리 와!”
일어나 팔을 뻗었지만 구름이는 펄쩍 뛰어 내 손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물고 있던 약초를 오물오물 씹어 삼키더니 코를 킁킁대며 널따란 테이블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도 황급히 일어나 구름이를 쫓았지만 늘어놓은 재료들이 상하지 않게 잡으려니 자꾸 헛손질만 반복했다.
“너 잡히면 정말 혼날 줄 알아. 마지막 기회 준다. 삼, 이, 일!”
“메에에!!”
“일 반, 일 반의 반…….”
이리저리 횡보하던 구름이가 발을 멈춘 건 꿈꾸는 가지 묶음 앞이었다. 꿈꾸는 가지는 아까 이미 감정해 본 적 있는 물건이라 마음을 놓고 발을 멈췄다.
“아, 그게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구름이가 발과 코를 이용해 잘 모아 놓은 묶음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재료야 다시 정리하면 될 일이고, 애쓰는 구름이의 모습을 귀엽게 구경하는데 고개를 든 구름이의 입에 물린 가지 상태가 이상했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다른 가지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약간 검붉은 빛이 돌았다.
“야, 야야야! 잠깐! 구름이 뱉어!”
“메.”
도망가려는 구름이를 잡아 한 팔로 구속한 채 입에 물린 가지를 잡아당겼다.
“뱉어! 뱉어!”
“미에에에!”
구름이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자기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듯 일견 억울해 보여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볼을 콕콕 찌르며 가지를 잡아당긴 끝에 결국 가지를 쟁취할 수 있었다.
검붉은 가지 중앙엔 구름이의 이빨 자국이 동그랗게 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손안의 가지를 내려다봤다. 이제야 알아챈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상한 빛깔이었다. 정신없이 채집에 몰두하느라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감정.”
<저주받은 꿈꾸는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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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게다가 이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주받았다는 수식언, 심지어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며 계속해 변하는 까만 글자들은 전에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성산하에게서.
“의진아. 뭐해?”
“어. 어?”
그때 뒤에서 들려온 성산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안의 가지를 놓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구름이가 폴짝 뛰어 가지를 받아먹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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