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61.
제로가 놈들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게 분명했다. 음산하고 으스스한 동굴을 울리는 발소리는 내 것 하나뿐, 누군가 뒤따르는 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어디선가는 아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저 멀리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 등이 아득히 들려오곤 했다.
던전에 혼자 남은 적은 처음이라 마음이 의지할 데 없이 불안했다. 심지어 여긴 몬스터뿐 아니라 날 쫓는 인간들도 가득하잖아! 나 같은 유일무이한 고급 인력이 이런 꼴이라니…, 욕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몬스터들이 나를 인지하지 못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대한 피하려 애썼지만 아예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했는데, 어두운 유령같이 생긴 몬스터가 나를 보고도 그냥 통과해 지나쳤다.
‘아마도 구름이 때문이겠지…….’
가방 속의 구름이 주위로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생겨 있었다. 신비롭긴 했으나 누군가 이 꼴을 발견한다면 보자마자 던전이 찾는 제물이 바로 구름이라는 걸 알아챌 게 분명했다. 불안한 마음에 가방을 더욱 꼼꼼히 여몄다.
가파른 절벽과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물웅덩이를 지나며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제로의 조언대로 왼쪽 길을 선택했다. 다행히 몬스터에게도 발각되는 일 없이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다섯 번째 갈림길에선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젠장…….”
쉼 없이 이어지던 진동 탓인지 동굴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막다른 길까진 아니었지만 왼쪽은 바윗덩이와 토사물들로 꽉 막혀 지나갈 틈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두 손으로 중간 크기의 바위 하나를 잡아 들었다.
“끄응……. 아, 안 돼. 안 돼. 포기.”
급속도로 깎이는 체력을 보고 급히 돌을 내려놓았다. 서둘러 포션을 꺼내 마시며 곁눈질로 오른쪽 길을 훑었다.
어쩔 수 없지. 저기로 가는 수밖엔.
***
제로가 괜히 왼쪽으로만 가라고 한 게 아니었다. 오른쪽 길로 가자마자 여태껏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이비 놈들을 두 번이나 발견했다. 다행히 구름이의 기운이 놈들에게도 통하는 것인지 내가 있다는 걸 들키진 않았지만 놈들이 지나갈 때까지 이끼가 가득 핀 바위틈 사이에 몸을 숨기고 기다려야 했다. 일행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놈들이 떠드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아직도 못 찾았다니! 이러다 서익 놈들이 가로채기라도 하면 어떡해? 설마 벌써 빠져나간 건 아니겠지?”
“아니야. 지도를 보면 아직 19층에 있다고 나와 있어.”
좆같은 지도 얘기에 괜히 찔려 몸을 더 움츠리며 놈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개새끼들아, 여기서 떠들지 말고 빨리 꺼져!’
떠드는 놈만 세어도 최소 다섯. 걸리면 좆된다. 유일한 동아줄인 구름이를 꼭 껴안고 숨을 죽였다.
“어쨌건 지금이 절호의 찬스야. 강의진만 잡으면 카스토르와 하말, 한 번에 둘을 처리할 수 있잖아. 서익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다고. 그나저나 종속 문제는…….”
“강의진이 죽으면 종속이 풀릴 테니 문제없어. 그 전에 잡는 게 문제지만. 아무래도 미스틱이 숨겨 놓은 것 같지.”
“헌터 새끼들 성가셔 죽겠어. 그분의 힘을 보기만 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무릎 꿇을 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미스틱이 알아챘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잖아. 심지어 녹스의 강의진이 카스토르기까지 하니.”
“태제헌 그 배신자 새끼는…….”
“거기서 뭐 해? 이동할 거야, 빨리 이쪽으로 와!”
뭐지? 놈들 입에서 나오는 태제헌의 이름에 귀를 쫑긋하는데 누군가의 외침에 둘의 말이 끊겼다. 멀리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결국 둘이 발을 옮겼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직되어 있던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새끼들……. 태제헌이랑 뭐가 있는 건가?’
태제헌이 쓰레기 새끼긴 했지만 배신자 소리를 듣고 다닐 위인은 아닌데. 그보다도 하나 건진 게 있었다. 구름이.
‘내가 죽어야 종속이 풀린다고 했지?’
나만 살아 있다면 구름이도 아까처럼 끌려갈 일이 없단 소리였다.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가 여태껏 확인하지 못했던 메인 퀘스트에 생각이 닿았다. 곧바로 퀘스트창을 불러내자 처음 보는 퀘스트가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 }
#5.5 ZODIAC SYSTEM 재건
조건 : 온전한 성좌를 완성해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함.
보유 조각 : 하말♈, 카스토르♊
난이도 : S
제한 시간 : ∞
보상 : 마지막 소원, 성좌의 힘
실패 시 퀘스트 영구 삭제
※ 거부 불가능
“뭐야, 이게?”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조건도 애매한 데다 보상도 이상하고…….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 퀘스트창을 치워 버리는데 구름이의 머리 위로 시스템창이 사그라들었다. 잠깐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구름이에게 손을 올려 플라멜의 현안을 사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름이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구름이>
성좌의 조각에 의지가 깃든 존재
[강의진]에게 종속되어있다.
- 레벨 : 81
- 종족 : 몬스터
- 계열 : 신성계
- 등급 : B+
- 상태 : 혼절
- 스킬 : 머리 박치기(B), 사자후(A), 기선제압(B)
- 스탯
.
.
처음 보는 구름이의 상태창에 놀라기도 전에 알람이 떠올랐다.
「적합자입니다. 숨겨진 설정을 보시겠습니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상태창이 빙글 돌아가며 믿기지 않는 정보를 보여 줬다.
< 하말♈ >
황도 12궁 중 하나로 ZODIAC SYSTEM의 첫째 성좌
- 레벨 : 측정불가
- 계열 : 신성계
- 등급 : EX
구름이의 위로 떠오른 상태창을 말없이 바라봤다. 구름이의 정체를 모르진 않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엑스트라 급이라니……. 성좌라 그런가, 등급도 어마어마하다. 난생처음 봤던 엑스트라 급 퀘스트를 완벽하게 실패해 본 경험이 있어 그런가 EX란 글자만 봐도 입 안이 썼다.
만약 조건을 충족해 구름이가 하말이 된다면……. 제자리라는 게 대체 어딜 말하는 걸까? 그때가 오면 구름이와 헤어져야 하는 건가.
“……싫은데.”
입술이 삐죽 나왔다. 구름이와 헤어진다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분명 처음엔 귀찮고 시끄러운 털뭉치였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정이 든 건지.
구름이의 상태창에서 봤던 혼절이란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안전한 곳을 찾자마자 구름이가 먹을 포션을 만들어야지. 잠든 구름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투덜댔다.
‘멋대로 맡겨 놓은 주제에 또 제멋대로 빼앗아 가기냐. 하말이면 다야? 그렇게 치면 나도 카스토르가 있으니……. 응? 잠깐.’
멈칫한 나는 구름이를 쓰다듬던 손을 슬며시 뒤집어 봤다. 손바닥에 문양이 선명하다. 카스토르의 문양이었다.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에 말도 안 된다 고개를 젓다가 혹시나 하는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문양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실로 우스운 꼴이었다. 그냥 상태창을 띄우면 될 걸 혼자 양손을 부여잡고 나를 감정한다니. 하지만…….
“플라멜의 현안.”
「<강의진> 등급 : S급…….」
「<주호현> 레벨 : 43…….」
「<강의진> 등급 : S급…….」
강의진, 주호현, 강의진, 주호현……. 서로 다른 두 개의 상태창이 겨루듯 앞다퉈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개가 중첩되어 뿌예진 시야 사이로 단 하나, 다른 알람이 눈에 띄었다.
「적합자입니다. 숨겨진 설정을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을 흐리던 상태창들이 동시에 뒤집어지며 모조리 사라지고 딱 하나만이 남아 내 앞에 둥둥 떠올랐다.
< 카스토르♊ >
황도 12궁 중 하나로 ZODIAC SYSTEM의 셋째 성좌
- 레벨 : 측정불가
- 계열 : 복합계
- 등급 : EX
“말도 안 돼…….”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카스토르의 문양을 갖고 있긴 했지만 난 그저 운반책일 뿐이라 여겼지 그 이상으로는 전혀 그 무엇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시스템창을 지우고 다시 띄워 봐도 결과는 같았다. 플라멜의 현안이, 내가 사람이 아니라 성좌라 말하고 있었다. 황당하게 문장이 새겨진 양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내가 카스토르야? 씨발, 왜 멀쩡한 사람을 성좌를 만들어?
황당했지만 이쯤 되니 메인 퀘스트 내용이 더 이해 가지 않았다. 만일 내가 카스토르라고 쳐, 그렇다면 ‘제자리’라는 게 어딜 말하는 거지? 설마 녹스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좆같게?
도망치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퀘스트창과 상태창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질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흐느끼는 울음이 들려왔다.
“흐으……. 끅, 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또 놈들인가? 급히 구름이를 껴안고 몸을 숨겼다.
놈들이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뭔가 달랐다. 질질 끌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섣불리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고민만 하던 내가 달려 나간 건 결국 울음을 터트린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였다.
“흐엉, 흐으……. 흐어앙, 효영아아……. 씨발 아파아아…….”
“누나?”
눈물 콧물 흘리며 피범벅이 된 다리에서 화살을 빼내던 이재아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를 바라봤다.
“끕! 의…… 의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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