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파업 선언-164화 (164/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64.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아…….”

‘갑자기 웬 제물 타령이야. 설마 구름이가 제물이라는 것을 아는 건 아니겠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짚는 놈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데 태제헌이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훑더니 등을 돌렸다.

“곱게 자라서는……. 쯧, 이젠 직접 당해 볼 때도 됐지.”

“무슨 개소리, 아!”

태제헌이 말도 없이 앞서 나가며 로프를 잡아당겼다. 그 뒤를 투덜대며 뒤따라갔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희미한 빛에 의존해 걷다 보니 완전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가는 길에 널린 재료들 역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아까 봤던 웡져의 버섯 무리처럼 대부분이 저주받은 것들이었다. 채집 아이템들은 물론이거니와 룬과 루트가 사냥해 물고 다니는 작은 몬스터들에게서도 여태껏 보던 것들과 달리 빛깔이 탁하다거나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룬과 루트가 뜯어 먹으려는 것을 태제헌이 씁 소리를 내어 막을 정도였다.

‘던전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 이 던전,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런다면 태제헌이 관심을 보일 게 뻔했다. 성산하의 손을 치료할 실마리이니만큼 만전을 기해야 한다. 언제든 원할 때면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주위에 널렸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 멀리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다시 태제헌과 합류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싸움 붙을 듯 날 선 공기에 눈을 굴리는데 태제헌을 발견한 녹스 놈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중 한 여자가 시체 둘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으으…….”

아, 시체가 아니었네.

신음하며 꿈틀대던 놈이 한 대 후려 맞고는 다시 털썩 쓰러졌다. 하나는 녹스 제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일반 헌터였다. 우리 앞까지 다가온 여자가 바닥에 둘을 내팽개치더니 태제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 스파이를 찾아냈습니다.”

“저희 위치를 전송하던 것을 발견해 급히 잡긴 했지만 이미 정보가 새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편이 좋…….”

“도망이라도 치자는 소리인가.”

“앗, 아니…. 제 말은…….”

태제헌이 헛웃음을 쳤다. 뭔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예감했는지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새로 온 놈인가? 태제헌한테 조언 같은 거 하는 거 아닌데 멍청하긴……. 속으로 혀를 찼다. 서릿발같이 싸늘한 눈빛에 그대로 두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 끼어들어 말했다.

“여기 있을 거예요? 이동 안 할 거면 이것 좀 풀어 줘요.”

“…왜. 어디 가려고.”

“잠깐 제작 좀 할래요.”

묶인 손목을 짜증스레 흔들며 말하자 태제헌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이씨, 아니라고요.”

날 빤히 바라보던 태제헌이 손을 까딱였다. 커다란 손바닥 위에 손을 올리며 슬쩍 옆을 돌아보자 감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녹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내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녹스 길드원은 굉장히 오랜만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여자 길드원이 놈의 옆구리를 팍 치고는 흘깃 나를 노려봤다.

그래, 저거지. 이제야 익숙한 눈빛이다. 매듭을 잘라 낸 태제헌이 한 박자 늦게 옆을 돌아봤지만 이미 기강이 잡힌 놈들은 아닌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위험하니 멀리 가지 마. 놈들이…….”

“놈들이 어디 있을지 모른다고- 나도 알아요.”

태제헌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나 제작할 만한 곳을 찾아 기웃거렸다.

“여기가 좋겠다.”

조금 지형이 낮아 바윗덩이들이 내 모습은 가려 주면서도 등 뒤는 암벽이라 불시의 습격을 당할 일도 없었다. 암벽 사이로 길처럼 보이는 틈이 하나 나 있긴 한데 이정도야 괜찮았다. 바람이 안쪽으로 흐르는 걸 보니 오히려 불을 피우면 연기도 빨아들여 줄 테니까!

가방에서 고생한 구름이를 꺼내 푹신한 곳에 눕혀 주고 내 제작 도구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위에서 떨어지는 잔돌들에 시선을 올리자 앞발을 꼬고 엎드려 나를 내려다보는 룬과 루트가 보였다.

“뭐야. 아예 자리 깔았냐?”

물론 태제헌이 날 혼자 풀어 놨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감시가 붙어 좋을 건 없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 안심하고 꺼지라는 손짓에도 룬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구름이 아픈 거 안 보여? 치료해 줘야지. 룬 너도 예전에 내 포션 먹고 나았으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기냐?”

“……웡.”

“뭐, 뭐. 어떻게 해야 갈 건데.”

룬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챱챱대기 시작했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 결국 한숨 쉬며 인벤토리를 뒤져 육포 묶음을 꺼냈다. 룬과 루트가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반을 나눠 하나씩 던져 주자 그대로 낚아챈 룬과 루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육포를 뜯으러 떠났다.

“저렇게 안 키웠는데, 누굴 닮아서는…….”

강아지일 적에는 말도 잘 듣고 착했는데 말이지. 어쨌든 죄다 태제헌 탓이다.

구경꾼도 사라졌겠다, 털썩 자리에 앉아 다시 구름이를 진단했다.

< 구름이 >

성좌의 조각에 의지가 깃든 존재

[강의진]에게 종속되어 있다.

- 레벨 : 81

- 종족 : 몬스터

- 계열 : 신성계

- 등급 : B+

- 상태 : 혼절

- 스킬 : 머리 박치기(B), 사자후(A), 기선제압(B)

- 스탯

.

.

「적합자입니다. 숨겨진 설정을 보시겠습니까?」

“필요 없어.”

역시 아직도 혼절 상태다. 손을 휘저어 상태창을 치워 버리고 있는 포션들을 다 꺼냈다.

‘일단 지금은 몬스터니까…. 잠깐, 하지만 구름이는 신성계인데?’

몬스터에겐 힐링 포션이 독으로 작용하는 데 반해 신성계는 힐링포션과 상성이 잘 맞는다. 이런 몬스터는 처음이라-사실 지금까지 몬스터를 치료할 일도 없었지만-포션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떤 포션을 써도 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의신의 손길’과 ‘플라멜의 현안’을 사용해 별 난리를 다 쳐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고민하다 결국 구름이가 잘 먹던 재료들을 빻아 즙을 내어 입에 흘려 넣었다. 포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효과일 테지만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구름이가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분홍빛 귀가 푸르르 떨리고 오른발이 까딱거렸다. 흥분을 억누르고 구름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열리고 구름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구름아.”

“메에.”

구름이를 꼭 껴안았다. 이렇게 귀엽고 착한 구름이를 두고, 뭐? 제물? 엿이나 먹어라.

기쁨을 다 만끽하기도 전에 구름이는 내가 땅에 내려놓자마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주위에 자라나 있는 재료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구름이가 ‘저주받은’ 수식언에 면역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들이 워낙 수상하게 생긴 탓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혹시 변종이 있을까 봐 구름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재료를 감정해 댔다.

얼굴을 박은 채로 먹느라 씰룩대는 하얀 엉덩이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배고팠냐…….”

저주받은 꿈꾸는 가지를 처음 먹었을 땐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제 나름의 정화 방법도 생긴 것인지 한참 주워 먹다 멈춰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대견한 모습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주위가 어둡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챘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빛이 들어오는 좁은 틈새가 보였다. 그제야 내가 암벽 사이의 크랙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음, 위험한데……. 구름아. 이리 와.”

“메에?”

구름이가 제가 가려던 길과 뒤에 있는 나를 번갈아 봤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는 한다. 저 어둠 속에서 언뜻 보이는 검보랏빛 꽃에서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질반질하니 색도 예쁘고……. 사실 나도 탐났다.

불길한 예감과 새로운 재료 사이에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을 왜 해? 당연히 재료를 구해야지!

“그럼 우리 저것만 구하고 갈까?”

“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조금 지체한다고 문제 생기겠어? 태제헌도 모를 거야.”

“메에!”

구름이도 신이 나는지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었다. 그렇게 한껏 웃으며 어둠 속으로 크게 한 발 짝 내딛은 우리는…….

“으아아아악!”

“메에에에에!!”

발 디딜 곳 없이 훅 꺼지는 바닥에 그대로 밑으로 추락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구름이를 품에 안았다. 다행히 구덩이가 깊지는 않았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둥글게 말자마자 바닥과 부딪혔다.

“구름이. 괜찮아?”

“……미에.”

급히 야광등을 펼치며 묻자 구름이도 놀랐는지 동그래진 눈을 굴리고 있었다. 내 실수다. 아까부터 잘 살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그나마 바위에 이끼가 덮여 있어 다치진 않아 다행이었다. 머리 위로 야광등을 휘두르며 깊이를 가늠했다.

“아이씨. 무슨 구덩이가……. 저기까지 또 어떻게 올라가냐.”

깊이는 내 키의 세 배 정도.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건 아니었다만 쓸 만한 루트를 찾을 때까지 몇 번은 떨어질 게 분명했다. 주위를 더듬으며 발을 디딜 곳들을 찾는데 구름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물고 자꾸 잡아당겼다.

“구름아. 안 돼. 태제헌한테 이 꼴 걸렸다간 진짜 목줄 채워질지도 모른다고……. 구름아!”

따라오라는 듯 나를 돌아본 구름이가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6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