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69.
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물 여섯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이를 먹을지 정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럼 지난달부터로 할까.”
“장난치지 말고! 나한테 거짓 한 거야?”
“내가 ‘몇 살이다.’ 말한 적이 있든가? 너 혼자 착각하고 결정 내린 건 아니고? 마치 내가 여자인 줄 알았던 것처럼.”
“그, 그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나가 몇 살인지도 몰랐으니 할 말이 없었다. 워낙 조그매서 당연히 내가 형인 줄 알았지.
뾰족한 눈을 한 채 성산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 키 작았잖아.”
“그랬지. 한동안 멈췄다가 각성과 동시에 성장했어.”
씨,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크는 게 말이 돼? 성훤 그 할배 풍채가 대단한데 아무래도 성산하 역시 유전적으로 타고난 듯싶었다.
여유로운 얼굴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사나라 명명하며 서로 다른 존재라고 선을 그었는데 둘이 합쳐져 버렸다. 성산하가 뭐라든 싫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누군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성산하는 끈질기게 답을 요구했다.
“그래서, 왜 모른 척한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내겐 나름 중요한 일인걸. 보고 실망했다고 하면 서운할 것 같거든.”
“실망은 무슨, 너한테 맞은 게 쪽팔려서 그랬다 왜!”
“아…?”
황당한 헛소리에 버럭 소리치자 웃음이 사라진 성산하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놈을 뿌리치고 등을 돌려 걸어가는데 성산하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의진, 의진아! 그때 그건…….”
“놔. 씨발 쪽팔리니까.”
“미안해.”
성산하가 뒤에서 날 껴안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는데 가슴 위로 교차된 두 팔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뒤로 스치는 숨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땐, 내가 너무 예민했어. 네가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서 난…….”
“…….”
음. 죽은 게 맞긴 한데.
흔들리는 성산하의 목소리에 마른 입술을 적시다 물었다.
“너 그럼, 계속 날 찾아다닌 거냐?”
“찾을 필요는 없었어. 어디에 있을지는 명확했으니까.”
“뭐, 그렇긴 한데….”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날 계속 찾아다녔다니 오히려 좋기까지 했다.
‘나도 잊어버리지 말걸.’
물론 그땐 이유가 있었지만.
입을 삐죽대다 주위를 둘러봤다. 석상으로 변한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녹스에서 실험 결과를 모아 둔 책을 봤었어. 거기에 우리 알파룸이랑 너도 죽었다고 되어 있었고.”
“…….”
“너도 여기 왔던 거냐? 아니면…….”
조심스러운 물음에 침묵하던 성산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성 훈련을 시작했어. 신기하게도 보육원의 거의 모두가 각성했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각성 가능성이 있는 애들만 모았을 거란 소리야?”
놀라 뒤를 돌아보자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외의 실험도 함께 이루어졌어. 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실험의 일환으로 알파룸 애들은 천지심연 던전에 보내졌고 그때 이 던전의 주인을 만나게 됐지. 바로 이곳에서.”
“그럼 저 석상들은…….”
“공격 당하던 순간이 잘 기억은 나지 않아. 하지만 처음 랭크가 C급이였던 내가 그때 재각성하며 S급이 되었고…… 눈을 떠 보니.”
무표정한 성산하가 제 앞을 턱짓했다. 그 눈빛에 순간 스치는 탈력감을 본 나는 할 말을 잃고 놈을 바라봤다. 잠시 후, 표정을 갈무리한 성산하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어쩌면 저 애들을 저렇게 만든 게 던전의 주인이 아니라 나일 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각성하기 직전까지는 살아 있었거든. 모두 다.”
성산하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입만 뻐끔대다 곧 그럴 리가 없단 생각에 소리쳤다.
“개소리 맞네!! 내가 아까 했던 말은 귓등으로 처들었냐? 감정 해 봤는데 쟤네도 저주 걸려서 굳은 거 맞아. 내 스킬이 보증해!”
“의진이 손길?”
“그거 말고! 다른 감정 스킬 있어, 플라멜의 현안이라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돌이 되어 버린 석상들을 보며 투덜댔다.
“다 망해 버린 던전의 주인이면서 저주는 무슨 저주? 좆까라 그래. 분명 정화할 방법이 있을 거야.”
성산하는 말없이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 목에 얼굴을 묻는 놈을 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라곤 안 해.”
“……그럼 자기야는?”
“씨발. 꺼져!!”
***
성산하도 일어났겠다, 바로 나가려 했으나 문제가 있었다. 분명 내가 들어올 땐 멀쩡했던 크랙이 막힌 것이다. 애써 루트와 구름이를 데리고 구덩이까지 다시 올라왔건만 아무 소득 없이 다시 석상들이 있는 공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흘러내린 토사로 막혔을 수도. 혹은 던전 지형이 스스로 변화했거나.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던 던전이라 어느 쪽이래도 이상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 다른 쪽 길로 나가 볼까?”
“일단 길드원들에게 연락 먼저 해 보는 편이 좋겠어.”
성산하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던전에서도 서로 연락이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템이었다. 발동 조건이 번거롭기로 유명해 개인 헌터들은 거의 쓰지 못하고 대형 길드에서나 주로 쓰이는 거였다.
잠시 후 성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깥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군. 다행히 지원이 도착해 폐쇄된 천지심연 던전의 입구를 열고 있다고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정리될 듯해.”
“뭐, 잘됐네. 그사이에 석상들 좀 살펴보면 되겠다.”
풀쩍 뛰어내려 석상들이 있는 중앙으로 다가갔다. 돌로 굳어 던전의 지형이 되어 버린 상태라 뜯어 갈 수도,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없었다. 낮은 석상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돌이랑 키스할 수도 없고. 이걸 어쩐다.”
방사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니, 스킬이 활성화 되기를 기다렸다간 몇 달이 걸릴 지 몇 년이 걸릴 지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 보려고 돌아다니다 순간 드는 생각에 한 석상의 옷자락 부분을 덥썩 물었다. 그러나 입에서 떼어 내자마자 물었던 부분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경악해 구름이를 들쳐 안고 후다닥 다시 위로 올라갔다.
바위에 기댄 성산하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씨발, 심장 떨어질 뻔했네.”
“하하하, 석상과 키스라도 해 볼 심산이었어?”
“짜증 나게 하지 마라.”
옷자락으로 실험했기에 다행이지 하마터면 애 하나를 죽일 뻔했다. 성산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는데 놈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정화 방법 말이야. 왜 하필 키스지?”
“아, 그건 말이지- 가이드가 에스퍼의 폭주 수치를 낮춰 주는 걸 가이딩이라고 하는데 가이딩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거든 하나는 방사 가이딩이고 다른 하나는 접촉 가이딩인데 개중 방사 가이딩은 서로 닿지 않고도 가이딩 기운을…….”
전에 센터에서 타의로 배우게 된 지식들을 열거하며 설명해 줬다. 에스퍼와 가이드, 방사 가이딩과 접촉 가이딩까지 다 듣던 성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는 것 같군. 에스퍼들의 방식. 그런데 그런 것치곤…….”
“그런 것치곤, 뭐?”
성산하가 씨익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키스가 서툴던데.”
“씨……, 그딴 걸 왜 잘해야 하는데? 해 본 적 없으니 서툰 게 당연하지! 안 해 봐서 그렇지 키스도 앞으로 몇 번 더 하면 잘할 게 분명해.”
“나랑 한 게 처음이야?”
“당연하지. 난 에스퍼들이랑도 접촉 가이딩 안 해 봤어.”
“그랬어?”
“당연하지!”
성산하의 웃음이 짙어졌다.
에스퍼들과의 접촉 가이딩은 떠올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신연형 개새끼. 안 죽고 살아 있으려나.’
머릿속에서 몇 대 더 패 주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성산하를 돌아보고 물었다.
“아까 봤는데 너 엑스트라 급 스킬 있더라.”
“레저렉션? 그거 어차피 못 써. 잠겨 있는데 해금 조건이 뭔지 모르거든.”
“뭐? 모르는 게 어딨어! 그래도 엑스트라 급이면 뭐라도 해 봐야지. 그거 무슨 스킬인데?”
“부활?”
“미, 미미친! 뭐 그딴 사기 스킬이 다 있어!!”
부활이라니. 그딴 스킬이 있단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물론 엄청난 제약에 심각할 정도로 어려운 발동 조건이 주렁주렁 따라붙겠지만, 그래도 부활이라니!!
입이 떡 벌어져 바라보는데 성산하가 피식 웃으며 내 턱을 툭 쳤다.
“왜. 너도 멋있는 스킬 있잖아. 의진이 손길.”
“의-신-의 손길이라고! 의신! 신!”
“그래. 알겠어. 의진.”
이 미친 새끼가…….
성산하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욕이 나오질 않아 정면을 바라보고 욕을 뱉는데 성산하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또 궁금한 거 없어?”
“응, 별로. 엑스트라 급 스킬이 제일 궁금했어.”
“상태창에 그런 건 안 보였어?”
“어떤 거?”
뭘 말하는 건가 싶어 돌아보자 성산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강의진.”
“……미친놈아.”
“없었어? 이상하다. 분명 적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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