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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파업 선언-170화 (170/257)

엑스트라 파업 선언 170.

아까부터 시덥잖은 소리만 내뱉는 입을 흘기다 인벤토리를 열었다. 연구를 계속할 생각으로 인벤토리를 뒤적이는데 말없이 지켜보던 성산하가 볼을 쿡 찔렀다. 돌아보지 않은 채 주머니칼을 꺼내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락한 것으로 알았는지 손이 얼굴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귓바퀴를 덧그리다 귓불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처음엔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재료를 손질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손길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중한 입술에 힘이 들어간 채 재료의 껍질을 벗겨 내는데 아랫입술을 만지작대던 성산하가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거냐?”

황당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긍정하듯 나를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다정한 시선에 머리를 긁적이다 툭 내뱉었다.

“그딴 거 없어.”

“잘됐다. 그럼 나 좋아하면 되겠네.”

“무, 뭐……?”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성산하에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대는데 귀엽다는 듯 한 손으로 내 양 볼을 조몰락거리던 성산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을 재촉했다.

“응? 의진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절대 안….”

“안 되는 이유 말해 봐.”

안 되는 이유? 말할 필요도 없다. 존나 많았으니까.

가장 먼저 난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데다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세계 유일의 S급 포션 마스터라 어마어마하게 바쁘거든. 어차피 연애할 시간도 없을 테고 심지어 그 상대가 성산하라면 더더욱이나…….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이유 중에 어떤 걸 먼저 말할지 고민했다.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웃으며 말꼬리를 따라 하는 놈의 표정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성산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란걸.

“갑자기 왜 이래.”

“모르는 척하지 마. 갑자기 아니잖아.”

“난, 나는…… 그딴 거 몰라.”

볼에 닿은 손을 쳐 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에 쥐고 있던 풀 무더기만 만지작대는데 시야에 성산하의 손이 들어왔다. 내 손을 덮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자 귀에 성산하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내가 다 알려 줄게. 그러니까 의진이 너는 대답만 해.”

“……어떤 대답?”

“좋은지, 싫은지. 이를테면…….”

손 틈새를 파고드는 성산하의 손가락에 살짝 잡고 있던 재료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손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돌려 맞잡은 성산하가 몸을 기울여 맞붙였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지켜보는데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다. 웃음기를 담뿍 담은 성산하가 속삭여 물었다.

“좋아, 싫어?”

“그냥… 간지러운데.”

그러자 이번엔 성산하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좋아, 싫어?”

“몰라, 답답해.”

“놓을까? 싫어?”

“싫…, 싫은 것까진 아닌데…….”

답답하고 왜인지 목이 턱 하고 막혀 울렁였다. 하지만 싫진 않았고 순순히 싫다고 말한다는 게 왜인지 지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내젔자 머리 위로 웃음이 떨어졌다.

“그럼 이건?”

이번엔 또 뭐일지 오감을 곤두세우는데 성산하가 고개 숙여 키스했다. 놀람도 잠시,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성산하가 상체를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짧았던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졌다. 은사가 이어져 촉촉하게 빛나는 분홍빛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좋아.”

“그래. 이렇게.”

성산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놈을 빤히 바라보다 멱살을 잡아 잡아당겼다. 놀란 듯 잠시 눈이 커졌던 성산하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렇게 4%만큼 키스했다.

***

“메!”

구름이가 우물대며 씹던 것을 퉤 뱉었다. 처음 구름이를 유혹했었던 검보라빛 꽃이 짓이겨진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의 안테나>

그저 그런 흔한 꽃이라고 생각하면 위험해!

꽃잎은 ■■■■■의 귀가 되어, 그 꽃술은 눈이 되어.

뿌리는 범접할 수 없는 어두운 힘의 정수를 가득 담고 있다.

처음 봤을 때도 심상치 않았는데 과연 달랐다. ‘저주받은’ 수식언도 없는데 그 어떤 재료보다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고, 정화한 구름이 역시 어느 때보다도 검은 연기를 많이 내뿜고 있었다.

“수상한데……. 하나는 온전한 상태로 가져가야겠다.”

꽃이 하나 더 있어 다행이었다. 구덩이 위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꽃을 캐냈다. 검고 울퉁불퉁한 뿌리는 너무 얇고 흙과 단단히 엉켜 있어 S급 포션 마스터라 채집을 엄청나게 많이 해 본, 노련한 베테랑인 나마저도 잔뿌리 몇 개는 놓쳐 버리고 말았다.

검고 짙은, 꼭 머리카락이나 시체의 핏줄처럼 보이는 뿌리 위로는 잎사귀는 하나도 없이 거무튀튀한 줄기 하나만 우뚝 솟았다. 그 끝에는 구름이를 홀린 검보라빛 꽃이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 다시 훌쩍 뛰어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구름이와 루트가 나를 반겼다.

“월! 월월!”

“메에에에에.”

“오래 기다렸지? 최대한 뿌리를 보존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어. 이만 가자.”

구름이와 루트와 함께 석상이 있는 공동으로 돌아왔다. 주위 길을 찾아보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던 성산하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꽃을 조심스럽게 꺼내 바위 위에 올려놨다. 꽃을 분해해 보관 방법을 탐색하는데 기척이 가까워졌다. 돌아보지도 않고 인사했다.

“어, 왔냐.”

“뭐 하고 있었어?”

“재료 분석. 최대한 상태 유지해서 가져가려고. 간이 도구 가지고는 추출이 제대로 안 될 것 같아서 공방 가서 알아봐야 해. 겸사겸사 다른 재료들도 정리하고.”

꽃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하자 작게 웃은 성산하는 주위를 맴돌던 루트와 구름이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자리했다.

어느 정도 분류가 끝났을 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한쪽에 앉아 저녁 식사를 만드는 성산하에게 다가갔다.

“아직 연락은 안 왔어?”

“…흐음. 밖이 힘든가? 다들 늦네.”

“달팽이 새끼들. 존나 늦네. ……뭐, 너도 따로 나갈 길도 못 찾았겠고.”

성산하의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라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하아암. 밥 먹고 잠이나 좀 자야지.”

“다 됐어. 먹어.”

“응.”

사소한 것에 재능 낭비를 할 필요 없다는 성산하의 만류에 자연스럽게 나는 해 주는 밥을 받아먹기만 했다.

털썩 주저앉아 성산하가 내미는 그릇을 받았다. 재료가 몇 개 들어가지 않은 간단한 스튜였지만 맛은 좋았다.

동그랗게 나온 배를 두드리며 드러눕자 성산하가 제 허벅지를 내주었다. 딱딱했지만 땅보다는 낫기에 사양치 않고 베고 누웠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좋지 않을 텐데.”

“괜찮아. 소화 포션 먹으면 돼.”

“그런 포션도 있나? 그런데 너 포션 안 마셨잖아. 위에 구멍 난다니까.”

“위에 구멍 나도 힐링 포션 마시면 돼.”

“……하하. 그래. 포션지상주의를 어떻게 말리겠어.”

포션지상주의는 무슨. 속으로 투덜대며 눈을 감았다. 곧바로 잠이 오진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스치는 손가락과 어디선가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아 몸을 나른히 늘어뜨리는데 작게 속삭이는 성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의진아.”

“…….”

“웃긴 소리인 줄은 아는데, 나가기 싫어.”

“존…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나가기 싫은 게 아니라 못 나가는 거거든.”

“하하, 그런가.”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작게 웃는 성산하가 보였다.

“동행자가 S급 포션 마스터라는 것에 깊은 감사를 하도록 해. 나와 함께라면 던전에서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으응. 영광이네?”

능청스러운 답에 입을 삐죽대다 놈을 올려다본 채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 변했어.”

“그런가? 난 똑같은 것 같은데.”

“지랄 마! 사나는 존나 착하고 귀엽고 예뻤어. 조용하고 나도 잘 따랐다고!!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말하다 격양돼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쾅쾅 치며 말하자 성산하가 피식 비웃었다.

“네 앞에서만 착한 척한 건데.”

“…척은 무슨! 사나는 그때도 착했어. 혼자 재우기 걱정될 정도였지.”

“그런 말 하면 듣는 ‘사나’ 심장 떨려서 못 잘 것 같은데.”

“씹, 이딴 소리도 안 했다고.”

“그럼 어땠어?”

웃으며 되묻는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성산하가 내 다리를 톡톡 치며 재촉했다.

“말해 줘. 네 눈에 비친 나는 어땠는지 궁금해.”

“……그땐 말이야. 엄청 착하고 예뻤어. 아, 무슨 일도 있었냐면 하루는 소풍엘 가서 다른 학교 애들이랑 만났었거든. 우리보고 부모도 없는 땅거지라고 놀렸는데 원장쌤이 그냥 지나가라고 해서 지나쳤거든 근데 그 새끼들이 너 예쁘다고 따라온 거야. 근데 내가 그때 옆에 없어서…. 씨이 선재 새끼가 몰래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고 해서 난 너 그거 사다 주려고……. 여하튼 그 새끼들이 몰래 너 쫓아가서 어디 사냐고 물어보고 그랬대. 근데 그러다 자기들끼리 비탈에서 넘어져서 엄청 구른 거야. 새끼들이 쪽팔린 줄도 모르고 니가 그랬다고 거짓말을 쳐서…….”

“으음. 내가 친 게 아니라 미끄러졌다고.”

“장난하냐? 우리 사나가 그때 얼마나 작고 약했는데 걔넬 어떻게 때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 웃던 성산하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응, 그래서?”

“그래서 뭐. 우리 알파룸 애들이 다 몰려가서 개패 줬지. 그래서 가을 소풍 취소되고……. 아아, 그리고 또! 무슨 재단에서 헌터들이 보육원 보러 온다고 다들 준비했는데 그때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입양 간다고 소문이 퍼졌거든. 뭐 지금이야 다 개구라에 실험이 목적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여하튼 네가 그날따라 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입양 갈까 봐 내가 손잡고 도망쳤다가 원장쌤한테 걸려서…….”

시작은 성산하의 가벼운 물음이었지만 묻어 놨던 사나 이야기를 하자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나 얘기할 거리가 쉴 틈 없이 생겨났다.

한참 얘기하던 때, 갑자기 성산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느새 소환한 로드를 든 채 옆을 돌아보는 성산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뚱뚱한…. 말? 새?

“삐이. 삐삐삐.”

“뭐야? 저건.”

“그리폰 새끼군. 저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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