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파업 선언 174.
“돌아온 지가 언젠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이 귀에 걸려서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백다인이 다가와 머리에 애들 장난감같이 조악해 촌스럽게 화려한 왕관을 얹어 줬다.
“와! 정말 잘 어울려요!!”
“이게 뭐야. 유치하게…….”
“사장님 촛불 끄세요! 소원 비셔야 합니다.”
진명이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내밀며 말했다. 케이크 위에 꽂힌 연둣빛 초 위의 불길이 흔들렸다.
“소원?”
“네. 소원이요. 촛불을 끄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들 하잖아요.”
소원. 소원이라…….
생각해 보니 앞으로 뭘 해야겠다 다짐한 적은 있어도 무언가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소원을 빈 적은 없는 것 같다.
뭘 빌어야 하는 거지? 공방 잘되게 해 주세요? 하지만 포션 마스터의 공방인데, 빌지 않아도 당연히 잘될 거다.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돈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알아서 벌릴 텐데.
위태롭게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다 단숨에 불어 끄며 말했다.
“웬만하면 공방에 있게 해 줘.”
꼬맹이들도 있었기에 사이비 새끼들은 다 뒈져 버리고, 덤으로 태제헌도 사고사하면 좋겠다는 것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소원을 들은 사람들이 다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 그게 뭐예요. 사장님”
“정말 소원이 그겁니까? 하지만 지금도 공방에 계시잖습니까.”
“뭐 어때. 이거면 돼. 달리 바라는 것도 없어.”
“아저씨 바보래요- 소원 말하면 안 이루어지는데!”
“그런 게 어딨냐.”
아래서 쫑알대는 다혜와 하정이를 한 번에 들어 안고 소파로 향했다. 다 같이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데 어느 순간부터 윤하얀과 백다인이 따로 얘기하는 대화 소리가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언니. 탑 재진입 언제 하세요?”
“글쎄…. 은하가 빠지는 바람에 보조계가 한 명도 없거든. 사람을 구하고 있긴 한데 또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조금 곤란한 상태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출발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그런데 왜? 다인이도 던전 가야 해?”
“네. 드디어 아카이브에 전에 찾다가 막혔던 재료 정보가 올라와서요. 5층까지만 가면 될 것 같은데…….”
“같이 가자. 준비하고 있어. 보조계 구해지면 연락 줄게.”
“고마워요. 언니.”
“누나들 어느 쪽 탑 들어가는데?”
궁금해 묻자 윤하얀이 곧바로 답했다.
“남산 탑이요. 제주 쪽은 헌터가 많이 몰려 복잡하기도하고……. 듣기론 요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상황이 좋지 않다니?”
“변종들이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변종이라고? 지금 몬스터 말하는 거야?”
“네. 아직까진 저층에서만 발견되어 변종이래 봤자 큰 문제가 없긴 했지만 혹시라도 높은 층에서 마주친다면 그땐 곤란하니까요.”
설마 ‘저주받은’ 수식언 때문은 아니겠지?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제주도 던전에서 발생했다는 말이 영 찝찝한 게 불안했다. 이건 따로 알아봐야겠다.
***
돌아온 이후 성황을 이루는 공방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분명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데 왜 항상 포션이 부족한 건지.
포션 의뢰 우선 순위권를 주고 천랑 보물창고에서 합법적으로 뜯어 낸, 마나량을 초월적으로 늘려 주는 팔찌 덕에 그나마 마나가 부족한 일 없이 포션을 제작할 수 있었다.
“사장님. 아란 창업 공방에서 교육용 샘플 포션 외주가 들어왔습니다. 천 개나요! 헌협 지원 사업이라 대금도 장난 아닙니다.”
“수철아 그건 안 돼…. 나흘 안에 다음 주 공방 물량 완성해야 해서 시간이 없어. 의진 님. 아까 모아뎀 기업에서도 의뢰가 들어왔는데요…….”
“거절해. 걔네 녹스랑 친해.”
“네…!”
“길드 의뢰들은 다 어쩔까요? 확인 못한 의뢰서만 100장이 넘습니다!”
“수철아 녹스랑 친한…….”
“당연히 제외했죠! 녹스랑 친하거나 의뢰를 재수 없게 하거나, 시비 걸고 다녀서 평판 나쁜 재수 없는 길드들 모두 제외하고도 143장이에요.”
“……의진 님. 어떻게 할까요?”
한쪽에서 포션을 포장하던 나는 질린 눈으로 수철이와 승연이 앞에 쌓인 종이 더미를 바라봤다. 공방 물량도 부족한 상황에 대량 주문은 사치였다.
“일단 모두 보류해. 공방이 먼저니까.”
“해외 주문 건들도 미룰까요?”
“응. 개인 의뢰 빼 놓고는 다 거절해.”
그러나 대량 주문을 통으로 미뤄 놨음에도 공방으로 오는 연락은 끊이질 않았다.
“네네. 현재 대량 주문은 불가합니다. …네? 행사 참여요?”
“안 한다고 해라. 수철아.”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큼큼, 여보세요? 네네. 포션 마스터 강의진 공방 맞고요. 현재 대량 주문은 불가….”
전화기를 붙잡고 고군분투하는 수철이 뒤로 승연이가 컴퓨터를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의진 님. 버나드에서 협찬 제안이 왔습니다.”
“협찬? 그건 또 뭐야.”
“공방 방문 손님을 위한 선물들과 정원 한편에 시즌 쇼 룸을 제작해 준다는데요. 또 구모스투에서 침구를, 프로세르피나에선 정원에 심을 꽃과 관목을…….”
줄줄이 이어지는 브랜드의 향연에 의아하게 물었다.
“좋은 거잖아? 그걸 왜 해 주는 건데?”
“그, 글쎄요. 아마 의진 님께 잘 보이려는 것 아닐까요?”
승연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게 잘 보이려고 선물을 바친다니. 그건 정말…… 좋잖아!
신이나 대답했다.
“전부 기획안 보내 달라고 해.”
“저, 전부요? ……네! 알겠습니다!”
공방 관리며 손님을 응대하거나 의뢰를 받는 등의 자잘한 일들이 넘쳐 우리 셋이서 처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조만간 새로운 직원을 뽑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재료가 가득 찬 솥에 스킬을 사용하는데 옆에서 기겁한 목소리가 들렸다.
“……히익! 의진 님! 언제 이렇게 많이 만드셨어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솥 20개 분량의 힐링 포션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로부터 세 시간이나 훌쩍 지난 채였다.
“어, 그러게…….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의진 님,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마나 포션이라도 어서 드세요!”
“아냐. 괜찮아. 마나는 충분해.”
손목의 팔찌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렇게나 만들었는데 아직 마나가 반절이 넘게 남아 있었다.
나와 내 앞의 솥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승연이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다들 도착해서 의진 님 부르러 왔더니만……. 오늘은 저녁 드시고 쉬세요. 의진 님.”
“진짜 괜찮은데…. 서진이도 왔어?”
입술을 삐죽대던 승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무일 에스퍼도 함께 왔습니다.”
“그 새끼는 또 왜 온 거야? 눈치도 안 보이나.”
요즘 한서진은 일이 끝나면 항상 공방에 들러 저녁을 함께 먹고 갔다. 어차피 일이 끝난 수철이와 던전에 들어간 백다인과 윤하얀 대신 아이들을 맡은 정혁이도 함께 식사를 하기에 몇 놈 더 낀다 해도 괜찮았지만……. 호텔에서의 일이 마치 없던 일이라도 되는 양 굴며 넉살 좋게 달라붙는 박무일 새끼가 문제였다.
“…진 에스퍼도 똑같잖아요…….”
“응?”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의아하게 돌아보자 입을 꼭 다문 승연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서 올라가요.”
위로 올라가자 탁자 맞은편에 각각 한 자리씩 비워져 있었다. 한서진이 반갑게 일어나 웃었다.
“형 왔어요? 제 옆에 앉아요.”
“거긴 제 자리……!”
승연이가 한서진이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으나 한서진이 코웃음 치며 맞은편 가장 먼 자리를 턱짓했다.
“저기 빈 자리 있네요. 원승원 씨.”
승연이가 울상으로 수철이 옆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꼬맹이 둘을 제외하곤 시커먼 남자 여섯이 모여 밥을 먹게 되었다. 덕분에 해치우는 음식양도 어마어마했다. 개중 가장 잘 처먹는 건 박무일이었다.
꼬맹이라 그런지 위가 작아 일찍 숟가락을 놓은 다혜가 복숭아를 먹으며 종알댔다.
“저 어제 무튜브에서 서진 오빠 봤어요.”
“한서진을? 어디 나왔는데?”
“그냥 어떤 사람이 찍은 거요. 거기서 서진 오빠 영상 나왔는데 그게 무튜브 베스트동영상 3위까지 올랐어요.”
“아아, 헌협 앞에서 찍힌 거? 나는 안 나왔어?”
박무일이 씩 웃으며 묻자 다혜가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일 아저씨 영상은 인기 없었어요.”
“큭…….”
“푸하하하! 박무일 노력 좀 해야겠다?”
“전투가 아니라서 그럽니다.”
속이 시원해 웃는데 다혜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완전 멋있었어요. 나도 에스퍼 하고 싶다…….”
“야, 그게 하고 싶다고 되는 줄 알아.”
“뭐요!!”
그리고 그다지 좋지도 않다고- 에스퍼들을 앞에 두고 해당 직종을 폄하하려는데 다혜가 씩씩대더니 복숭아 옆에 있던 블루베리를 던졌다. 내쪽으로 정확히 날아오는 블루베리를 냅다 받아먹으며 웃었다.
“히히. 맛있다.”
“씨이, 아저씨 미워!!”
“그런데 시청? 거긴 왜 갔는데?”
“별거 아니에요. 시위 때문에.”
“시위? 무슨 시위?”
대수롭지 않게 묻는데 한서진 대신 박무일이 웃으며 답했다.
“아, 그게. 어제 인도 탑이 해금됐잖아요.”
“무슨 소리야. 인도 탑이 뭐 어쨌다고?”
“탑이 사라졌……. 설마 처음 듣슴까?”
박무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서진과 정혁, 하물며 다혜와 하정이도 아는 눈치인데 나와 승연이, 그리고 수철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좀 바빴어. 수철이는 어제 퇴근 못하고 공방에서 자기까지 했다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걸 몰라요! 지금 온 매체들이 다 그거 방송 중인데.”
박무일이 휴대폰을 들어 황급히 뭔가를 검색해 보여 줬다. ‘탑’이라고 검색한 페이지의 가장 최근 글들은 모두 사라진 인도의 탑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사진을 보니 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산 하나만큼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뭐야……. 설마 탑을 없애는 데 성공한 거야?”
“네. 그래서 어제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제주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밝혀라, 남산 던전을 언제까지 두고 볼 거냐……. 헌터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전국 각지에서 버스 대절하고 올라와 시위하는 통에 그거 진압하느라 근방 센터 5개가 총출동했습니다.”
인도라면 네 번째였다. 설마 제단에 제물을 바친 건가……?
고민하는데 한서진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내며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형이 뭐 해야 할 필요 없어.”
뭔가 아는 듯이 말하는 한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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